스티글리츠-장하준 교수 한국경제 대담
“칠레와 유사한 자본유입세(inflow tax)가 고려될 수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며 세계은행 수석부총재를 지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헤지펀드 등 단기 해외자본 유출입에 따른 부작용을 억제할 정책으로 자본유입세 도입과 자본이익에 대한 과세를 제시했다. 그는 단기자본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이는 정당한 과세정책이라고 밝혔다.
<한겨레>는 지난 19일 방한 중이던 스티글리츠 교수와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초청해 서울 신라호텔 18층 비즈니스미팅룸에서 한국경제의 진로를 모색해보는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또한 노동과 자본간 대타협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협약과 재벌 투명성 제고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역설하며, 제대로 된 정부 규제와 개혁은 ‘친기업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술혁신은 중소기업에서 나온다고 지적하고, 한국경제의 새 모델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상품, 금융, 노동시장에 나타나는 정보의 비대칭성에 관한 연구로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그는 시장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경우 각 경제주체들 사이 정보의 불균형 때문에 자원배분의 왜곡이 나타나며, 시장은 그 자체로 최고의 결과를 낳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1997년부터 99년까지 세계은행 수석부총재로 재직했을 때는 금융·외환위기 국가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의 고금리 및 재정긴축 처방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경영진은 특혜 누리며 견제는 싫어해
기업이 아니라 자신에 좋은것만 얘기
장하준 교수=한국은 흥미로운 시기에 놓여 있다. 한국의 종전 경제 모델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지나치게 폄하됐고,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새로운 모델을 찾고 있다. 현 시기는 정치적으로 처음으로 중도 내지 중도 좌파 세력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독특한 상황이다. 새 모델이 절실하다. 물론 우리 나름대로 모델을 모색해야 하겠지만 선진국의 경험 역시 참고하고 싶다. 영미식과 유럽식 경제 모델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스티글리츠 교수=동아시아 금융위기 때 외부에서 제기했던 기존 경제 모델에 대한 비판은 지나친 것이었다. 그런 얘기를 한 어떤 사람들은 동아시아 경제가 실패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문제가 국제통화기금이나 미국 재무부에서 말한 것처럼 근본적으로 심각한 것이었다면 한국의 회복에는 12개월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당시 중요한 문제로 지적된 과다한 부채는 근본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하나의 실수이고, 개선돼야 하는 문제였을 뿐이다. 당시의 한국을 회사에 견주어 말한다면, 최고 재무담당자를 해고하면 될 정도의 상황이었지, 회사를 해체해야 할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영미식 자본주의를 영국과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 부적합하게 만드는 심각한 문제점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심각한 빈부 격차와, 의료보장제도 미비 등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의 영아 사망률은 자메이카보다 높다. 두번째로, 좀더 좁은 경제적인 맥락에서 90년대에 목도한 문제는, 무엇인가 명백하게 제도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이다. 사과 상자 안에 썩은 사과 몇 개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다 썩은 상태였다. 미국의 거의 모든 주요 회계법인과 투자은행, 대기업, 뉴욕 증시, 뮤추얼펀드들이 명백하게 비도덕적인 행위에 관련되어 있었다. 또 노동자를 어느날 불필요해졌다고 해고하고, 다음날 사람이 필요해지면 다시 고용한다고 하면 노동자는 당연히 기업에 충성심을 가질 수 없다. 이런 게 한국처럼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려는 나라의 경제에 좋은 제도는 아니라고 본다.
반면 스웨덴 같은 나라의 경제 모델은 상당히 잘 작동해 왔다. 스웨덴의 경우 미국보다 우월한 사회보장제도와 교육제도, 의료제도를 갖추면서 동시에 컴퓨터나 휴대 전화 분야도 발전해 있는 등 신경제 기반이 뛰어나다.
장=미국 경제 성공의 어두운 면을 많은 이들이 보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한국에서 미국식 경제 모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문제점을 간과한 채,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와 정치적 맥락을 갖고 있는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문제 아닌가 싶다.
스=맞다. 미국은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도 100여년 동안 흑인이 여전히 2등 시민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던 나라다. 다른 나라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이 수용한 수준의 빈부 격차는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다. 미국식 경제 제도가 일으키는 또다른 비용은 국민이 생계, 의료문제 등에서 느끼는 불안의 수준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이는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미국과 미국식 자본주의를 고찰할 때, 우리는 ‘한국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원하는가, 아니면 (한국에도 긍정적 효과를 낼) 미국 자본주의의 특정한 부분을 원하는가’를 물어봐야 한다. 벤처같은 것은 미국식 경제에서 고안된 모델인데 상당히 가치있는 것이고 한국에도 적용 가능한 모델로 보인다. 종업원주식소유제도(ESOP)도 긍정적인 모델이다. 이런 부분은 한국에 적용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다.
장=불평등과 불안이 성공적인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비용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한국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 한국은 상대적으로 소득 분배가 잘 된 나라에 속했지만 위기 이후 격차는 벌어졌다. 노동유연성이 높아져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노동자들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고, 비정규직 비율은 50%를 웃돌고 있다. 사회 갈등의 잠재 요인으로 부각되고 있고, 성장을 갉아먹을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한국에서 새로운 사회적 협약을 찾고 있다. 특히 이는 자본과 노동의 대타협에 기반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스=공감대를 찾기 위한 사회적 협약, 그 기반으로 노동자-자본가 대타협의 아이디어는 매우 가치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합의점을 도출해낸다는 것은, 평화적인 방식으로 파이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 정하는 것일텐데, 이는 파이 자체를 키운다는 전제 아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합의를 향해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이럴 때 모든 사람이 이익을 볼 수 있고, 그런 예를 보여주는 나라도 많다.
사회적 협약에서는 정부 역할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 우리는 ‘과도한 규제’를 얘기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규제’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정부가 ‘나쁜 놈’만은 아니다. 인터넷은 누가 만들었나 미국 정부다. 한국에서도 경제 발전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정부가 매우 중요하고 건설적인 역할을 했다. 세계가 변화하고 한국이 다른 발전 단계에 들어섬에 따라 이 역할은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역할이 최소화되는 방향이 아니라 정부가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타협을 모색하는 데 있어 중심이 돼야 한다.
개도국 자본자유화 비용만 크로 혜택없어
자본유입세 검토‥투기자본엔 세금 높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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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 오후 신라호텔 비즈니스 미팅룸에서 열린 대담에서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오른쪽)가 장하준 교수에게 자신의 견해를 말하고 있다.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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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부의 역할에 대한 편견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한국경제에서 재벌의 역할에 대해서 말해보자. 재벌 역할을 두고 여런 논쟁이 있어왔다. 재벌을 무능력한 공룡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재벌 자신들은 경제를 견인할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이 가운데쯤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스=재벌 문제는 일단 경쟁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재벌은 ‘망하기에는 너무 큰’ 크기를 갖고 있다. 정경유착과 이에 따른 부정부패도 문제다. 기업지배구조에서는 회사의 경영진이 ‘누구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두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미국식 자본주의에서는 회사는 주주의 이익에만 신경쓴다. 반면 유럽식 자본주의는 주주뿐 아니라 지역사회와 노동자도 신경쓴다. 나는 유럽의 견해를 지지한다. 미국식 주주자본주의가 우월하다는 경제이론적 근거나 실증적 증거는 없다.
경영자의 결정을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미국 제도는 이런 면에서 결함이 있다. 주주들은 경영자를 견제할 수 있는 주요 세력이지만 일반적으로 그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정보가 없기에 주주총회에서 경영진에 강력하게 제제를 가하기 어렵다. 은행도 기업의 활동을 제대로 견제할 수 있으나, 90년대에 미국 은행들은 그 기능을 상실했다. 또 하나의 견제 매커니즘은 기업인수·합병인데, 나는 내 저서에서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핵심적인 문제는 기업들이 지배구조를 개선하게 하는 유도장치,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 안에도 그런 장치가 존재하지만, 항상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정부가 시장 안에서 기업지배구조 개선 매커니즘을 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에게 이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경제를 더욱 발전하게 만들 수 있다. 이를 누가 저지하는지 자명하다. 경영진이다. 경영진은 많은 특혜를 누리고 있기에 견제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반기업적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된 정부의 규제가 수반하는 개혁은 친기업적이라고 생각한다. 기업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은 주로 경영진인데, 그들은 기업에 좋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좋은 것을 주로 이야기한다.
빌게이츠나 록펠러는 반독점이 반기업적이라고 말한다. 반면 나는 더 많은 경쟁이 있었다면 미국 소프트웨어 산업이 더 잘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에 끼워판 익스플로러와 윈도 미디어 플레이어는 넷스케이프와 리얼미디어를 고사시켰다. 이런 독점은 기술혁신을 가로막는다.
재벌이 수십년간 한국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재벌은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고, 이제 중요한 문제는 경제가 균형이 잡혀 있느냐이다.
장= 그렇다면 한국경제가 새 시대에 맞는 균형을 이루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스= 한국 경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보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나는 하이테크 분야와 서비스 분야로의 이동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서비스 분야는 중소기업이 지배적인 분야이고, 이는 결국 중소기업 지원 정책, 중소기업 자본 확보 등의 문제와 연결된다.
하이테크 분야의 연구개발(R&D)에는 대기업 역할이 필요하다. 그러나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많은 중요한 기술혁신은 중소기업에서 이뤄진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신약은 중소기업에서 고안돼 대기업에서 시험된다. 대기업에서는 혁신이나 발명이 나오기 어렵다. 대기업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소기업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제대로 된 균형을 찾는 게 중요하다.
장=오늘날 한국에서는 국내자본에 대한 역차별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국내 기업은 높은 수준의 투명성을 요구받고 있지만, 외국기업은 택스헤이븐(조세피난처) 등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거나 투명성이 전혀 확보되지 않은 가운데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더 일반적으론 개방된 자본시장에서 외환위기를 피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외화를 보유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현재 한국은 1400억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연 1%에 불과한 이자만 받으며 썩혀두고 있다.
자본시장 개방에 따른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 정책의 자율성이 침해될 정도로 ‘외국인 투자자’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상황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외국 투자자들이 싫어할지 모른다는 강박 관념은 정부 당국자들을 매우 보수적으로 만들고 있고, 이들이 고안한 거시경제정책은 불안과 불평등, 노동시장 유연화 등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런 전반적인 추세를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할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스= 외환 보유에 드는 비용은 막대하다. 어떤 나라의 경우 국내총생산의 3%에 이른다. 단순히 외환 시장 방어를 위해 이렇게 많은 돈을 쓰고 있다. 외환보유고 문제는 정책 자율성을 상실하게 한다는 것 이상의 문제다. 본질적으로 자본시장에서 하루하루의 이익을 좆는 자본은 장기성장을 신경써야 하는 한국과 개발도상국가의 경제와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런 나라에서는 자본시장 자유화 비용은 매우 크고, 혜택은 거의 없다. 세계은행도 이제는 개발도상국에서는 자본시장 자유화가 적절치 않은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한국 처지에서는 자본시장 자유화와 관련해서 취할 수 있는 조처에 제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몇 가지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자본시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칠레와 유사한 ‘자본유입세’가 고려될 수 있다. (칠레는 1990년대 초반 외국자본들에 유입 자금의 30%를 1년간 기탁하도록 하고 1년이 지나서 나가면 돌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이를 포기하게 하는 가변예치의무제를 도입했다.) 강한 은행 규제를 통해 외국환 거래를 제한하고, 투기성 대출을 규제하는 방안도 있다. 왜냐하면 많은 투기 행위는 국내에서 돈을 빌려 환전한 후 이뤄지기 때문이다. 많은 국가들이 이런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약간 더 논쟁적이고 모호하기는 하지만 자금성격을 감안한 자본이익 과세를 들 수 있다. 단기 자본이익 취득에는 높은 세금을, 장기 자본이익 취득에는 낮은 세금을 물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증시에서 어떤 자본이 한달간 치고 빠졌다면 높은 세금을 물지만, 5년 동안 불렸다면 낮은 세금을 내게 하는 식이다. 투기 행위는 많이 줄어들 것이다. 이는 정당한 과세정책이고 이미 많은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지만 미국이 택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물론 단순히 1년, 5년식으로 구분짓는 것보다 더 정교히 고안돼야 한다.
장=그런 경우 자본유입이 멈추거나 빠질 가능성이 없는가
스=일단 칠레의 경우를 보면 과세가 장기자본 유입에는 영향 없고, 약간 증가시키는 효과까지 있었다. 단기에서 장기 위주로 구성이 바뀐 것이다. 두번째로 다시 저축률을 높이고 믿을만한 국내 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는 긍정적인 효과가 생긴다. 단기자본의 속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주일 내에 빠질지도 모르는 외국 자본에 기대 공장을 지을 수는 없다. 단기자본 갖고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쓸모가 없다. 상당히 공격적인 발언이고 월가에서 말하는 것과는 반대지만 현실이 그렇다.
장= 좋은 말씀 감사했다. 우리나라가 새 길을 모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정리= 서수민 기자 wikk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