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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 걸을 위하여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뚱녀나 추녀를 위한 그 어떤 변호도 그저 위선이나 공허한 짓

▣ 김경/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한때 할리우드에서는 ‘팻 수트’라는 아주 흉물스럽고 동시에 사치스러우며 아주 가증스럽기까지 한 의상이 이슈가 되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 기네스 팰트로가 팻 수트라는 가짜 살덩어리 옷을 입고 엄청나게 뚱뚱한 여자를 연기한 직후였다. 기네스 팰트로는 한 토크쇼에서 이렇게 말했다. “팻 수트를 입고 공공 장소에 들어갔더니 모든 남자들이 저를 피하더군요. 뚱뚱한 게 어떤 건지 아주 리얼하게 느꼈어요.” 그리고 그녀는 잔인하게도 덧붙였다. “예쁜 여자들은 모두 그런 경험을 해봐야 해요.”

나는 그때 “예쁜 것들은 왜 저 모양이냐?”이냐고 엄청 화를 냈더랬다. 마치 기네스 팰트로가 정상인들의 무슨 장애 체험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뚱보 체험인가? ‘뚱보가 되면 인간 대접 못 받는다. 그러니까 절대로 방심하지 말자.’ 뭐 이런 거 아닌가?


감독은 더 싫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의 원제는 ‘Shallow Hal’(속물적인 남자 할)인데, 내가 보기엔 패럴리 감독은 예쁘고 날씬한 여자만 좋아하는 남자들을 풍자하는 척하면서(혹은 뚱뚱한 여자들의 내면을 높이 쳐주는 척하면서) 실은 살을 뺀 여자들에게 축하를 보내고 있었다. 줄리아 로버츠가 배가 세겹으로 겹치는 뚱보로 나왔던 <아메리칸 스윗 하트>도 마찬가지였다. 두 영화는 입을 모아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뚱뚱한 얼간이들을 봐. 그리고 다시 슬림해진 그녀를 봐. 그녀가 제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기쁘지 않니?”

그러고 보니 성공한 비만 여배우를 별로 본 적이 없다. 뚱뚱한 남자배우들이 나름대로 자기만의 캐리어를 확보하는 동안(오손 웰스에서 존 굿맨에 이르기까지), 수십년간 땅딸한 여배우들은 기껏해야 바닷가나 고등학교 카페테리아의 배경을 채우는 엑스트라로 등장했다. 사이코로 등장했던 캐시 베이츠가 가장 성공한 경우다. 그러나 지금은 뚱뚱한 여배우들의 단골 배역조차 이 팻 수트 덕분에 날씬한 여배우들의 몫이 되었다.

그러더니 요즘은 팻 수트를 입지 않은 진짜 추녀 캐릭터들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브릿지 존스 다이어리>의 르네 젤뤼거나 <몬스터>의 샤를리즈 테론처럼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고 영화 홍보도 하기 위해 일부러 엄청나게 살을 찌우는 경우 말이다. 하지만 둘 다 예전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가망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게다가 샤를리즈 테론처럼 예전의 완벽한 미인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면 엄청난 찬사를 받지만, 르네 젤뤼거처럼 아직 살이 덜 빠진 상태로 남아 있으면 그때부터는 결코 좋은 소리 못 듣다(한 예로 미국판 <바자>는 르네 젤뤼거 커버 사진을 찍어놓고도 살이 덜 빠져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약속대로 커버로 내보내지 않아 소송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어쨌든 팻 수트를 입거나 나중에 다시 살을 뺀 여배우들 이야기는 우리에게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본 카트린 브레야 감독의 <팻 걸>이라는 영화는 좀 달랐다. 예전에도 뚱했고 지금도 뚱뚱한 어린 소녀가 주인공인데 끔찍하고 추악한 현실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생존자 역할을 영민하게 연기한다. 하지만 좀더 솔직히 말하면 그런 영화 또한 나 같은 여자로 하여금 결국 다이어트 결심을 하게 만드니, 뚱녀나 추녀를 위한 그 어떤 변호도 그저 위선이나 공허한 짓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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