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말할까, 미심쩍을 땐 진실을 말하라. 마크 트웨인의 충고다. 그래서다. 곧장 결론으로 가자. 대한민국은 오늘 ‘조용한 혁명’을 겪고 있다.
보라. <한겨레>가 창간 기념일을 맞아 조사한 여론을. ‘앞으로 우리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물었다.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44.8%)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39.2%)를 앞섰다. ‘북유럽식’이란 꼬리가 붙었지만 어느새 사회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 내렸음을 뜻한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만 민주주의로 ‘세뇌’해 온 수구언론의 고삐에서 민중이 벗어난 것은, 조용한 혁명이다. ‘앞으로 우리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정당’에 대한 응답도 그렇다. 44.3%가 진보정당을 꼽았다.‘중도정당’과 ‘보수정당’을 합친 비율보다 높다.
그랬다. 김대중 정권을 좌파로, 노무현 정권을 급진좌파로 언구럭을 부린 수구정당과 수구언론의 두꺼운 얼음 밑으로 역사의 강물은 쉼 없이 흐르고 있었다. 반세기동안 언 그 얼음장이 마침내 퍼석얼음으로 깨져나갔다. 촛불의 힘, 체온의 힘이다. 섭씨 37.5°의 미열이 손과 손을 타고 수 억°로 끓어올랐다. 더러는 감상이라고 나무랄 터이다. 사회민주주의는 개량주의라고 딱지 붙일 수도 있다.
딴은 옳은 말이다. 하지만 겸손하자. 사상의 순결성은 낡은 관념이다. 목숨을 끊는 노동자·농민·빈민·청년실업자에게, ‘순결한 관념’으로 다가가기는 방안풍수 되기 십상이다. ‘탄핵 정국’에서 “민주주의를 찾으려는 민중의 촛불 아래 새삼 스웨덴을, 교육과 병원이 무료이고 무덤까지 복지를 이룬 민주주의를 새기자”고 제안(‘촛불과 불길’ 3월16일치 아침햇발)했던 까닭이다. 진보세력에 더넘스레 ‘덧셈’을 권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생각’이 투표 ‘행위’로 이어지는 데는 여러 변수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실제로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꿈꾸고 진보정당에 기대를 걸면서도 민중은 미쁜 정당이 없다. 현실에 대한 착각도 없다. ‘현재 정치·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정당’에는 열에 여섯이 답했다. “없다.” 왜일까. 진보정당 가운데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들어갔는데도 왜 그럴까. 민주노동당은 물론이고 사회당이 두루 성찰해볼 문제 아닐까. 민중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린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과연 한국의 진보정당보다 개량주의인가. 기자는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비단 진보정당 만이 아니다. 정당 선호도에서 1위가 된 열린우리당에게도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여론조사는 진지한 사색을 요구한다. 17대 국회의 과반 의석을 지니고 새 출범한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스웨덴을 거론하던 초선의원 노무현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은 누군가의 지적처럼 착각일까.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이 총선을 앞뒤로 공언하고 나선 언론개혁에도 스웨덴은 큰 시사점을 준다. 여론의 다양성을 위해 신문공동배달제를 오래 전부터 시행하고, 시장점유율 1위가 아닌 모든 신문에 국고 보조금을 준다. 물론, 지원금을 받으려면 편집권이 독립돼 있어야 한다. 그 튼실한 공론장이 세계 최상의 복지를 이룬 밑절미였다. 인구의 절대다수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교육 마당도 다채롭다.
그 결과다. 수도 스톡홀름에서 노동자교육협회의 고위간부를 만났을 때다. 진지하게 물었다. 사실을 왜곡하고 색깔공세를 펴는 신문에 스웨덴 시민은 어떤 운동으로 맞서는가 답은 전혀 ‘기대 밖’이었다. 그가 물음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다.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되물었다. 그런 신문을 독자들이 본단 말인가
민주노동당의 인기 정치인으로 떠오른 노회찬 당선자가 ‘조선일보 30년 독자’임을 밝히며 ‘품질 좋은 신문’이라고 추어올린 사실이 숫제 허전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노 대통령을 반대한 보수신문’ 비난에 급급한 여권 일각의 모습도 언론개혁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하여, 거듭 명토박아 둔다. 언론개혁은 특정 정당을 위해서가 아니다. 겨우 형식만 갖춘 이 땅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성숙하는 데 언론개혁의 참뜻이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언론개혁은 또 하나의 ‘조용한 혁명’이다.
손석춘 논설위원s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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