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텁지근한 베이징의 초여름이었지요. 당신을 만난 지도 어느덧 2년이 가까워집니다. 18살 때 주린 배를 움켜쥐고 북한을 탈출했다던 당신도 23살의 청년이 됐겠군요. 그토록 소망하던 한국행을 이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날 당신의 깡마른 몸과 분노에 찬 눈을 보면서 북한 정권을 결코 용서할 수는 없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키가 채 160cm가 안 되는, 20대 청년은 온몸으로 당신이 살아온 체제를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실상을 물을 필요도, 확인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저 당신의 몸이 그 모든 고통을 증거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고도 잊고 살았습니다.
얼마 전 봄날의 안온한 저녁에 채널을 돌리다 KBS <수요기획>의 ‘농사짓는 도시, 아바나 이야기’를 보게 됐습니다. 먼 나라 이야기를 보면서 내내 북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동구사회주의가 몰락한 90년대, 당신의 조국과 마찬가지로 쿠바에도 기근이 닥쳤나봅니다. 사탕수수를 팔아서 옥수수를 사던 무역이 끊겼겠지요. 도시인 아바나에 기근이 특히 심했다고 합니다. 한때 아바나에만 영양실조로 인한 실명자가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그래도 쿠바 사회주의는 인민의 굶주림을 수수방관하지는 않았나봅니다. 시당국이 앞장서서 아스팔트 바닥에 텃밭을 일구고, 무너진 공장에서 닭들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민에게 곡식을 줄 수 없으니 씨앗을 나눠주고, 고기를 배급할 수 없으니 어린 가축을 공급했습니다. 인민들은 그 씨앗과 가축을 키워서 허기를 채웠습니다. 자연스레 아바나 곳곳에 도시 농가가 생겼고, 인민들은 굶어 죽지 않아도 됐습니다. 인민의 자발성은 전대미문의 도시 생태농업의 성공까지 일구어냈다고 합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요? 맞습니다. 아바나의 도시농업은 궁여지책이었지요. 궁여지책치고는 참 아름다운 성공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름다운 성공 앞에서 엉뚱하게도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북녘의 지도자들은 왜 저런 궁여지책을 강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유기농산물을 먹어 통통하게 살이 오른 쿠바의 아이들을 보면서, 쌀 한줌이 없어 굶어 죽었다던 당신의 동생이 떠올라 화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무려 300만명이라고 합니다. 90년대 후반 북한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의 숫자입니다. 그런데도 북녘의 정권은 핵무기 만드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만약 쿠바의 도시 농부 헤수스가 북한에 살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당신이 예상하듯, 허가받지 않은 뙈기밭을 일구었다고 인민재판에 회부됐을 겁니다. 그런데도 북에서는 아직도 흉흉한 이야기만 들려옵니다. 밀실농업인 주체농법의 수확량이 낮은데도, 장군님이 돌아가셔서 주체농법을 바꿀 수 없다는 ‘교조’가 판친다는 소문 말입니다. 오랫동안 탈북자들을 도와온 스님은 굶주리면 훔쳐 먹을 자유라도 있어야 하는데, 북에는 그런 자유조차 없다고 한탄하십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물론 핑계는 있습니다. 미제국주의의 경제봉쇄.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미제의 경제봉쇄가 쿠바라고 피해갔겠습니까? 모범은 전파돼야 한다고 주장해온 북녘의 사회주의 정권은 사회주의 형제국의 모범은 왜 배우지 못했을까요. 그것도 미제의 탓입니까?
그 다음주 수요일 밤에도 당신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바그다드 함락 1년, 이라크는 지금’을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쿠바의 아바나에서 북녘의 어제를 보았다면,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는 북녘의 내일을 보는 것 같아 섬뜩했습니다. 미군에 의한 ‘해방’ 1주년을 맞은 이라크의 곳곳에는 평화 대신 폭력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케르발라의 시아파도, 바그다드의 수니파도, 키르쿠크의 쿠르드족도, 이라크인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차도르를 두른 여인은 남편의 죽음에 오열하고 있었고, 실업자가 된 청년은 당구로 소일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해방’ 이라크의 오늘이었습니다. 강철씨가 동경하는 미국이 가져온 평화의 실체였습니다.
그 즈음, 미국의 상하원에는 ‘북한인권법안’이 상정됐습니다. 그 법안은 ‘자유’ 대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을 노리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명분도 ‘인권’이었습니다. 미국은 90년대 ‘이라크 해방법안’을 만들어 침공의 명분을 차곡차곡 쌓아왔지요. 이런 현실이다보니, 이라크의 현실이 자꾸 북녘의 미래와 겹쳐졌습니다. 오랜 굶주림 뒤에 찾아오는 자유가, 테러당할 자유라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저는 무기력하기만 합니다. 미제의 침략에 저항하지도, 북한 정권의 폭정에 항의하지도 못한 채 그저 속수무책입니다. 어디에도 동지는 없습니다. 세상은 미제에 모든 탓을 돌리는 사람들과 미국이 해방군이라고 믿는 사람들로 두 동강나 있습니다. 평화의 이름으로 미국에 반대하고, 인권의 이름으로 북한 정권에 항의하는 동지들은 찾기 힘듭니다. 그래도 살아서 함께 한반도의 봄을 맞자고 허튼 약속밖에는 못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건강하십시오.
당선사례. <씨네21> 독자들의 성원 덕분에 우리 노회찬 오빠가 JP 선생님을 물리치고, 금배지를 달게 됐습니다. 저도 비로소 선거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갖게 됐습니다. ‘노빠’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