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적 기운이 묻어나는 로맨틱코미디, <그녀를 믿지 마세요>
Key <동감>의 청순가련한 김하늘을 믿지 마세요, 모델 출신의 세련된 강동원도 믿지 마세요.

최양일 감독의 <헤이세이 무책임일가: 동경디럭스>를 보면 일가족 사기단이 나온다. “속기보다는 속여라”는 가훈으로 똘똘 뭉친 이 가족은 천부적인 연기력과 비상한 잔머리, 단체라는 장점을 무기로 기발한 사기를 치고 다닌다. 그러나 이 가족의 엽기적인 사기행각이 밉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이들이 주류사회로부터 소외받은 마이너리티의 비애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식사시간, “행복은 우리 것이 아냐, 저 강 너머 사람들의 것이야”라며 쓸쓸히 젓가락질을 하던 둘째아들 미노루의 대사는 그 왁자지껄한 소동극을 소요시키는 애잔한 울림을 준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도 사기꾼 여자가 등장한다. 가녀린 몸매와 순진한 얼굴로 사람 속이기를 밥 먹듯이 하고 다니는 이 여자, 주영주(김하늘)는 “슬픈 듯 슬픔을 억제하는” 연기력을 동원해 형무소 안에서도 사기를 친다. 결국 가석방 허가를 받아낸 여자는 같은 방 죄수들을 앉혀놓고 “이 불신의 시대에 사람을 믿게 한다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냐”며 사기도 고도의 두뇌회전을 요하는 엄연한 기술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영주가 필사적으로 형무소를 빠져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유일한 가족인 언니가 결혼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언니가 교도소나 들락날락거리는 자신을 부끄러워 하건 말건 간에.

그러나 영주가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공희철(강동원)의 반지를 손에 넣게 되면서 일은 급속도로 꼬여간다. 반지를 돌려주러간 길, 택시 안에서 우연히 던진 말 한마디에 영주는 졸지에 공희철의 약혼녀가 되고 결국 옆집 숟가락도 셀 만큼 작은 동네 용강마을에 불시착하게 된다. “가석방에 혼빙(혼인빙자)이라니, 피박에 광박”이라고 투덜대는 영주의 거짓말은 점점 더 큰 거짓말로 불어나고, 생전 처음 보는 여자의 애아빠가 되어버린 공희철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발악을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의 불호령과 마을 사람들의 실망스런 눈초리뿐이다.

이 영화는 정석으로 통용되었던 것들을 조금씩 뒤틀면서 웃음을 유발시키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여성 관객에게 접근한다. 번지르르한 사기꾼 제비가 아니라 순진무구한 얼굴로 위장한 사기꾼 처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남자주인공은 ‘밀감아가씨’가 아니라 ‘고추총각’ 선발대회에 나가서 자신의 장기를 뽐내야 하는 처지에 이른다. 또한 남자들 사이의 흔한 우정 대신 여자들간의 두터운 연대나 믿음, 쿨한 의리를 전면에 내세운다.

영화 전체를 꿰어내는 감독의 솜씨는 데뷔작답지 않게 비교적 촘촘하고 안정적이다. 과장을 누른 채 천천히 쌓아올린 캐릭터의 견고함은 결국 사기녀와 피해남성 사이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로맨스에 이르면 그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따뜻한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또한 충북 음성 고추축제에 가서 직접 따온 현장컷과 연출컷을 섞어서 편집했다는 축제장면은 일용직 엑스트라가 만들어낼 수 없는 북적거리는 흥분을 전달한다.



<엽기적인 그녀> 이후 전지현이 그랬던 것처럼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거친 김하늘의 연기는 대부분 영화의 호흡을 쥐고 갈 만큼 파워풀하다. <바이 준> <동감>에서의 청순가련한 모습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가히 사기수준이라 할 만하다. 이는 단순히 연기력의 발전이라는 거창한 말보다는 자신의 어떤 행동이나 말투에 관객이 열성적으로 반응하는지를 체득한 배우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함의 결과로 보인다.

물론 “남은 속여도 자신은 속여선 안 되는 법이야” 같은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이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초반의 전복적인 기운을 배반하고 당연한 수순을 밟아나가는 후반부의 호흡이 처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 알고 보는데 니 사기는 진실 같은 게 느껴져, 진실!”이라던 한 형무소 친구의 농담처럼, 이 클래식한 로맨틱코미디 역시 다 알고 보는데 진실 같은 게 느껴진다.

백은하/ 자유기고가 lucielife@naver.com

 

from http://www.cine21.co.kr/kisa/sec-003100100/2004/02/0402171558550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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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ce 2004-02-25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본 영화들은 Sisterhood 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도 그렇고 Somethings' gotta give 도 그렇고. 모두 LoveLove 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부럽지만.--;)
그래도 Sisterhood 는 꽉 잡고 있으니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