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현대 소설 선집 1
게오르기 쯔베또프 외 지음, 최선 외 옮김 / 열린책들 / 1997년 4월
품절


1953년 여름, 먼지 구덩이의 뜨거운 사막에서 나는 무턱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나를 맞아줄 곳도 없는 러시아로의 귀환을 나는 근 10년간 지체해 왔던 것이다. 나는 그리 뜨겁지도 않고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숲이 있는 중부 지방으로 가고 싶었다. 러시아의 가장 깊은 곳이랄 수 있는 곳이 아직도 어딘가에 있다면 그런 곳으로 들어가 묻히고 싶었던 것이다.-91쪽

지명은 거짓이 없는 법이다. 골짜기와 언덕으로 둘러싸인 고원 위에 위치한 그리고 숲과 연못과 둑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브이쏘꼬예 뽈레는 생사를 초월한 그런 장소 같았다. 숲속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나는, 매일같이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숲속에 남아 라디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전한 침묵의 세상에서 지붕 위에 바삭거리는 나뭇가지 소리만을 밤마다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92쪽

고양이는 나이가 꽤 되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절름발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고양이를 그저 동정심에서 주워다 기른 것이다. 고양이는 비록 네 발로 걸어다니긴 했지만 아픈 한쪽 다리를 아끼느라고 심하게 다리를 절었다. 뻬치까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릴 때 바닥에 닿는 소리가 다른 여느 고양이들처럼 사뿐히 딛는 것이 아니라 세 발이 동시에 착지하면서 내는 쿵 소리 때문에 나는 이 소리에 익숙해질 때까지 한동안 깜짝 놀라곤 했다. 결국 아픈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나머지 세 다리를 한꺼번에 혹사시키는 셈이었다.-98쪽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 경험을 통해 매일매일 살아가는 생존의 의미가 먹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저 이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마뜨료나의 둥근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미소가 내겐 더 소중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미소를 사진에 담아 보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언제나 실패로 끝나곤 했다. 싸늘한 렌즈를 들이대기만 하면 그녀의 표정은 부자연스러워지거나 아니면 대단히 근엄해졌다.-102쪽

그러나 그녀의 찌푸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 확실한 방법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동이었다. 고통스러울 때 그녀는 손에 삽을 쥐고 감자를 캐러 가거나 자루를 겨드랑이에 끼고 이탄을 주우러 가기도 하고 나무껍질로 만든 광주리를 들고 멀리 떨어진 숲으로 딸기를 따러 가기도 한다. 그리고 관청의 여러 책상들 앞이 아닌 울창한 숲을 향해 몸을 굽히며 가득 실은 짐에 등이 굽어져 돌아오는 마뜨료나는 이미 맑게 개인 만족스러운 표정이어서 평소의 그 선한 미소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104쪽

마을 진료소에서 의사의 왕진을 청한다는 것은 딸리노보에서는 어색한 일이었고 이웃 사람들 보기에도 민망한 일로서 그들은 이런 경우 "마님 나셨네?"라고 말하며 비아냥거린다. 언젠가 한번은 의사를 부른 적이 있었는데 아주 표독스러운 여의사는 마뜨료나에게 좀 나아지거든 직접 진료소를 찾아오라고 지시했었다. -110쪽

한겨울의 어느 날 마뜨료나는 이 외투의 안감에 자신의 장례 비용으로 2백 루블을 집어 넣고 꿰맨 후 기쁜 듯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사 조금 마음이 놓이는군요, 이그나찌치."-112쪽

여기서 내가 알게 된 것은 고인에게 올리는 곡은 단순한 곡이 아니라 뭔가 계산된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뜨료나의 세 동생들은 재빨리 와서 안채와 산양과 뻬치까를 점유한 뒤 옷장을 자물쇠로 잠그고 외투 안감에서 2백 루블의 장례 비용을 꺼냈다. 그리고는 문상객들에게 마뜨료나의 유족은 자기들뿐이라고 말하고는 관에 매달려 우는 것이었다.
...
결국 동생들의 호곡은 남편측 친척들에 대한 비난이었던 것이다(그것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네놈들이 별채를 가져 갔으니 우린 안채를 줄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134쪽

"세상엔 두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태어날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과 죽을 때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야."-135쪽

딸리노보 사람들과 사귀면서 나는 이 마을에 파제이 같은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물을 의미하는 단어인 도브로*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도브로를 잃는다는 것이 사람들에겐 창피하고도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다.

* 선행과 재물이라는 이중의 뜻을 지닌 러시아 어.-137-138쪽

자신의 남편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여인, 여섯의 자식들을 자기 손으로 묻은 여인,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을 지닌 여인, 여동생들과 시누이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 여인, 남을 위해 무료로 봉사하는 바보 같은 여인, 그 여인은 죽을 때 아무 재산도 모아 두질 않았다. 남은 것이라고는 지저분한 흰 산양 한 마리와 절름발이 고양이 그리고는 무화과나무뿐...
우리 모두는 그 여인의 바로 옆에서 살았으면서도 그녀가 가장 올바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속담에서도 이야기하듯이 올바른 사람이 없으면 마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시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전체도.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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