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식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백설탕은, 바로 당 태종이 파견한 사절단 일행 중에 어느 전문가가 마가다국에서 제조법을 배워온 것입니다. 그 이전에 중국은 설탕을 몰랐고 그저 맥아당을 감미료로 써왔습니다. 그런데 마가다국 사람이 당나라 조정에서 온 사람에서 고구마를 원료로 한 하얗고, 곱고, 깔끔한 순백색 설탕의 제조법을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362쪽
현장스님이 미륵불에게 기원을 드리고 있을 때, 그 사찰에는 달마란 이름의 오랑캐 승려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달마'란 이름도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인데, 중국어로 직역하면 '진리'란 뜻입니다. 오랑캐 승려, 이른바 '호승胡僧'은 사실 서역 일대에서 중국에 들어온 승려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호'자가 붙은 물건은 대부분 외래품을 뜻합니다. 이를테면 홍당무를 뜻하는 호나복, 오이를 뜻하는 호과, 그리고 호금 따위가 그것입니다. 한족 사람들도 아주 오래전에는 일본인과 한국인처럼 두 다리를 틀고 자리를 깔아놓은 바닥에 앉아서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접이식 의자인 호상이 등장하면서부터 한족 사람들은 비로소 의자에 앉을 때처럼 두 다리를 세워 앉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경극을 포함해 연극에서 사용하는 호금 자체도 외래악기입니다. 그러니까 경극도 중국과 외래문화 교류의 결정체이자 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86-87쪽
쉬엽성의 유적은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토크막 시 경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 내가 어째서 번거로움을 거리끼지 않고 여러분에게 그 머나먼 곳에 있는 도시를 소개하고 있을까요? 왜냐하면 그곳은 당나라 때의 위대한 시인 이백의 고향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 쉬엽성 자체가 그 당시 수많은 민족이 뒤섞여 살던 지역으로서, 이백의 혈통에 한족의 피가 흐르고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순수한 한족 사람이라고만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9쪽
중국 불교 신도에게 있어서 미륵과 관음 두 분은 가장 중요한 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경전의 논리에 따르면, 미륵은 석가모니의 제자이지만, 석가모니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적멸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도솔천이라는 아주 높은 하늘에 올라 천인들을 교화하다가, 4000년이 지난 후 석가모니의 입멸에 뒤이어 인간 세상에 강생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4000년은 천상의 시간으로, 인간 세상에서는 56억 7000만 년과 맞먹습니다. -599쪽
미륵은 산스크리트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라고 부릅니다. 팔리어로는 '메테야Metteya'입니다. 얼핏 들어서는 미륵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들립니다. 현장스님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 없이 잘못된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미륵'의 번역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마땅히 '메이달리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하지만 '관자재보살'이 관세음보살에 눌린 것처럼, 사람들은 모두 현장스님과 같은 정상에 오른 고승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여전히 미륵이라고 불렀습니다. -607쪽
기원 전 1000년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유프라테스-티그리스 두 하천 유역과 이집트까지 포함되는 광대한 지역에서 일종의 미래 구세주 신앙이 유행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아가 바로 이런 구세주 신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신앙은 구약성경에 이미 나와 있었고, 그것은 자유와 행복에 대한 피압박 민족의 거대한 갈망을 반영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미륵신앙이 그와 같은 전 세계적인 구세주 신앙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으며, 피차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도 학술계에서 이미 확인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도의 미륵신앙이 바로 구세주 신앙을 조성한 파트인 것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미륵이 미래불이요, 미래의 구세주인 까닭은 인도에 뿌리를 두었고 또 보다 광범위한 세계 전체 또는 고대 세계에 뿌리를 두었으며, 당시 보편적으로 유행하던 메시아 신앙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미루어, 미륵불은 결코 단순하게 불교 속의 부처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03-6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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