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구판절판


하지만 집에 돌아와 다시 앉혔더니 고분고분히 앉는 것이었다. 조금 달려보니 소리를 지르고 연신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로 와 부딪히는 바람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내친 김에 멀리까지, 그러니까 우리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논둑길까지 달렸다. 정말 아름다운 여름이었다. 햇살을 받은 이파리들은 초록색 그늘을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웠고 바람에 따라 그 그늘이 조금씩 자리를 바꿨다. 금방이라도 초록색 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나무 그늘 아래를 달리면서 나는 "열무와 나의 두번째 여름이다"라고 혼자 말해봤다. 첫번째 여름을 열무는 누워서 보냈고 두번째 여름에는 아빠와 자전거를 타고 초록색 그늘 아래를 달렸다. 세번째 여름은 또 어떨 것인가? 지금 내가 가진 기대 중 가장 큰 기대는 그런 모습이었다.-25-26쪽

도대체 '세상은 사흘 / 보지 못한 동안에 / 벚꽃이라네' 같은 시를 읽지 않고 어떻게 봄을 기다린다고 할 수 있을까?-35쪽

"오후에는 집에 있었다. 3시 20분쯤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찾아왔다. 그녀는 조선인민협회 명의의 서한을 내밀면서 조선독립을 위해 자금을 대달라고 요구했다. 난 나 자신과 내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만큼 돈을 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독립운동가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에 잠입하지 못하면서, 내게는 생명을 담보로 해서 자기들에게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게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한을 챙겨서 가버렸다." (윤치호의 일기, 1919년 9월 12일)-52쪽

그러다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에는 그만 택시 운전사가 되고 싶었다. 내 적성에서 크게 벗어나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지도를 힐끔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그 즉시 내가 선 길의 속성을 파악해내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64쪽

도대체 해금강까지 와서 5달러짜리 맥심커피를 마셔야만 하는 인간이란 소설가뿐인 것이다.-76쪽

그 아이를 화장하고 돌아오던 날 밤, 그 아이가 나를 찾아왔다. 꿈이었으리라. 어쩌면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그 아이는 아무런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이곳에 머물지 말고 떠나가라고 소리쳤다. 부모든, 나든, 그 누구든 절대로 원망해서는 안된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그 아이는 아무런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뭐라고 말하고 싶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다시 소리쳤다. 어서 떠나, 뒤돌아보지 말고 떠나버려.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떠나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아이는 그렇게 떠나버렸다. 그리고 내 마음에는 말라죽은 생선 껍질 같은 죄책감이 수북하게 쌓였다. 갑자기 무서워져서 다시 잠들지 못했다. -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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