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청거리는 오후 박완서 소설전집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1993년 5월
품절


그 시절, 아내는 귀여웠었고 그는 행복했었다. 그렇지만 귀여운 여자는 얼마나 빨리 변하고 행복한 시간은 얼마나 빠르게 가버리는 것일까?-59쪽

"아빠는 어쩌면 그렇게 늙지도 않고 순진해. 아빠가 너무 순진해서 나는 도저히 내 기분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아무리 매력 없는 남자도 자가용 타고 데이트하면 저절로 매력이 있어진다는 이치를 어떻게 아빠한테 납득시키겠어? 그까짓 자동차가 좋아서가 아냐. 자가용 타고 앉아 걷는 사람, 버스 타는 사람을 깔보는 생활이 좋은 거지. 누구나 다 자가용 갖게 되면 그땐 자가용 비행길 타고 자동차 탄 사람을 깔보게 해주는 남자가 매력이 있어지겠지. 아빠, 아빠 딸이 똑똑하다고 생각 안 해?"-67쪽

"아빠도 참. 순진하게 그것 때문에 자책까지 하시려고 하면 난 정말 싫어. 나만 그래야 그게 아빠 닷, 엄마 탓이 되는 거지, 나만 그런 게 아냐. 그게 요새 우리 젊은이들의 공통의 헛점이니까 굳이 탓을 하자면 이 시대 탓이라고나 할까. 가령 셰익스피어 하면 우리는 그가 어느 나라에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고, 남긴 작품수에다 작품 이름과 개요까지 유창하게 나불거릴 순 있지만, 단 한 편도 실제로 작품을 읽고 감동이건 실망이건 하는 과정을 거치지는 않았거든. 이게 바로 헛똑똑이들의 본질이야. '사랑'하면, 사랑에 대한 동서고금의 명언 금언에다 유행가 가사까지 줄줄이 엮어댈 줄만 알았지 한 번도 사랑으로 피가 더워진 적이 없는 게 우리 헛똑똑이들의 참모습일지도 몰라. 이런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 그 사람의 내면의 진실을 통해 사귀려 들지 않고,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통해 사귀려 드는 건 너무도 당연해. 그러니까 아빠, 우리가 가장 우리답게 살도록 내버려둬줘. 자기에게 맞은 행복이 뭔가는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어."
-68쪽

"네. 부잣집으로 딸 시집 보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싶어요. 전 이왕 부잣집으로 시집가게 돼버렸으니까 할 수 없지만 우희나 말희는 우리와 비슷비슷한 집으로 보내도록 하세요. 세 번씩이나 뱁새가 황새 쫓는 무리 하다간 아버지 엄마 노후가 어떻게 되겠어요."

허 성 씨는 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것만틈이나 부모 생각이 극진한 초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문득 이번 기회에 초희를 치워버릴 수 없으면 미치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든다.-78쪽

남자의 우월감과 열등감은 얼마나 얇은 백지장의 표리인 것일까. 남자의 휘황한 자기 도취는 일단 허물어지면 그 잔해는 얼마나 활당한 자학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학이란 또 얼마나 우스꽝스런 어리광에 불과한 것일까.-423쪽

이 세상의 어머니들은 왜 가끔 그런 식으로 자식을 사랑함으로써 부모 자식간을 헤어날 수 없는 악몽으로 만들려는 것일까.-424쪽

사층까지 다 올라온 그는 지칠 대로 지친다. 그는 침이 바싹 마른 입을 헤벌리고 헐떡대며 다시 한번 늙었다고 생각한다.

문득 슬픔을 느낀다. 어느 틈에 늙은이가 돼 있다는 게, 산다는 게, 사람 노릇,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이 슬퍼서 콧마루가 시큰하다. -5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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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1 2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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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1 2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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