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아이들의 가벼운 목숨 (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5090.html#)
며칠 전 이스라엘은 그동안의 무자비한 가자 폭격 끝에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포했다. 길이 640킬로미터, 높이 8미터의 분리장벽에 둘러싸인 이 세계 최대의 감옥에서 휴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백린탄 고문을 잠시 중지하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아녀자와 노인만 남은 일가족 사살을 잠시 연기하겠다는 뜻인가? 75만명분의 식량으로 하루에 겨우 트럭 4대만 허용했던 종전의 ‘인도적’ 배식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뜻인가? 수도도 전기도 가스도 의약품도 모두 끊긴 뒤, 수감자의 절반 이상이 아이들인 이 감옥에 휴전이 선포된다고 해서 이들의 절망까지도 정말로 잠시 멈추게 될 것인가?
이스라엘의 건립을 약속한 밸푸어 선언 후 1937년 처칠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개가 오랫동안 여물통을 차지했다고 해서 그 여물통의 최종 권리가 개에게 있다는 생각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1969년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처음부터 그 땅에 없었다고 했고, 베긴 총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두 발 달린 짐승들”로, 샤미르 총리는 “벽에 뭉개야 할 메뚜기들”이라고 불렀다. 곤충이나 짐승들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오랜 점령과 봉쇄, 상습적인 폭격으로 이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들 정치가들의 말대로 되었다. 그들은 개처럼 쫓겨나 메뚜기처럼 몰살되었다. 흰 깃발을 흔들며 집에서 뛰쳐나오는 민간인들에게 이스라엘 군인들은 총질을 하고, 유엔 깃발이 휘날리는 보호구역에 이스라엘 폭격기는 폭격을 했다. 아버지는 한줌 무게도 안 되는 아이의 주검을 들고 마치 짐승처럼 울부짖고, 아이는 쥐의 먹잇감이 된 어머니의 주검 곁에서 울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백린가루에 온몸이 타들어간 아이들은 마치 장난으로 앞다리, 뒷다리가 부러진 메뚜기처럼 팔다리가 잘려나갔다. 곤충이나 짐승들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만큼 소박한 일상과 평화로운 잠자리를 갈망했으나 비정하게 봉쇄당한 채 자기 땅에서 난민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국에서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 이후 최고의 작가로 칭송받는 존 버저는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과 절망에 귀를 기울였다. 노구를 이끌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방문했던 그는 검문소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검문소에서는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손을 머리에 얹고 발을 내디딜 다음 자리를 잘 살피면서 걸어야 한다. 정확하게 계산된 보폭으로 자기들을 향한 총구 앞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 서두르면 의심을 사게 되고, 너무 쭈뼛거리면 초병들의 오랜 지루함을 덜어줄 게임을 자극하게 될 테니까.” 점령이란 이런 것이다. 하루하루 짐승처럼 취급되고, 언제든 강제로 게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언제 집이 무너질지, 언제 아이들이 죽을지, 언제 빵을 구할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오늘이 내일로 이어지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절망만 있을 뿐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에 내일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버저는 팔레스타인의 민족시인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무덤을 둘러보고 유럽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한 일을 목격한다. 알프스 자락이 눈보라에 휘감기자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로빈새 한 마리가 그만 자동차 유리창에 부딪힌 것이다. 그는 아직 살아 퍼덕이는 로빈새를 손 위에 올려놓고 살펴본 뒤 다시 자동차에 올라탔고, 그 후 약 반 시간 뒤 새는 죽었다. 죽은 새를 다시 손바닥에 올렸을 때 그는 신비롭게도 새의 무게가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마치 살아 있을 때의 생기가, 혹은 살려는 몸부림의 무게가 몸에서 빠져나간 것처럼 새는 가벼워져 있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절망은 그처럼 영혼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생기는 내일이 있다고 믿을 때 비로소 그 무게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질린 아이들에게 희망을 약속할 수 없을 때, 어디에서도 하루를 보장할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 없을 때 절망은 삶의 방향감각을 잃은 이들의 영혼에서 살려는 몸부림의 무게를 덜어내게 된다.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아이들은 어딘지 성자의 눈빛을 띠게 되고, 결국 자라서 성전에 몸을 던지는 자살테러리스트들이 된다. 그래서 테러리즘은 가난한 자들의 전쟁이고, 전쟁은 부자들의 테러리즘인 것이다.
절망은 어떻게 멈출 수 있는가? 존 버저는 이미 2006년에 〈우리는 발언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통해 전세계 작가들과 예술가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해 문화적 보이콧 운동을 제창했다. 60년 넘게 서안과 가자지구를 불법적으로 점령해온 이스라엘에 대해, 사람을 짐승으로 몰고 가는 중동의 잔혹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입을 열자고 했다. 이스라엘 정부가 초청을 하면 거부의사를 밝히고, 이스라엘의 부도덕성에 대해 글을 쓰자는 주장에 노엄 촘스키와 하워드 진, 켄 로치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지지를 보냈다.
이들은 아이들이 내일을 기다릴 권리까지 빼앗음으로써 팔레스타인을 세계 최대의 무덤으로 만든 이스라엘에 대해 또렷하고 우렁차게 저항의 말을 쏟아냈다. 작가들이 저항의 발언을 하지 않는다면 약자들의 삶에는 내일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가들은 짐승의 말을 하지만 작가들은 심장의 말을 하기 때문이다. 존 버저가 사랑한 팔레스타인의 시인 다르위시는 이렇게 읊었다. “내 말이 밀알일 때/ 나는 대지가 되고,/ 내 말이 분노일 때/ 나는 폭풍이 된다./ 내 말이 바위일 때/ 나는 강물이 되고,/ 내 말이 꿀로 변할 때/ 내 입은 파리 떼로 덮이게 된다.”
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 한편 며칠전 모스크바에서는 이스라엘 지지 시위가 있었다. 링크된 블로그의 댓글을 보면, 99% 이스라엘 지지자로... 역시 러시아에 유대인이 많기는 많은가 보다.
(http://drugoi.livejournal.com/2838023.html?thread=183183623#t183183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