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만세전 양과 자갑 두 파산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2
염상섭 지음, 최원식 외 엮음 / 창비 / 2005년 7월
구판절판


스물두셋쯤 된 책상 도련님인 나로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이 어떠하니, 인간성이 어떠하니, 사회가 어떠하니 하여야 다만 심심파적으로 하는 탁상의 공론에 불과한 것은 물론이다. 아버지나 조상의 덕택으로 글자나 얻어 배웠거나 소설권이나 들춰보았다고, 인생이니 자연이니 시니 소설이니 한대야 결국은 배가 불러서 투정질하는 수작이요, 실인생, 실사회의 이면의 이면, 진상의 진상과는 얼마만한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보면 내가 지금 하는 것, 이로부터 하려는 일이 결국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 년 열두 달 죽도록 농사를 지어야 반년짝은 시래기로 목숨을 이어나가지 않으면 안되겠으니까...... 하는 말을 들을 제,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심이 날 만큼 나의 귀가 번쩍하리만큼 조선의 현실을 몰랐다. 나도 열 살 전까지는 부모의 고향인 충청도 촌 속에서 자라났고, 그 후에도 일 변에 한두 번씩은 촌락에 발을 들여놓아보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소작인의 생활이 참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93쪽

"이것만은 잠깐 내가 갖다가 보고, 댁으로 보내드려도 관계없겠지요?"
하고 일어선다. 서두른 분수 보아서는 아무 소득이 없어 섭섭하고 열쩍으니, 서류 뭉치나 뺏어두자는 눈치 같다. 나는 두말없이 쾌락하였다. 사실 그 속에는 집에서 온 최근의 편지 몇 장과 소설 초고와 몇 가지 원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를 써서 기록한 서적이라야 원래 나에게는 사회주의라는 사자나 레닌이라는 레자는 물론이려니와, 독립이라는 독자도 없을 것은 나의 전공하는 학과만 보아도 알 것이었다. -101쪽

나는 그들을 볼 제 누구에게든지 극단으로 경원주의를 표하고 근접을 안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보다는 몇 층 우월하다는 일본 사람이라는 의식으로만이 아니다. 단순한 노동자라거나 무산자라고만 생각할 때에도 잇샅을 어우르기가 싫다. 덕의적 이론으로나 서적으로는 무산계급이라는 것처럼 우리 친구가 되고 우리 편이 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에 그들과 마주 딱 대하면 어쩐지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혹은 그들에게 대한 혐오가 심하여지면 심하여질수록, 그 원인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논법으로, 더욱더욱 그들을 위하여 일을 하여야 하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지는 모르나, 감정상으로 그들과 융합할 길이 없다는 것은 아마 엄연한 사실일 것 같다. -106쪽

현대적 생활을 영위할 수단 방도도 없고 생산화식에 어둡거든 안빈낙도의 생활철학에나 철저하다든지, 이도 저도 아닌 비승비속으로 엉거주춤하고 살아온 가난뱅이의 이 민족이, 그 알뜰한 살림이나마 다 내놓고 협포로 물러앉고 나니 열 손가락을 늘이고 앉아서 팔아라, 먹자! 하고 있는 대로 깝살리는 것이 능사라, 그러나 팔고 깝살리는 것도 한이 있지 화수분으로 무작정하고 나올 듯싶은가! 그렇거나 말거나 이따위 백성을 휘둘러내고 휩쓸어내기야 누워서 떡 먹기다. 그래도 속임수에 빠진 노름꾼은 깝살릴 대로 깝살리고 두 손 털고 나서면서도 몸은 달건마는, 이 백성은 다 털리고 나서도 몸이 달긴커녕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저 굶어 죽으라는 세상야" 하는 한마디에 지나지 않는다.-111쪽

나는 한번 휘 돌려다보며,
'공동묘지다! 공동묘지 속에서 살면서 죽어서 공동묘지에 갈까봐 애가 말라 하는 갸륵한 백성들이다!'
하고 혼자 코웃음을 쳤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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