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낭당 빛깔있는책들 - 민속 158
이종철 외 지음 / 대원사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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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 15년 (1137)에 김부식이 서경에서 묘청의 난을 진압한 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여러 성에 있는 성황신묘에 사람을 보내 제사지냄.

* 고종23년 (1236) 몽고병이 온수군(지금의 온양시)을 침략했을 때 온수군에서 몽고병을 물리치자 왕은 그 고을의 성황신이 도운 것이라 하여 성황신에 신호를 더하여 줌.

* 1341년 동정 원수 김주정이 각 관의 성황신에 제사드리며 신명을 부르자 무진군 성황신의 깃발에 걸린 방울이 세 번이나 울려 신이함을 드러냄.

* 공민왕 9년 (1360) 홍건적을 물리친 뒤 각 도 주, 군의 성황에 승전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지냄.

 

위의 기사로 12세기 이후 고려사회에서 전개된 성황 신앙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첫째, 성황사가 도처에 건립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서경(평양) 한 지역에만도 성마다 성황사가 있었을 뿐 아니라 점차 지방에도 확산되어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각 도, 주, 군에까지 성황사가 세워졌음을 알려 준다.

 

둘째, 성황사에 대한 제사 즉 성황제가 전쟁과 관련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김부식은 서경을 진압한 뒤, 고종과 공민왕은 외적을 격퇴한 뒤, 김주정은 출전에 앞서 성황신의 가호를 받고자 각각 제사를 드렸지만 내용상 전쟁을 전후로 하여 성황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점은 일치한다. 곧 출전할 때 먼저 보호를 기원하고 승리한 뒤에는 감사의 표시로 성황신에게 봉작하거나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려 중기 이래의 성황신은 전쟁의 수호신으로도 볼 수 있다.

 

셋째, 성황신에 대한 제사가 다소 공적으로 행해졌다. 위 기사의 내용이 모두 국가의 운명과 관련된 사건이기 때문에 성황신에 대한 제사가 공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곧 국가에서 성황제를 관장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은 성황제를 '국제'로 표현하고 있는 다음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것은 의종(1146-1170) 때의 인물인 함유일의 행적에 대한 기사이다.

 

   또 삭방도 감창사로 있을 때 등주 성황신이 여러 번 무당에게 내려 국가의 길흉화복을 잘 맞추었다. 함유일이 성황사에 가 국제를 행하였는데....       (pp. 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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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굿 빛깔있는책들 - 민속 8
황루시 지음 / 대원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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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신라 제 2대 임금인 남해왕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속어로 무(巫)의 뜻이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에는 남해왕 3년 (기원후 6년)에 처음으로 시조인 박혁거세의 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왕의 친누이동생인 아로(阿老)가 주관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가장 무속적인 의례는 신라 진흥왕 때에 시작된 팔관회로서 지금 말로 하면 나라굿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적인 규모로 거행된 이 행사는 토속신에게 제사하는 것으로 축제의 성격을 지녔다. 팔관회는 고려 때까지 이어졌고 국선(國仙)이라는 일종의 나라 무당이 주관했다.

 

오늘날의 무속과 가장 비슷한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은 고려 중엽인 12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당시 문인 이규보는 개성의 늙은 무녀가 굿하는 모습을 묘사한 '노무편'이라는 시를 남겼다. 그 시를 보면 '대들보에 머리가 닿도록 무당이 겅중겅중 높이 뛰면서 휘파람 소리를 내고 스스로를 제석천이라고 부르면 남녀노소가 그 아래로 구름같이 모여든다'고 묘사했는데, 마치 오늘날 신들린 무당이 굿하는 모습을 그린 것 같다.

 

이 기록은 이미 무속이 지배계층에게 기피의 대상이 되고 밀려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노무편'은 유학자인 이규보가 늙은 무당이 당시 수도인 송도 성 밖으로 쫓겨나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비판적인 안목으로 쓴 시이기 때문이다. 이규보는 유학자답게 제석천이 하늘에 계시지 어찌 추한 늙은 무당 집에 있겠느냐면서 굿판에 몰려든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 삼국 시대 때부터 통치자들의 손으로 불교, 유교, 도교 같은 외래 종교들이 수입되었다. 이러한 종교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배 이념으로 수입되었고 일반 사람들에게 신앙이 강요되었다. 특히 대개의 지배계층은 불교 신앙을 강력히 권유하였는데 신라 이차돈의 죽음은 무속으로 짐작되는 토속신앙의 반발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된다.

 

[...] 조선조에 들어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팔관회가 중단되면서 무속은 완전히 지배 이념과는 유리되는 서민들의 종교로 정착하게 된다.

 

[...] 무당은 천민으로 떨어지고 도성 안에서 살 수 없게 되었으며 사대부 계층에게는 접해서는 안 될 금기가 되었다. 하지만 뿌리 깊은 신앙심을 없앨 수는 없었기에 무당들은 무포라는 세금을 바치면서 직업적인 사제로서의 지위를 보장 받았다.

 

[...] 서민들은 정초나 봄, 가을이 되면 변함없이 당골무당을 불러 걸진 굿판을 벌이고 한바탕 잔치놀이를 통해 마을의 평안과 생업의 번영을 빌었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천도하기 위해 굿을 했고 몸이 아파도 무당을 찾아갔다.

 

[...] 무속이 미신으로 규정되고 조직적인 탄압을 받게 된 것은 일제시대의 일이다. 일본인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민족정신까지 없애려는 조선혼 말살정책을 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은 식민통치 초기부터 조선문화 특히 민속문화에 관한 폭넓은 연구를 치밀하게 했다.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이러어진 일련의 조사작업을 통해 일본은 무속종교가 우리나라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문화는 무엇이든지 보잘것없고 수치스러운 것이고 일본문화는 우월하다는 것을 치밀하게 교육시켜 조선민족의 자존심을 짓밟고 긍지를 밟게 하는 정책을 폈다. 무속신앙은 가장 중요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그 중에서도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장치 역할을 해 온 마을굿을 철저히 막았다. 수많은 당이 부서졌고 굿은 일종의 범죄행위가 되어 굿을 하다가도 일본 헌병이 오면 작파하고 도망쳐야 하는 실정이었다.

 

[...] 사회가 급속히 근대화, 도시화 되면서 마을굿은 더욱 위축되었는데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칠십년대 새마을 운동이다. 일제가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하나로 만들었던 미신 타파가 새마을 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옛날처럼 크게 모시지는 않아도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남아 있던 당집은 잘 사는 우리 마을을 건설하겠다는 주민들의 의지 아래 여지없이 부서졌다.

 

[...] 오늘날, 주민들을 단결시키고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기능을 했던 마을굿은 거의 사라졌다. 동해안을 끼고 있는 일부 지역과 제주도에서 미약하게 전승되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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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베스트셀러 미니북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서연희 그림, 이은연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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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은 우리들도 병사들이 된 날부터 지금까지 어딘지 모르는 곳을 향해 행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곳에 도착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들도 무엇인지를 모르는 물건을 찾고 있으나 좀처럼 그것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들도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예멜리얀은 잠시 병사들과 휴식을 취하고 나서 다시 길을 떠났다. 얼마를 걸어서 겨우 숲에 당도했다. 숲 속에는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그 움막에는 병사의 늙은 어머니가 울면서 베를 짜고 있었다. 그 할머니는 베를 짜면서 손 끝에 침을 적시는 대신 눈물을 적시고 있었다.

   [...] 

   "사람들이 부모의 이야기보다 그 물건이 말하는 것을 더 잘 듣는 것을 발견하면 그것이 곧 댁이 찾고 있는 것이야. 그러면 곧 그것을 임금님에게 가지고 가요. 임금님에게 가져가면 임금님은 그런 것을 가져 오라고 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 틀림없어. 그때 그대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돼요.

   '만일 이것이 아니라면 부셔 버려야겠다.'

   그리고 그것을 두드리면서 강 기슭에까지 가서 사정없이 부셔 버린 후에 그것을 물에 쳐넣으라구. 그렇게 하면 자네는 아내를 구해낼 수 있고, 내 눈물도 그치게 할 수 있으니까."

   [...]

   예멜리얀은 북을 둥둥 두드리며 궁전을 나갔다. 그가 북을 두드리자 임금님의 군사들이 모두 예멜리얀을 따라가고 그에게 경례를 하며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님은 창문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자기의 군사들에게 예멜리얀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그러나 임금님의 군사들은 임금님의 말을 듣지 않고 모두 예멜리얀을 계속 따라가고 있었다. 임금님은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예멜리얀에게 그의 아내를 돌려 주겠다고 제의하고 그 대신 북을 자기에게 넘겨 달라고 했다.

   "천만에요. 안 됩니다. 저는 이 북을 부셔서 강물에 쳐넣으라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예멜리얀은 북을 치면서 강가에까지 왔다. 군사들도 뒤를 따라 왔다. 예멜리얀은 강의 흙더미 위에 올라가 북을 두들겨 부셔서 강 속에 던졌다. 그러자 병사들은 달아났다.

   예멜리얀은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임금은 그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예멜리얀과 북" pp.15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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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운대행 문학과지성 시인선 101
황동규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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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미지

 

오늘날 삶을 하나의 이미지로 바꾼다면 어떤 것일까?

큰눈에 주저앉은 비닐하우스일까,

마을 못 뜬 노인의 비틀거리는 경운기일까,

자동차 꽉 막힌 도로일까,

아니면 선암사 삼성각 앞에

연기하듯 누워 있는 소나무일까?

 

그도저도 아니라면

겨울 새벽 불켜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아파트 가까이

국민학교 날짐승 우리에서 그래도 울 때라고 우는

겁 없는 수탉일까?

 

풍장 18

 

깨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피곤한 날 네 다리와 몸통을

지구 중심으로 잡아다니는 손

슬며시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아 빠듯하다.)

후 불면 입김이 뜨는 것.

빗방울이 몸을 비벼 무지개로 피는 것.

 

한참 딴 데 보다 다시 보아도

사그라지지 않는 바람꽃.

 

풍장 28

 

내 마지막 길 떠날 때

모든 것 버리고 가도,

혀끝에 남은 물기까지 말리고 가도,

마지막으로 양 허파에 담았던 공기는

그냥 지니고 가리.

가슴 좀 갑갑하겠지만

그냥 담고 가리.

가다가 잠시 발목 주무르며 세상 뒤돌아볼 때

도시마다 사람들 가득 담겨 시시덕거리는 것 내려다보며

한번 웃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번 배 잡고 낄낄대기 위해

지니고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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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노래 창비시선 101
고은 지음 / 창비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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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삿날 밤

 

세살 때 죽은 아버지

기억도 없는데

자라나서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빼다박은 듯

변성기 지나

말소리도 빼다박은 듯

가을걷이 한창일 때

어디에도 게으름뱅이 없다

그런 부지런도 빼다박은 듯

아버지 제삿날 밤 처마 밑 등불 멀리까지 빛난다.

 

광주

 

광주항쟁 10년이 지나갔다

그동안 우리는

광주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다가 우리는

광주를 떠나

그것을 전혀 모르는 곳

광주 밖에서

아무리 광주를 노래해도

아무래 광주를 강조해도

그것을 거부하는 곳

광주 밖에서

이 시대가 무엇인가를 알았다

소주병 맥주병을 마구 던져

거리에는 유리조각이 빛나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가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인가를 겨우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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