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는 남해왕 3년 (기원후 6년)에 처음으로 시조인 박혁거세의 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왕의 친누이동생인 아로(阿老)가 주관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가장 무속적인 의례는 신라 진흥왕 때에 시작된 팔관회로서 지금 말로 하면 나라굿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적인 규모로 거행된 이 행사는 토속신에게 제사하는 것으로 축제의 성격을 지녔다. 팔관회는 고려 때까지 이어졌고 국선(國仙)이라는 일종의 나라 무당이 주관했다.
오늘날의 무속과 가장 비슷한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은 고려 중엽인 12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당시 문인 이규보는 개성의 늙은 무녀가 굿하는 모습을 묘사한 '노무편'이라는 시를 남겼다. 그 시를 보면 '대들보에 머리가 닿도록 무당이 겅중겅중 높이 뛰면서 휘파람 소리를 내고 스스로를 제석천이라고 부르면 남녀노소가 그 아래로 구름같이 모여든다'고 묘사했는데, 마치 오늘날 신들린 무당이 굿하는 모습을 그린 것 같다.
이 기록은 이미 무속이 지배계층에게 기피의 대상이 되고 밀려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노무편'은 유학자인 이규보가 늙은 무당이 당시 수도인 송도 성 밖으로 쫓겨나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비판적인 안목으로 쓴 시이기 때문이다. 이규보는 유학자답게 제석천이 하늘에 계시지 어찌 추한 늙은 무당 집에 있겠느냐면서 굿판에 몰려든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판했다.
[...] 삼국 시대 때부터 통치자들의 손으로 불교, 유교, 도교 같은 외래 종교들이 수입되었다. 이러한 종교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배 이념으로 수입되었고 일반 사람들에게 신앙이 강요되었다. 특히 대개의 지배계층은 불교 신앙을 강력히 권유하였는데 신라 이차돈의 죽음은 무속으로 짐작되는 토속신앙의 반발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된다.
[...] 조선조에 들어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팔관회가 중단되면서 무속은 완전히 지배 이념과는 유리되는 서민들의 종교로 정착하게 된다.
[...] 무당은 천민으로 떨어지고 도성 안에서 살 수 없게 되었으며 사대부 계층에게는 접해서는 안 될 금기가 되었다. 하지만 뿌리 깊은 신앙심을 없앨 수는 없었기에 무당들은 무포라는 세금을 바치면서 직업적인 사제로서의 지위를 보장 받았다.
[...] 서민들은 정초나 봄, 가을이 되면 변함없이 당골무당을 불러 걸진 굿판을 벌이고 한바탕 잔치놀이를 통해 마을의 평안과 생업의 번영을 빌었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천도하기 위해 굿을 했고 몸이 아파도 무당을 찾아갔다.
[...] 무속이 미신으로 규정되고 조직적인 탄압을 받게 된 것은 일제시대의 일이다. 일본인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민족정신까지 없애려는 조선혼 말살정책을 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은 식민통치 초기부터 조선문화 특히 민속문화에 관한 폭넓은 연구를 치밀하게 했다.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이러어진 일련의 조사작업을 통해 일본은 무속종교가 우리나라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문화는 무엇이든지 보잘것없고 수치스러운 것이고 일본문화는 우월하다는 것을 치밀하게 교육시켜 조선민족의 자존심을 짓밟고 긍지를 밟게 하는 정책을 폈다. 무속신앙은 가장 중요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그 중에서도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장치 역할을 해 온 마을굿을 철저히 막았다. 수많은 당이 부서졌고 굿은 일종의 범죄행위가 되어 굿을 하다가도 일본 헌병이 오면 작파하고 도망쳐야 하는 실정이었다.
[...] 사회가 급속히 근대화, 도시화 되면서 마을굿은 더욱 위축되었는데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칠십년대 새마을 운동이다. 일제가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하나로 만들었던 미신 타파가 새마을 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옛날처럼 크게 모시지는 않아도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남아 있던 당집은 잘 사는 우리 마을을 건설하겠다는 주민들의 의지 아래 여지없이 부서졌다.
[...] 오늘날, 주민들을 단결시키고 하나의 공동체로 묶는 기능을 했던 마을굿은 거의 사라졌다. 동해안을 끼고 있는 일부 지역과 제주도에서 미약하게 전승되는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