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된 건축, 건축이 된 그림 2 - 모던의 유혹, 탐색의 시대
김홍기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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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취향이 비슷한 듯 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사람과 책장을 공유한다는 건 독서의 폭을 넓히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나라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아마도 사지 않았을 책인데 언제 샀는지도 모를 동생의 컬렉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수없이 등장한 매력적인 대상인 생 라자르 역의 그림과 그 건축에 얽힌 얘기들을 시작된 책은 영국의 세계 박람회 장소였던 수정궁과 화재가 났을 때 터너가 그린 그림으로 유명한 런던 시청사 등 근대에 존재했던 건축물들과 건축가들, 그 건축물을 화폭에 남긴 화가들의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펼쳐놓는다.

내가 파리에서 -아니, 온 유럽에서- 가장 사랑해 마지 않는 장소인 가르니에 극장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화려한 무대를 펼치는 그저 배경 공간으로 생각했던 가르니에 극장이 어떤 과정으로 거쳐 건축되고 완성이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유제니 황후와 건축 위원회 의장이 각각 미는 설계의 알력 다툼의 결과, 서로를 만족시키는 절충안으로 선택된 제 3의 설계도가 가르니에의 설계였다는 내막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그런 다툼이 없었다면 가르니에 극장 자리에는 어떤 건축물이 서있을까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대로 안목이 있는 두 사람이었으니 그들이 민 설계도 역시 꽤나 수준이 있고 볼만했을 것도 같은데.  결과물만 남는 역사라는 건 재미있기도 하지만 때때로 많은 의문을 남기는 것 같다.

건축과 미술의 결합이라면 빠질 수 없는 게 19세기말 빈 분리파와 공방, 클림트일텐데 이 책에도 어김없이,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올 봄에 한국에서 클림트 전이 있을 때 베토벤 프리즈의 일부가 전시되었고 그 공간을 보면서 2년 전 빈에 갔을 때 체제시온관 등 클림트의 흔적을 좀 더 자세하게 만나지 않고 벨베데레와 레오폴드만 훑고 들어온 걸 땅을 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아쉬움과 갈증이 더 커지는 걸 느낀다.  언젠가 다시 빈에 가면 그때는 오페라와 클림트에 촛점을 맞춰서 아주 철저하게 즐기고 와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한다.

에펠탑이 세워지던 당시의 들끓던 파리의 소동과 반대야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니 좀 더 세세하게 재확인하는 정도였고, 자유의 여신상의 모델이 들라크루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었다는 뒷 얘기엥는 또 오호! 감탄사를 한번 터뜨려줬고, 브루클린 브리지에 대한 얘기와 사진들은 별반 좋은 기억도 없고 당연히 호감도 없던 -메트 극장은 제외- 뉴욕에 한번쯤은 다시 가줘야하는 게 아닌가는 욕구를 샘솟게 했다.  

동생에게 혹시 1권이 없나 물어봤더니 1권은 구입하지 않았다고 함.  다음 달 초에 책 구입할 때 이 책 1권도 구매 리스트에 올려놔야겠다.   세상은 넓고 진짜 읽을 책은 많군.  돈과 시간이 없을 뿐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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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과 탐욕의 중국사 - 중국 관료 열전
사식 지음, 김영수 옮김 / 돌베개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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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에는 중국 역사 속의 청렴한 소수의 관리와, 엄청나게 많은 탐관오리 중에 대표주자들이 소개된다. 청백리와 탐관오리 할 것 없이 어떤 시대에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았고 또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에 대해 일대기 적으로 서술을 해주고 또 중요한 사건이나, 그의 행각에 촛점을 맞춰 중점적인 소개가 들어간다. 

포청천이라는 드라마로 한국에도 유명한 송대의 포증, 풍도, 범증, 임칙서 같은 청백리들의 삶을 보면서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어설프게나마 다짐을 하게 되는 건 어린 시절에나 가능한 독서일 거고, 슬프게도 이 나이에는 참 힘들게 사는구나.  플러스, 당사자는 자기 주관대로 꿋꿋하게 살면서 나름대로 이름을 남기면서 보람있는 생을 살지만 송나라 때를 제외하고는, 관리 녹봉으로는 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로 박봉이었다던 중국 관료체제 아래에서 그 가족들의 고생은 어땠을지 등등 현실적인 측면에 자꾸 눈이 간다. 

특별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부패의 유혹에 빠지기 쉽도록 구성된 중국의 관리 제도와 그 보수 체제에 대한 의문도 책을 읽는 내내 많이 들었는데 후반부, 건륭제 때 국가의 수입을 능가하는 치부를 이뤘던 화신이라는 탐관오리에 관한 부분에서 어느 정도 그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탐관오리 짓이 일반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을 해야하고, 일단 탐관오리로 찍히면 패가망신을 한다는 위기감이 남아있던 -그렇다고 해도 나쁜 짓을 크게 덜 한 건 없지만- 명나라와 달리 청나라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치부가 나온 건 황제로 대표되는 국가와 탐관오리의 밀접한 공생 관계가 있어서 가능했다는 해석을 저자는 하고 있다.

즉, 국고에서 신료들의 눈치나 비판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재정이 필요했던 황제와 그 비자금 조성과 금고 역할을 할 간신이라는 결합이 노골화된 것이 청나라였다는 사실인데... 수백년 전 남의 나라 얘기지만 어쩌면 이렇게 지금 우리나라와 비슷해 보이는 것인지.  요즘 역사책을 읽으면 역사가 아니라 바로 내 옆에서 일어나는 일의 과거 버전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오싹오싹 돋을 때가 너무 많다.

대다수의 중국 역사책에서 청나라의 마지막 황금기를 구가한 것으로 묘사되는 건륭제에 대한 저자의 냉정한 평가는 -소수의견인 것 같지만- 내게는 공감이 많이 갔다.

그리고 청나라가 판판이 깨지고 몰락의 원인이 됐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아편 전쟁'의 이면을 중국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도 상당히 재미가 있다.  영국 배들이 불법적으로 실어온 아편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금지하고 압수했던 임칙서라는 인물의 역할. 그리고 겉으로는 신사의 나라를 가장하면서 아시아에서 온갖 깡패짓을 해온 영국의 그 더럽고 치사한 행각에 대해 읽으면서... 열이 또 확 받았다.  

또 적절한 대처만 했다면 요즘 애들 하는 말로, '영국을 발라버릴 수도 있었던' 그 천우신조의 기회를 아편이 피우고 싶고, 또 아편 거래를 통해 얻어낼 이익을 위해 걷어차버린 청나라 지도층의 매국적인 행각을 보면서 망하는 나라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  

아편 전쟁의 패배와 청나라의 급속한 몰락에 대해 서구의 역사책에서 조차, 초강대국이었던 중국이 불과 몇십년 만에 서구의 반식민지가 된 것은 불가사의라는 표현을 썼던데 중국의 국부나 국력은 그대로였지만 소위 윗대가리가 썩어버리니 어떻게 대처할 도리가 없지.  나도 황인종에 속하다보니 아시아의 역사에 동병상련을 느끼는 강도가 더 높긴 하지만 남의 나라 역사에 이렇게 공감해서 열 받아보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

한족의 통일왕조 중에 가장 힘없고 별볼일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은 송나라의 체제가 그래도 중국 역사 안에서는 그나마 합리적이고, 청렴한 관료 생활만으로도 충분히 생활이 됐기에 청백리가 많았고 탐관오리가 적었다는 사실을 읽으면서는 국가 시스템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좀 유약하고 나약하다는 송에 대한 인식이 확 바꾸었다. 

물론 아무리 좋은 시스템도 마음만 먹으면 2년도 안 되는 기간 안에 화끈하게 망쳐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집단이 있기는 하지만...  국가도 인간처럼 건강한 시기와 병이 드는 시기가 교차하고 그러다가 점점 노쇠하고 결국은 소멸한다는 그 진리를 대입해서, 잠시 앓는 시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최근 중국 역사가들의 책이 지나치게 중화주의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중국 안에서 사는 중국인이면서도 상당히 객관적으로 자기 국가의 역사를 보고 있다.  그래서 외국인에게는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듯 싶다.  목청껏 외치는 웅변보다는 이렇게 조근조근한 설득이 더 먹힌다는 걸 보여주는 글쓰기를 하는 사람인 듯. 

재미도 있고 꽤 여러가지 생각의 꼬리를 물어오는 책.  이래서 역사책을 읽으라고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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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시공아트 20
프랭크 휘트포드 지음, 이대일 옮김 / 시공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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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뜨면 대형 사고를 치는 정권이라 벌써 잊혀진 사건이 되어 버린, 한예종 사태로 난리가 났을 때 자주 등장했던 단어 중 하나가 '바우하우스'와 '나치'였다.  이전에도 이름은 들은 적이 있지만 도대체 이게 뭔지 궁금해서 계속 노리고 있다가 읽기 시작했다.

한예종 사태와 연관되어 바우하우스라는 이름이 오르내릴 때 내가 가졌던 인상이랄까, 선입견은 뭔가 굉장히 혁신적인 예술 사조를 일으키고 시도한 미술 학교인 모양이다.  나치의 핍박을 받아 폐쇄됐다는 걸 보면 히틀러의 나치 제국과 한국의 현 정권이 이를 가는 그 소위 '빨갱이'들이 바우하우스에 많았나 보다 정도였다.

전체를 크게 뭉뚱그려볼 때 일부는 맞는 직관이었다. 마지막 교장이자 바우하우스의 종말을 지킨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우파였지만 바우하우스를 개교한 건축가이자 이론가인 그리피우스는 사회주의자였고 그의 뒤를 이은 마이어는 진짜 골수 빨갱이(^^)였고 우파 학생들에 비해 좌파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학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건 정치성향의 차별이나 교사들 때문이 아니라 바우하우스라는 학교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리피우스는 예술과 공예의 결합을 꿈꿨다.  다수 대중들에게 유리된 고고한 회화 같은 장식품이 아니라 공예나 건축의 형태로 융합되고 실생활에 적용되는 예술.  후반기로 가면서 퇴색되긴 했지만 바우하우스의 학생들은 마이스터로 불린 여러 분야 교수들의 수업과 공방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도제 형식으로 기술과 예술성을 습득하는 그런 이상을 가졌다. 

공예나 건축이 아니라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판을 샀고, 또 이런 새로운 형식의, 장르를 오가는 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 역시 반발을 했다.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학교를 옮기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정착되던 이런 바우하우스의 지향이 우파들에게 엄청난 비판의 대상이 된건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좌파들에게도 부르조아에게 아부하는 예술이니 하는 형태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예종과 바우하우스를 엮어서 얘기하던 사람들은 나치로 대표되던 우파를 가장한 파시스트 깡패들의 공격으로 결국 문을 닫게 되는 바우하우스의 운명과 역시 비슷한 시련에 봉착한 한예종을 놓고 비교를 했던 것 같은데, 난 이 책에서 비로소 알게된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시기에서 더한, 다가올 역사일지도 모를 유사성을 느꼈다.

3대 교장인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시대로 가면 바우하우스의 특징이었던, 학생들이 각 공방과 수업을 오가며 배울 수 있는 자유 - 한예종에서는 통섭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시도된- 가 사라진다.  학생들은 자신이 속한 클래스 혹은 공방에 소속되어 다른 영역을 넘볼 수가 없게 된다.  이전 과정이라면 가능했던, 직조 공방에 소속되지 않은 학생이 재미삼아 만든 직조작품이 그 전공자보다도 더 나은 결과를 얻는, 그런 자유로움 가운데 나올 수 있는 예술성의 발산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고, 바우하우스는 일종의 공방 내지 현대적인 의미에서 전공이 엄격하게 구분된 디자인 학교화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진다. 

한예종이라는 이름이 단시간 안에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바우하우스라는 존재를 보면서, 그들의 추구했지만 실패한 이상을 아쉬워하는 그런 감정을 한예종을 보면서 느끼고 싶지는 않다.

역사의 또다른 아이러니라면 나치가 바우하우스를 닫아버림으로 여기 속했던 학생들이나 교사들, 바우하우스 출신이기에 핍박받을 예술가들이 미국이나 유럽 각지로 흩어져 버리는데, 이들을 통해 바우하우스라는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아마도 지난 여름의 그 난리 때문에 한예종이라는 존재를 알게되었고 또 '통섭교육'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사람도 많을 테니 -나 역시 거기에 포함된다- 이 역시 비슷한 결과인가?   뿔뿔이 흩어진 바우하우스의 이상이나 커리큘럼이 후대 디자인 학교에 끼친 영향력이 막강했던 것을 떠올리며 또 미래를 기대해보는 게 현재를 사는 우리가 스스로를 위안하는 작은 방법이겠지.  

이 책을 택한 명확한 이유가 있다보니 감상의 고리가 한쪽으로 몰려버렸는데, 15년도 존속하지 못했던 학교지만 그 역동성과 흥망성쇠는 마치 한 인간의 일대기를 보는 것 같았다.

클레, 칸딘스키 등 좋아하는 작가들이 작품이 아니라 교사로, 이론가로 등장해 그들의 이상을 학생들에게 펼치는 모습을 보는 건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알마 말러의 남편 중 하나일 뿐이었던 그리피우스라는 건축가가 가졌던 이상이나 그의 복합적인 부분을 발견하는 것도 개인적으로 아주 재미있었다.   

이 시리즈 책을 읽을 때마다 나오는 불평인데, 명색이 '아트' 시리즈라면 최소한 도판들은 올컬러로 배치하는 성의를 좀 보여주길.  아니라면 아트 시리즈라는 이름을 빼던가.  간판에 따라 사람이 기대하는 게 달라지는데 이 정도면 허위과장광고의 수준이 아닌가?

거의 잊혀진 단어였던 서독이니 동독이니 하는 용어에 초판 연도를 보니까 1984년. 벌써 25년 전에 나온 책이다.  이 책이 출판된 뒤 바로 5년 뒤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하나가 될 거라고 그때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은 독일 사람들이 부럽다는 잡상도 살짝 스쳐갔음.

바우하우스에 대한 책들이 국내에도 꽤 번역되어 있던데 균형 잡힌 시각과 정보 획득을 위해서 기회 닿으면 두어 권 더 읽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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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사기꾼 - 모세, 예수, 마호메트 패러독스 12
스피노자의 정신 지음, 성귀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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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말이나 18세기 초에 은밀히 돌아다니던 필사본이었고 그리고 몇번 소장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는 종교 비판 서적이다.

세명의 사기꾼은 표지에 나온 것처럼 모세, 예수, 마호메드이다.  저자 그룹인 스피노자의 정신에서 볼 때 모세는 유대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기독교, 마호메드는 이슬람교의 창시자로 당시에 (현재까지도) 가장 영향력이 큰 세 종교를 타겟으로 잡아 원시종교부터 모든 종교를 몰아서 허구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있다.

성서나 일대기, 코란에서 묘사되는 예언자, 혹은 선지자들의 기적을 조작으로 설명하고 -우물에서 들려온 마호메드는 신의 사자이고 예언자라는 알라의 음성을 마호메드가 몰래 시킨 하인의 음성이라거나, 그의 신의 음성을 들려주기위해 날아온 비둘기들이 마호메드의 귀에 속삭이는 것은 귓속에 곡식을 숨겨놨기 때문이라거나-, 가장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까지 평등하게 사랑하고 구원하는 기독교의 포교를 가장 공략하기 쉽고 속기 쉬운 무지한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타겟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현대인인 내 눈으로 봐도 참신하고, 생각지도 못한 공략.  이 책이 계몽주의가 싹을 튀우기는 했지만 여전히 서슬 퍼런 종교재판과 마녀 사냥이 남아 있던 1700년대 유럽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혁신적이다.  더불어 여기서 아직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는 종교 비판의 이론을 보면 대다수의 인간은 소수의 선각자들의 답습을 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러 저자들이 썼는지 중언부언 반복되는 내용들이 좀 있기는 하지만 시각의 참신함과 시대를 몇 세기나 앞선 생각에 감탄을 했다.  내가 유신론자가 아니었다면 이거야말로 인민의 아편(^^)인 종교와 싸우는 최고의 무기를 발견했다고 흥분했겠지만 특정 종교에 몸을 담고 있지는 않아도 난 신의 존재는 믿는 인간이라 감탄의 정도에서 끝.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은 한번쯤은 읽고 왜 자신들이 비판받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늘 그렇듯 정작 읽어야할 사람들은 읽지 않겠지만.

책의 본론과 좀 떨어진 지엽적인 예인데, 로마의 창건자인 로물루스와 2대 황제 누마 폼필리우스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는... 똑같은 텍스트를 가지고도 이렇게 다른 해석이 가능하구나, 라는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 종종 만나는 그 다양성의 아이러니랄까, 패러독스를 느낀다.

로물루스는 말년에 갑자기 사라지는 것으로 일생을 마친다.   로마 신화와 역사에서는 그가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플루타르크를 비롯한 후대 역사가들은 로물루스의 반대파들이 그를 암살하고 로마 시민들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로물루스가 신이 되었다는 소문으로 사건을 무마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나 역시도 이 가설에 한 표)  하지만 이 책에서는 로물루스 스스로가 사람들이 절대 시체를 찾을 수 없는 깊은 늪지에서 생을 마침으로 자신을 신격화했다고 판단한다.  진실은 저 너머 어딘가에 있겠지만 재미있는 해석이었다.  나름대로 가능성도 있고.

과거에는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목이 뎅강 잘릴 책이 이렇게 손쉽게 손에 들어오고 대놓고 출판되는 세상이 됐다니... 인간 역사에 대한 온갖 비관적인 설이 난무하고 있지만 이런 부분을 볼 때면, 아주 조금씩이지만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200년 전 가장 급진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의 독특한 시각을 만나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이들이 불교와 석가모니의 존재를 알았다면 어떻게 썼을지 궁금하다.  부처의 기적들은 또 어떤 형식으로 신랄하게 비판을 했을까.  21세기에 스피노자의 정신이 또 나와주면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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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복식 문화사 - 세상 모든 스타일의 기원에 관한 기록
퍼트리샤 리프 애너월트 지음, 한국복식학회 옮김 / 예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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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사진은 굿. 한권에 여러 문화권을 다 넣으려니 정보가 단편적인 것아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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