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도 모르는 천황의 얼굴
스털링 시그레이브 외 지음, 안정희 외 옮김 / 신영미디어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내 책장에 가득 쌓여있는 일본 시리즈 중 하나. 또 한권 해치웠다. 그리고 일본 시리즈로 읽은 책 중에서 제일 재미있다.

인문학 관련 책을 읽을 때의 재미 중 하나가 하나의 인물이나 사건을 놓고 엄청나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똑같은 그림을 놓고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하면 각자 자기 이론의 증거로 쓰는, 풍속의 역사와 나체와 수치의 역사 같은 책을 보면 인문학은 논픽션보다는 픽션에 가까울 때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 역시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개념 자체를 흔드는 내용이다.

메이지 천황. 막부 시대를 끝내고 강력한 천황제를 부활시킨 똑똑한 군주로서 각인되어 있던 그는 여기서 막부를 대신한 새로운 권력 집단에 조종되는 게으르고 나태한 꼭두각시로 묘사된다.

다이쇼 천황은... 시그레이브는 그가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던 인물이지만 실상은 똑똑하고 정력적인 개혁가였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저자의 연구가 조금 부족했거나 자기 이론 정립을 위한 약간의 짜맞추기의 느낌. 그가 어떤 자료를 활용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본 몇 안되는 자료에서 다이쇼 시대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불리면서 다이쇼의 능력이나 치세에 관해서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이건 일본과 외부 저자의 시각이 일치되는 부분이었음.

다이쇼 시대 말고도 아마 부분부분 오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엄청 재미있다. 폭로전문 기자였다고 하던데 직업적 능력을 잘 발휘해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가 내민 증거와 논거들은 납득이 가는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이 책 안에서 스스로도 자랑했듯이, 다른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내용들이 그의 비밀스런 제보자들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전후 미국과 일본이 만들어낸, 군부에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닌 히로히또. 전쟁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으면서도 그 죄값을 치르는 일에선 모조리 피해나간 일본의 재벌과 왕족들. 그들의 숨은 커넥션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추측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득력있게 설명되고 있다.

천황의 또 다른 얼굴이라기 보다는 일본 권력층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한 느낌이다.

누가 누구와 결혼했는지도 거의 알 수 없던 메이지 이후 왕족들의 계보도 대충은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도 수확.

시그레이브는 히로히토의 동생 치치부 왕자에 대한 엄청난 애정을 글 곳곳에서 흘리고 있다. 그가 천황이 되었다면 일본이 달랐고 역사가 변했을 수도 있다는 류의...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선 어느 놈이 되건 우리에게 오는 결과는 마찬가지. 멍청한 천황을 원하는 그 막후 우익들처럼 히로히토가 차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음.

어릴 때는 인천 상륙작전의 영웅으로 위인전에 빠짐없이 등장하던 맥아더의 협잡꾼스러운 뒷모습을 여과없이 만난 것은 어른이 된 댓가라고 해야겠지.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절대 대입할 수 없는 거지만... 이 책을 보면 일본이 30년대에 이렇게 미쳐 날뛰었던 것이 우리 입장에선 다행인 것 같다. 당시 미국과 유럽은 일본의 중국 본토 침입은 비난했어도 한반도와 만주 점령은 절대 상관할 의사가 없었다고 하는데 일본이 그쯤에서 끝을 냈다면? 로스트 2009가 영화가 아닐뻔 했군.

안중근 의사가 하얼삔에서 히로부미를 암살할 수 있었던 것이 일본 비밀경찰의 묵인 때문이었단 것을 확인한 기분은... 씁쓸. 그분의 목숨 건 의거는 일본 상위 권력다툼의 도구였다는 건가?

좀 더 많은 기록이 발견되고 후속작이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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