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가지 (상) - 세계의사상 10
그레엄 프레이저 지음, 김상일 옮김 / 을유문화사 / 1996년 1월
평점 :
절판


번역이란 사생결단의 결투로 번역되는 자 아니면 번역하는 자, 둘 중 하나가 죽게 되어있다는 말을 술레겔이란 독일 철학자가 했다고 하는데 둘 다 죽는 경우도 있다는걸 보여주는 책이다.

잘난척 하지말고 영어 잘 해서 원서로 읽으면 될거 아니냐고 누가 반문할지 모르지만 정말 이 책은 능력과 끈기만 된다면 반드시 원서로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을 정도로 원문의 맛과 향기는 물론이고 내용까지 상하게 만든 번역이었다.

번역자가 서문에 일본판을 참고했다는 사실을 밝히긴 했지만 내가 볼 때 참고 정도가 아니라 거의 일본판을 번역한듯 단어나 문법이 완전히 일본풍. 일본어의 '노'에 해당하는 '의'자가 정말 하염없이 계속되는 문장에 짜증이 날 정도였다. 일본어는 문학에서도 그 '노'자의 반복이 거의 문제되지 않지만 우리 말이나 영어는 '의'(of)가 한 문장에서 두번 이상 연속해서 나오는 것은 좋은 문장으로 치지 않고 금기시하고 있는데 도입부부터 그렇게 문학적인 표현을 쓴, 영국의 지식인 신사계층인 프레이저가 그런 문장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가장 거슬리는 어휘와 문법적인 것들을 제외하고라도 단어의 선택과 문맥을 보면 이 번역자가 민속학과 신화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 같다. 지금 갑자기 마땅한 예가 떠오르진 않지만 프레이저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에 약간의 지식만 있다면 쓸 수 있는 용어를 제쳐놓고 너무나 엉뚱하고 생뚱맞은 단어를 쓰고 있는 경우도 왕왕 보이고 문장의 전혀 문맥에 안 맞고...

정말 번역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 보기는 처음. 번역가 순위를 매기는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정말 훌륭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주술과 터부, 그리고 상징성에 대한 내용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됨. 나무의 신화며 이런저런 그런 류의 책들에서 다뤄지던 내용들의 원천이 바로 이것이구나를 발견한 것도 있었고. 지금 딱히 머리에 떠오르는 책은 쟈크 브로스의 '나무의 신화 밖에 없지만 여하튼 민속학이나 신화학 계통의 글을 읽으면 각주로나 예제로 프레이저의 '황금의 가지'가 꼭 나왔었다.

그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호기심의 대상을 제대로 만났다는 것, 그 자체만 해도 설레는데 내용은... 최근 읽은 책 중에 드물게 무게감 있는 것들이어서 더 만족. 이런 류의 책으로는 정말 오래된, 낡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그 다양한 예와 의미에 대한 파악... 프레이저가 조사한 그 이민족들의 민족적 습관과 행동 양식에 대해 70% 이상의 신뢰를 한다는 전제 아래 보면 정말 대단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몇번 예제로 나온 한국 관련 정보는... 한국인인 내 입장에서 볼 때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이 꽤 있었기 때문에 솔직히 나머지 정보에 대한 신뢰성을 약간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과 별도로 프레이저가 펼치고 있는 이론은 정말 감탄됨. 민속학, 신화학 그리고 상징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봐야할 작품이다. 다시 한번 번역 때문에 약이 오름. 그리고 마지막 사족을 붙이자면...

첫째는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관계에서 아이러니. 기독교 문화권에서 성장하고 자란 프레이저지만 선교사들이나 기독교적 가치관에 투철한 일부 학자들과 달리 참 냉정하면서 유머있게 이교와 융합된 기독교의 아이러니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정확한 쪽수는 기억이 안나지만 기독교에서 가장 질색을 했던 그 광란의 박쿠스제가 벌어졌던 장소가 바로 현재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 궁이라는 것.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사실을 전하는 그 문장에서 프레이저의 유머감각을 발견했다면 내가 지나치게 오버한걸까? 그리고 또 한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절대악은 없다는 것을 다시 실감한다. 프레이저가 살았고 이 책을 쓰던 당시는 식민주의, 제국주의로 제3세계 국가들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에게 엄청 착취를 당할 당시.

그 식민지에서 얻은 부를 바탕으로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영국의 신사 계급은 돈이 전혀 안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이렇게 정열을 쏟을 수 있었겠지. 제3세계의 비극인 어쨌든 학문에는 나름대로 기여를 한 것 같다. 물론 아무리 큰 학문적 업적이나 결과도 우리를 포함한 식민지 국가들이 겪었던 희생을 보상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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