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마뉴 황제의 전설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
토마스 불핀치 지음, 이성규 옮김 / 범우사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마 이 얘기들을 중세 사람들은 트루바두르를 통해 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들었던 얘기를 수백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만나는 느낌. 어릴 때 읽었던, 참 복잡하고 어려웠던 동화의 주인공들이긴 하지만 어린이용으로 편집된 내용과는 역시 다르다..

동화책에서 롤랑(오를란도)과 12 전사들의 마지막 전투 얘기만이 뚝 떼어져 있었는데 여기선 그 얘기의 근간이 되는 앞뒤 얘기들, 오를란도와 12 전사들의 모험담, 그리고 샤를마뉴 황제의 신화와 역사가 섞인 조금은 황당한 전설들을 제대로 만나보는 기회가 된다.

이 책을 통해 그 유명한 돈키호테가 존경에 마지 않았던 오를란도와 리날도의 모험담, 그리고 비발디 오페라의 소재가 된 '미친 오를란도'의 내막을 알 수 있었고 또 그동안 서구 문학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었던 그 비유적인 사건들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됐다. 한마디로 그동안 얼마나 기초없이 그리고 제대로 된 이해없이 서구의 문학을 접해왔던가 하는 내 무식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고...

모험담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여기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예전에 읽었던 중세의 기사란 책에 등장했던 베르타의 자손이기도 한 샤를마뉴 황제. 중세가 본격적인 암흑 시대로 접어들기 전 요정과 마법사 그리고 전설적인 기사 모험담이 공종했던 낭만적인 시절의 배경이 되는 존재이다. 기독교를 이슬람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한 그의 전설적인 업적 덕분에 역사에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

이 책을 처음 잡았을 때는 역사에서 전쟁사 위주로 간단히 묘사된 샤를마뉴의 어떤 개인적 역사(야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읽어갈수록 여기선 역사를 찾는다는건 무리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역사는 따로 역사에서 만나면 되는거고 이곳에 등장한 그와 기사들의 전설적인 모험담들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듯.

이 책을 보면서 새삼 어떤 문화권에 뿌리깊게 자리한 문화의 흔적을 지워내는건 힘들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말살하려고 했던 중세의 교회지만 이 얘기들을 보면 노력에 비해 성과는 그렇게 크지 않은듯.

로게로와 안젤리카의 모험은 결국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신화의 중세 표절판이고 히포그리프는 페가수스, 신의 노여움을 사서 식사 때마다 괴물새들에게 음식을 빼았기는 왕의 얘기 역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한 내용들. 샤를마뉴 황제의 전설 안에 있는 기사들의 무용담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만날 수 있는 얘기들과 이름만 바꿔서 빌려온 존재들이 무수히 많이 등장한다.

교회는 이 얘기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과연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중세 유럽을 떠돌며 이런 구전 설화들을 퍼뜨리고 계승한 민네징거나 트루바두르들은 그런 전승으로 인해 현대의 소위 필화에 해당하는 변을 당하진 않았을지 불현듯 궁금해진다. 이 책을 마지막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부터 시작된 볼핀치의 3부작은 다 읽은 셈인데... 당시 엄격한 사회와 윤리관에 맞춰 순화된 내용을 담은 볼핀치류의 성격상 원전의 적나라함이 무척 궁금해진다.

만약 샤를마뉴가 투르 푸아티에 전쟁에서 패했다면 역사는 과연 어떻게 돌아갔을까...? 아니 최소한 이 책의 내용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슬람 문화권 안에서 트루바두르에 해당하는 위치의 시인들은 샤를마뉴를 물리친 어떤 왕과 그 휘하의 용사들에 대한 이런 류의 얘기를 만들어냈지 않았을까 싶다. 십자군 전쟁, 베리아 반도 안에서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의 다툼을 놓고 같은 시기에 나온 기사들의 모험담과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언급되는 아랍 용사들의 모험담의 내용이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는걸 보면 내 예상이 크게 틀리진 않을듯...

이 책을 다 읽고 바로 이어 중세 이야기를 읽었는데 거기에 한 등장 인물이 로랑(오를란도)를 이상을 가진 전형적인 기사로 추억하고 그리워한다. 그가 스페인에서 전사하지 않았더라면이란 얘기를 하면서. 내게는 동화 속의 주인공이었던 로랑 백작이 역사의 한 인물로 다가올 때의 느낌.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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