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평화
존 놀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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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평화, <왜 진심으로 다가가지 못했을까?>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지금, 전쟁은 전쟁터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 다니는 남학생들은 언제 학도병으로 끌려갈지, 항상 두려움에 떤다. 일부는 내가 전쟁에 참가하여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을, 다른 일부는 꼭 전쟁에 참가하여 승전보를 올리겠다는 결심을 하는 동시에 죽지 않을까라는 공포에 떤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진이 겪는 고민은, 학창시절 한번쯤 겪어보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이 든다. 친구의 우월함이 주는 열등감은 내세울 것 하나라도 있어야한다는 강박증을 만들고는 한다. 주인공인 진 포레스터 역시, 친구인 피니어스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도 내세울 것 하나는 있어야 된다며 고민한다. 진 포레스터는 학업에 열중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 여름에 피니어스가 만든 자살클럽에 가입하게 되면서, 성적이 떨어지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계속하게 된다.

 

반면에, 피니어스는 진이 노력을 하지 않고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진의 학업능력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다. 진은 진솔하게 고백을 하고, 너처럼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성적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피니어스는 이런 고백에 깜짝 놀라고, 여태까지 별 다른 노력 없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왜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착각을 하곤 할까? 항상 붙어 있으면서도, 우리는 너라는 대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서로가 같이 지내다 보면,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동시에 시기하게 되는데, 진 역시 그랬다. 피니어스의 통솔력과 우월한 신체능력을 시기하게 되고, 진솔하게 다가오는 피니어스를 부담스러워 하게 된다. 왜 진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친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친구는 동반자이면서도 항상 경쟁상대로 남기 마련이다. 평생을 함께 하게 될 친구여도, 항상 경쟁심은 남아 있는데, 진은 피니어스를 경쟁상대로만 생각했던 것일까? 결국 마음을 계속 열지 못했던 진은 피니어스에게 큰 충격을 주고 만다.


 

자살클럽에서 관행으로 해오던 나무에서 강물에 뛰어내리는 행위를 하는 도중에, 진은 실수로 나무를 흔들게 되고, 피니어스는 나무에서 떨어져 불구가 되고 만다. 자신의 실수로만 다리가 다치게 된 줄 알고, 피니어스는 진을 계속 찾는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은 피니어스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움에 외면하고 만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그것으로 인해 불구가 되었다고 후에 고백을 하게 되지만, 피니어스는 그러한 사실을 믿지 못한다. 불구가 된 피니어스는 전쟁에 참가하려 했던 자신의 목표를 상실하게 된다. 그런 충격으로 인해, 피니어스는 또 다시 추락사고를 겪게 되고, 더 이상 피니어스를 볼 수 없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전쟁은 전쟁터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항상 성장하는 도중에, 전쟁과 같은 난리를 겪는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진정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을 열어 진심으로 다가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약간의 벽을 두어, 자신의 진심을 숨겨야 하는 것일까? 참으로 인간관계란 어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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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으로 지은 집 - 가계 부채는 왜 위험한가
아티프 미안 & 아미르 수피 지음, 박기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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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으로 지은 집

 

가계부채의 위험은 항시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큰 위험은 집을 담보로 한 대출이다. 우리는 내 집 없이는 살 수 없다. 사실, 의식주와 관련된 것은 기호와 상관없이 필수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집 없이 살 수 있을까? 내 집 마련이라는 구호는 항상 우리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느 나라에 살더라도 내 집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만 특별하게 전세라는 제도가 있지만, 사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제도라고 한다.

 

 

이 책은 미국에서의 사례를 근거해서 보여주고 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전에 어떻게 해서, 사람들은 집을 사게 되었으며, 빚으로 지은 집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서 보여준다. 2008년 이전에 은행에서는 집을 사라면서, 대출을 독려했다. 그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을 집을 사게 되어서 집값에 거품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이더라도, 집을 담보로 대출을 하게 되었고, 많은 이들은 집값이 오를 것 이라는 전망을 믿고 집을 구입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빚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대출을 받아서 집을 구입하게 됐고, 경제적인 타격은 심각했다.

 

만약 10만 달러의 집을 10만 달러를 대출받아서 구입하면, 홈 에쿼티는 0이다. 홈 에쿼티는 소유하고 있는 주택에서 부채를 뺀 나머지 금액이다. 10만 달러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집을 10만 달러를 대출받아서, 집을 구매했다. 향후에 집을 구매하려는 많은 수요자들이 생겨서 집값은 12만 달러까지 올랐다. 그러면 실제로 나의 재산이 2만 달러가 증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실제로 집은 계속 자신이 소비하고 있으므로, 재산이 오른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집은 사실 대출받지 않는 이상 구매할 수 없는 재산이다. 막대한 금액을 일시불로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도 있겠지만, 당장 하루살기 급급한 사람이 태반이다. 그렇기에 가계부채가 증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계부채의 위험은 집값이 떨어지고 나서 더욱 커졌다. 미국에서 2008년 전에 집을 구매한 사람은 집값이 계속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믿고 집을 구매했다. 하지만, 집값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집을 사서 빚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자, 많은 사람들을 집을 팔았기 때문이다. 수요보다 공급이 점점 많아지면, 집값이 내려가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홈 에쿼티는 0이 아닌 마이너스 상태로 변했고, 많은 사람들은 깡통주택을 안고 살게 되었다. 깡통주택이란, 집의 가치보다 빚이 많은 집을 말한다. 이런 깡통주택을 팔아버리면, 그 집에 사는 거주자들은 집을 포기하고 거리에 나가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게 된다. 그렇게 살게 되는 사람들은,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비를 줄이게 된다. 소비를 줄이게 되면, 경제의 전반적인 영향이 미치게 되는데, 경제침체로 이어지게 되고, 계속되는 악순환에 휩쓸려서, 집값은 더 떨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은행을 살릴 것이 아니라,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당장 은행을 살리면, 경제침체를 막을 수 있지만, 경제를 살릴 경우에는 장기적으로 다시 회생할 수 있다. 부채탕감만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집 마련은 항시 우리의 목을 죄어온다. 하지만, 빚 없이 집을 살 수 있을까? 집이란, 나의 안식처, 가족과 함께 하는 곳, 편한 곳이 되어야 하지, 투기로 인해 돈을 벌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빚 없이는 집을 살 수 없고, 빚이 있으면 또 살기 힘들다. 하지만 빚지고 사는 게, 현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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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지음 / 지식채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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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2, 4, 6, 8, 10,

1) 2, 4, 6, 8, 10, 12, 14, 16, 18, 20

2) 2, 4, 6, 8, 10, 14, 18, 22, 26, 30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이 2, 4, 6, 8, 10의 숫자의 수열을 보고 다음에 올 숫자를 고르라고 하면, 1번의 답을 고를 것이다. 고등학교 교과 과정을 배웠으면 공차가 2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2번의 답을 골라도 답은 틀리지 않는다. 앞서서 2를 5번 더하는 규칙다음에, 다음 규칙으로는 4를 다섯 번 더하는 규칙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1번의 답을 강요할 것이다. 과학적 사고는 두 가지의 답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사고의 전환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과학의 패러다임은 두 가지로 정의된다. 첫 번째로 기존의 과학의 체계가 변환되어 이전의 믿었던 법칙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의로 정상과학의 궤도가 설정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과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믿는 생각 혹은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두 가지의 의미는 매우 다르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을 기존의 있던 정상과학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상과학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쿤은 일반화 되어있던 법칙을 쉽게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 이중적인 것 같다. 칼 포퍼는 이러한 토마스 쿤의 태도를 비판했는데, 비판이 이해가 간다.
칼 포퍼는 반증주의자로서 자신이 선호하는 이론이라도 실험과 관측에 어긋날 경우 단호하게 폐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반증주의는 토마스 쿤의 과학적 패러다임을 비판했다. 쿤은 기존의 패러다임에 맞추어서 조금씩 수정되면서 과학이 나아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기존의 것을 버려야한다면, 버려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없었더라면,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 시대는 천동설이 정상과학이었고, 종교적인 이유와 함께 그러한 사실이 묵살 당하였기 때문이다. 후대 과학자 갈릴레이와 케플러같은 사람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지동설은 끝내 빛을 바라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이 변화가 생긴 것이다.
정상과학에서 어긋나면, 무조건 폐기되어야 하는가? 물론 기존의 정상과학이 틀릴 수도 있다. 당시 과학기술의 수준의 실험과 관측으로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무조건 폐기하기에는 옳지 않은 것 같다. 뉴턴의 역학법칙도 진리라고 여겨졌던 것이, 한순간 무너진 적이 있었다. 이론과 실재가 맞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실생활에 적용해왔던 법칙을 한순간 폐기한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험은 매우 크다. 뉴턴의 역학법칙은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하는데 적용되지 않았다. 여기서 임시방편적 가설이 나왔는데, 그 가설을 이용하여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해냈다. 그러나, 해왕성을 발견하고 나서, 뉴턴의 역학법칙이 적용이 됐는데, 다시 뉴턴의 패러다임이 되살아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법칙을 한순간 무너뜨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만약에 천왕성의 궤도계산에 뉴턴의 법칙이 적용이 안 됐다고 해서, 뉴턴의 법칙을 폐기했다면 해왕성을 발견하는 것이 늦추어 졌을지도 모른다.
과학은 귀납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런 귀납의 문제를 제대로 파헤친 것이 블랙스완이론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백조를 하얗다고 여긴다. 하지만, 검은 백조가 발견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세상의 모든 백조가 하얗다‘라는 명제를 ’대부분의 백조는 하얗다’라는 식으로 고쳐야할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믿는 영역에서, 아직도 보지 못하고 놓치는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영역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기존의 과학체계도 그렇다. 만약에 새로운 것이 발견되더라도 그것이, 법칙으로 구성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유지되다가 반증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폐기하기에는 위험이 크지만, 버려야할 것을 버리는 것도 맞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의 법칙이 아니라 다양하게 예외로 두어서 적용한다면, 우리는 상대주의라는 감옥에 시달릴 것이다.
항상 맞는 체계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준은 법체계 안에서의 자유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도덕과 양심의 영역도 있다. 우리는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동시에 법을 어기지 않으면, 비난을 받지만 형벌을 받지 않는다. 도덕과 양심의 영역은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영역이다. 그러나 법은 절대적으로 적용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절대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절대적인 법칙을 무조건 신봉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과연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과학이란 분야는 참 난해한 것 같다.
저자는 우리가 ‘혁명’이 아니라 ‘진보’를 통해서 과학이 이루어져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혁명이 이루어지게 되면, 기존의 이론 체계는 모두 폐기처분되어 버린다. 하지만 진보되어 나간다면, 기존의 이론 체계를 흡수하는 동시에, 새로운 체계가 세워져서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예로 플로지스톤 이론을 들었는데, 화학의 혁명을 일으킨 라부아지에와 프리스틀리의 플로지스톤 이론이 맞붙어서 라부아지에가 승리를 거두고 만다. 만약에 라부아지에의 이론뿐만 아니라, 프리스틀리의 이론을 어느 정도 참고하면서 화학이 발전해 나갔더라면, 더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쿤은 일원주의적 사고로 패러다임의 독점설을 내세웠다. 정상과학상태에서는 각 과학 분야에서 패러다임이 한 개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저자는 과학자들이 패러다임을 일원화하려고 경쟁하지 않아도, 정상과학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패러다임의 일원화를 이끌기 위해서, 과학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경쟁 패러다임이 아닌, 다원주의적 사고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상생활에서 태양계까지의 규모는 뉴턴역학을 사용하고, 규모가 아주 작아지면 양자역학을 적용하며, 규모가 매우 커지면 일반상대성이론을 사용하며, 속도가 빨라지면 특수상대론을 사용한다고 한다. 물론 상대론적 양자역학을 잘 세우게 되면, 필요한 모든 내용을 표현할 수 있지만, 다루는 대상이 복잡해질 때 계산이 힘들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기에 효율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법칙이 조금 어긋난다고 해서 그 법칙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원주의적인 사고를 갖추어야 한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물리와 화학의 과학혁명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되어 있는데, 지구과학과 생물에 대해서는 부족한 것 같다. 화학분야는 정말 세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물리는 그렇지 못하다. 저자의 다음 책이 기대된다. 다음 책에서는 다른 분야에서도 흥미롭게 설명해주셨으면 한다.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http://blog.naver.com/young92022/220208936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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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박생강 지음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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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빼빼로를 두려워하는 이 남자는 왜 빼빼로를 두려워 했을까? 심리 상담사인 민형기는 뜬금없는 상담자에게 당황해한다. 한나리라는 여자의 남자친구가 자칭 빼빼로포비아라는 증세가 있다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민형기는 상담사이기에 직업정신으로 그녀를 상담해 준다. 그 수상한 남자는 왜 빼빼로를 두려워했을까? 왜 빼빼로를 두려워했는지를 소설의 주인공들은 추적한다. 혹시 그가 변태성욕자 혹은 소시오패스가 아닌지 두려움에 떨고, 그래도 궁금해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쫓는다.

 

소설의 진행이 심리상담사와 자칭 여자친구라는 한나리를 중심으로 해서, 전개될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빼빼로포비아라는 증세를 겪는 남자의 카페 알바생을 중심으로 해서, 소설이 전개된다. 알바생 김만철은 어김없이, 사장의 집에 초대된다. 그 카페의 알바생들은 일정한 시기가 지나게 되면, 카페 사장의 집에 초대된다. 카페 사장의 집에 가게 되면 모두가 두 반응으로 나뉘게 되는데, 입을 꼭 다물게 되거나, 아니면 일을 그만둔다는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의 방향이 김만철이 사장의 집에 초대된 이후부터 전환되고 만다. 처음에는 스릴러 혹은 공포소설인줄 알았지만,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황스럽다. 내가 생각한 전개랑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카페사장의 고백에 소설의 틀이 완전히 깨지고 만다. 나는 스티븐 킹의 소설처럼, 이제 카페 알바생이 감금되거나 해서,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겠지 하고 마음을 먹고 책을 한 장씩 넘겼지만, 전혀 다른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줄거리 내용을 적게 되면 이 소설의 재미가 반감되기에 적을 수 없다. 정말, 이 소설의 표지가 소설의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이 뚝 부러져 있는 사람과 주변의 공간을 기점으로 공전하고 있는 행성들이 이 소설의 내용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을 표현해보자면, 빼빼로를 구입해서 포장을 뜯었는데, 빼빼로가 아닌 무엇이 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인간은 모두가 빼뺴로일지도 모른다. 개성이 상실된 채로, 박스 포장에 담겨서, 비닐이 뜯어지길 기다린다. 막대모양의 과자에 개성이 부여된다고 보이는 초콜렛, 아몬드, 딸기 등 다양하지도 않은 토핑이 묻혀서 먹히길 기다린다. 모두가 다른 삶은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공장에서 각각 다르다고 여겨지는, 그냥 빼빼로, 아몬드빼빼로, 누드빼빼로처럼, 틀에 찍혀서 나오는 빼빼로처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빼빼로일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작가는 왜 하필 빼빼로를 선택해서, 소설의 중심 소재로 사용했을까? 정말 빼빼로를 혐오했을까? 아니면 상술이라고 여겨지는 빼빼로 데이에 시기를 맞추어서, 출간을 한 것일까? 빼빼로 데이라는 L사의 마케팅을 비판하기 위해서 출간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http://blog.naver.com/young92022/22020780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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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비타민 -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내가 바뀌는
도마스 아키나리 지음, 전선영 옮김 / 부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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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비타민

 

이 책은 과거 고대 철학부터 현대 사상까지 한눈에 정리한 철학이야기이다. 깊이가 있는 수준의 책을 원하신다면, 이 책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초심자를 위한 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서술된 모든 부분이 이해하기 쉽다고는 못하겠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마음에 들었던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의 서술 부분이다. 철학의 모든 부분을 알 수는 없지만, 철학에 어느 부분을 관심을 가지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처음부터 벽이 높으니, 우리는 다가기도 힘든 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자신이 철학사를 쭉 읽어보고 어느 철학자가, 자신에게 맞는지 파악하고, 그 철학자가 저술한 원작을 읽어보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질료는 재료이고, 형상은 재료로 만들어지는 구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질료가 구리라면, 구리로 만들어지는 동전, 조각상, 컵 등은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을 질료인, 형상인, 동력인, 목적인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자면, 집을 지을 때 필요한 목재나 기왓장 같은 재료가 ‘질료인’이다. 집을 지을 때 필요한 설계도가 ‘형상인’이고, 집을 짓는 목수나 인부가 ‘동력인’이며, 만들어진 집에 들어가서 살 수 있어야한다는 최종적인 목적이 ‘목적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최고선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한다. 최고선이란 곧 행복이다. 앎을 추구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앎으로 인해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앎 그 자체가 행복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중용이란 다양한 감정에 대해 지나치게 강하거나 약하게 반응하지 않고 그 중간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습관으로 완성시킬 수 있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

종래의 철학은 객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러한 철학에 대해 회의를 갖은 것이 키에르케고르이다. 내게 진리인 진리(주체적 진리) 즉, 내 생활에 정말 깊은 의미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인간은 실존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나 자신은 타인과 바꿔치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존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지만, 이 병에 걸리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동물보다 나은 존재이다. 절망하기에 인간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실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실존을 단계에 따라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한다.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의 질적 변증법을 주장한다. 미적 실존은 쾌락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하루하루 즐거움을 추구하더라도, 어느 순간 그 즐거움에 대해 지루하고 우울하게 된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윤리적 실존이란, 양심과 도덕에 맞추어 사는 인생을 지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앞의 두 단계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인이므로 마지막 단계인 종교적 실존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런 실존의 단계가 헤겔의 변증법을 질적으로 비판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즉자(아직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자(즉자의 원래 다른 상태로 바뀐 두 번째 단계) 그리고 즉자적 대자(즉자와 대자의 대립을 지양한 새로운 것으로, 갈등이 통일되어 완전한 상태로 정리되는 단계)로 나아간다. 하지만, 대자에서 바로 즉자적 대자로 넘어갈 수는 없는 단계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을 하지 않더라도, 종교적 실존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변증법을 비판하는 것이다. 물론, 종교적인 가치가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가치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에 따라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이 완전 틀릴 수 도 있다.

 

니체

“아무리 자신의 인생이 고통스럽더라도 몇 번이건 그것을 받아들인다.” 운명애의 철학, “원한을 품지 말라! 비뚤어지지 말고 똑바로 나아가라!” 니체는 ‘힘을 향한 의지’에 대하여 주장한다. 만약에 누군가가 무단횡단을 통하여 급하게 길을 건너고,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게 무단횡단을 하지 말라고 도덕적으로 훈계했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니체는 결국 두 존재 모두가 ‘힘을 향한 의지’로 인해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무단횡단한 사람은 급하게 어떤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훈계한사람은 도덕적으로 더 높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더 높은 존재가 되는 것과 더 많은 힘을 갖는 것을 원한 것이다. 이것이 ‘힘을 향한 의지’이다. 힘을 향한 의지가 삐뚤어져 우리는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이 생기고 만다. 이러한 르상티망으로 인해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다. “지금 자신은 불행할지 모르지만 신의 나라에서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독교를 비판한다. 누군가의 성공이나 행복 그리고 무엇인가를 시기하는 마음은 ‘힘의 향한 의지’가 비뚤어져 르상티망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마음이 계속 생겨나면, 결국 이 인생은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탄생하고, 천국이라는 허황된 곳을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이 죽었다는 한마디에, 모든 철학은 분쇄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영원한 존재‘를 바라는 바람(르상티망)이 만들어낸 망상이 되고, 기독교의 신도 마찬가지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도 “내가 가난하므로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망상이 되고 벤담의 공리주의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도 인간을 평균화하고 싶다는 르상티망에서 나온 발상이 된다. 이러한 발상은 참된 세상이나 진리가 없다는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로 나아간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를 건너질러 매어 놓은 한 줄기 밧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 깊숙이 용솟음치는 ‘힘을 향한 의지’가 있다면 현실의 사회에서 방해받아 잘 풀리지 않을 때도 끄떡없다. 어떤 인생이든 등을 돌리지 않고 견디며 상황을 원망하지도 않고 그 운명을 사랑하는 굳센 인간. 이것이 초인이다. 초인은 신을 대신하는 궁극의 가치다. 딱히 지금 자신이 초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그런 존재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노력하며 살면 된다는 것이다. 초인 사상은 니힐리즘을 뛰어넘어 인생을 최고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너는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 온 이 인생을 한 번 더, 더 나아가 무수히 되풀이하며 살아야만 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영원회귀’라는 사상을 표현한 구절이다.

끝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일은 다 일어나고 만다는 사상이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빅뱅으로 우주가 태어나고 지구가 생겨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언젠가 우주가 소멸하고 다시 우주가 생기는 것을 되풀이하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히 똑같은 유형의 지구와 인류의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바보 같은 말로 들릴지라도 어쩌면 우리는 같은 인생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수없이 여러 번. 니체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긍정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만약 조금도 다름없이 지금의 인생이 되풀이될 때, 그래도 “이것이 인생이었던가! 좋다. 다시 한 번 살아 보겠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인생이 영원회귀된다면,

또 다시 살아보겠는가?

 

 

하이데거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를 사유하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원래 현상학이라고 불리는 분야에 속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삶의 자세를 말하는 부분이 부각되어 실존주의로 분류되고 만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 일상을 둘러싼 환경 세계에 먼저 나타는 것이 ‘도구’이다. 그리고 이런 도구는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OO을 위해서라는 식으로 서로 지시해서 하나로 연관을 맺고 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서, 못은 널빤지를 고정하기 위해서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도구 연관’을 성립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염려(Sorge)이다.(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불렀으며 ‘염려’도 하이데거 철학에서 현존재의 존재 양식을 설명하는 철학 용어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염려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내일 비가오니 우산을 챙겨야지라는 식이다. 왜 우산을 준비하는가? 젖기 않기 위해서, 혹은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내일도 무사히 있고 싶다.” 자신의 존재를 염려하기에 도구가 쓰이는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유의미성’이라고 한다. 오늘 밤에 심장마비로 죽는다면 우산은 필요가 없다. 세계란 인간의 염려에서 시작되어 연결되는 거대한 의미의 틈새기와 같은 것이라고 하이데거는 생각했다.그런 틈새기가 풀려서 알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리하여 생기는 것이 불안이라고 한다. 두려움이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어쩐지 불안하거나 아무튼 불안하거나 한다면, 대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하이데거는 “불안은 무(無)를 드러나게 한다”라고 표현한다.

 

 

하이데거는 대중 사회 속 안일한 일상에 젖어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사람을 ‘다스 만(das Man,일반적인 사람, 일상인)이라고 한다. 연예인 누가 음주운전을 냈다더니, 누가 바람을 피웠다는 등하는 소식에 눈을 돌리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왜 자신의 존재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이 죽는 존재라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을 아는 듯해도 사실을 잘 모른다. 타인의 죽음을 알아도 그것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토막살인되서 죽었대.”라고 신문에서 보고 수다를 떤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자신의 죽음은 누구와도 교환할 수 없다.(교환 불가능성)

2. 고독해진다.(몰교역성)

3. 반드시 죽는다.(확실성)

4.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무규정성)

5. 마지막에 온다.(추월 불가능성)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이렇다.

1. 자신의 죽음만은 아무도 대신하지 못한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죽음에서 시선을 피하고 있을지 모른다.

2. 죽음이란 이제 아무와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3. 게다가 누구는 죽고 누구는 죽지 않는 불확실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4. 덧붙여 언제 죽느지, 날짜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당장 1초후에 죽을 지 몇 년 후에 죽을지 아무도 알 수없다.

5.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에 찾아온다. 죽음을 앞서 치르고 살 수 없다. 어김없이 마지막에 올 것이다.

 

 

죽음을 향하는 존재, “자신의 죽음을 피하려 하지 말고 마주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이나 막연하고 있는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것이 현상학이다. 어처피 죽을건데 왜살아?라는 생각을 갖을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인 자신을 감추려고 사람들이 일상성에 파묻혀서 얼버무리며 살고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움츠려들지 말고, 감추지도 말고 자신이 ‘죽음을 향하는 존재’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한다. 죽음을 받아들일 각오를 함(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으로써 우리는 ‘다스 만’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신(실존)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여라.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한 순간이 소중해진다. 만약에 영생이 가능하다면, 이 순간, 오늘, 그리고 내일이 소중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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