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씨앗 - 제인 구달의 꽃과 나무, 지구 식물 이야기
제인 구달 외 지음, 홍승효 외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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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씨앗, 우리는 지구를 빌린 것이 아니라 훔쳤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제인 구달이라는 인물을 떠올리면, 침팬지 연구가, 환경운동가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제인 구달이 새롭게 선보인 희망의 씨앗에서는, 지구의 식물이야기를 들려준다. 할머니가 정답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 아니 아낌없이 주는 지구의 식물에 대해서 들어보도록 하자.


 

신대륙 발견에 의해서, 지구의 생활 반경이 넓어진 만큼,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물론 서구열강들이, 우선적으로 노린 것은 보물, 문화재, 노동력 등의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식물의 종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가 섭취하고 있는 옥수수, 밀 등 다양한 작물들이 신대륙에서 온 것들이며, 우리의 식탁 앞에서 이런 작물들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준다. 이 책에서 보면, 의, 식, 주에 대한 기본적인 영역부터, 우리에게 치유와 위안을 주는 정신적인 영역까지, 식물은 우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로운 식물이란 무엇인가? 일용할 양식을 주는 식물 혹은 따뜻한 옷을 만들 수 있는 면화 아니면 가구 혹은 집을 만들 수 있는 자재로 쓸 수 있는 나무? 그 어떤 식물도 우리가 이로운 작물인지 혹은 해로운 작물인지 경제적인 가치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효율성을 위해서, 작물에 가격을 정하고, 생물다양성을 없애고, 단일작물만을 심어내고 있다. 경제성이 있느냐 혹은 없느냐에 따라서, 식물을 심어야하는지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지구에게 빚을 지고 살고 있다. 그것에 모자라서, 종자를 유전자변형을 하고, 숲을 개간하고, 나무들을 벌목하고 있으며, 숲에 사는 생물들을 쫓아내고 있다.


 

지구의 주인은 인간인가? 지구의 주인은 지구이다.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다른 생명들과 함께 거주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들은 모든 생물들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며, 자연을 훼손하고 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살기 위해, 치유를 위해, 기호를 위해 식물들을 이용하고 있다. 자연을 훼손한 대가는 언젠가 치루고 말 것이다. 유전자 변형을 이용한 옥수수, 콩, 다양한 작물들을 먹은 동식물들을 섭취하는 인간들은, 언젠가 큰 대가를 치루고 말 것이다.

 

우리가 꽃이나 혹은 나무를 바라볼 때, 우리는 아름다움과 정신적인 안정까지 얻는다. 그것에 모자라, 풍요로운 열매와 건축물의 자재, 옷을 만들 때 필요한 면직물까지 의, 식, 주에 필요한 모든 것까지 받기만 한다. 최소한 자연에게 다시 되돌려 주지 못할망정, 훼손하지 않도록 노력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책의 마지막 장인, 삶의 의지라는 챕터에서는, 원폭 피해에서도 살아나는 나무와, 911테러를 겪고도 살아남은 감동적인 나무에 대해서 나온다. 인간은 끊임없는 전쟁과 테러 그리고 개발을 통하여 자연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살아남기 위해서 계속해서 발버둥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자연도 유한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자연을 바라볼 때 의, 식, 주, 약물, 기호식품들의 경제적인 가치로만 판단하지 말자. 지금도 우리의 자연은, 끊임없이 이산화탄소를 빨아드리며 산소를 만들어내고 있고,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풍요로움을 주고 있다.

 

<밑줄 긋기>

p448

나는 행운아다. 필요한 만큼만 주변 땅으로부터 얻어 사람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야생 그대로의 장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식물들은 그것들이 제공하는 음식, 약, 의류로만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자체의 가치를 평가받는 곳이었다.


식물들이 아름답고 완전한 그들의 모습을 보여 주며 자유롭게 자라는 그런 장소였다. 또한 인간에게 이끌려 나뭇가지가 잘려 나가고 비틀린 채 자라며, 작은 사무실용 화분에서 홀대받고, 농약이 뿌려져 병들고, 차가 내뿜는 모든 오염 물질에 노출된 채 복잡한 거리를 따라서 줄 선 것처럼 극심한 고통을 받는 식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식물은 여전히 최선을 다해 오염도니 공기에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먼지와 독성 물질에 덮인 잎으로 햇빛을 빨아들이며, 사람들을 위해 산소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꽃으로 너무나 자주 우리의 일상을 밝혀 준다.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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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과학도에게 보내는 편지 -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과학자 <개미>, <통섭>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이 안내하는 과학자의 삶, 과학의 길!
에드워드 O. 윌슨 지음, 김명남 옮김, 최재천 감수 / 쌤앤파커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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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과학도에게 보내는 편지, <과학도가 갖추어야할 마음가짐이란?>

 

 

에드워드 윌슨은 개미연구가이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그리고 통섭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젊은 과학도를 위해서 책을 출간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과학을 하기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할까? 뛰어난 두뇌와 명석함 혹은 많은 연구자본과 우수한 인재들 아니면 넓은 백그라운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것들을 무시한 채, 기본적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에드워드 윌슨은 기본적으로 수학실력을 강조하고 있다. 에드워드 윌슨도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되기 직전까지도 수학 때문에 골치를 썩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수학적인 마인드 없이는,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 어렵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강조하는 것은 두뇌가 아니라, 열정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사실, 많은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IQ가 생각보다 높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IQ가 높은 인재들은 차라리 회계사가 어울리지 과학자에는 어울리는 인재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열정은 무엇인가? 에드워드 윌슨이 개미연구를 시작할 당시에는, 개미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자가 세계적으로 1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 분야에서 최고가 된 윌슨은 다른 분야에서도 더 많은 연구비용을 얻을 수 있었고, 우수한 인재들과 함께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모두 뛰어드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하지 말고,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라는 것이다.

 

 

실험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생각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실험을 확장해서 자신의 이론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당장 개미들을 보자. 개미들은 동료 개미가 죽은 지 어떻게 알까 라는 엉뚱한 생각에서 시작해서, 개미에 대해서 파고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왜 알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인문학과 과학 혹은 공학에서의 융합의 개념이 강조되는 만큼, 과학을 경시해서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는, 순수 과학 분야는 죽어가고 있고, 그나마 공학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더 이상 학문이 취업을 위한 도구로 여겨지기 않길 바라며, 자신만의 분야를 찾아갔으면 좋겠다.

 

<밑줄 긋기>


P82

독창적인 발견은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에서나 수월하게 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과학의 최전선이라고 불리는 과학지식의 변경에 도달하려면, 앞선 탐함가들이 그려둔 지도가 필요합니다. 루이스 파스퇴르가 1845년에 말했듯이 행운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오지요. 파스퇴르가 그렇게 말한 이래 최전선으로 가는 길은 훨씬 더 멀어졌고, 그곳에 가닿고자 그 길을 여행하는 과학자도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여행에 더 유리해진 점도 있습니다. 요즘은 최전선 자체에 예전보다 훨씬 더 넓어졌고 지금도 계속 더 넓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리학에서 인류학까지 어떤 분야를 고르든, 기나긴 최전선에는 아직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지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아직 아무도 탐사하지 않은 드넓은 영역의 어딘가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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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지음 / 지식채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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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2, 4, 6, 8, 10,

1) 2, 4, 6, 8, 10, 12, 14, 16, 18, 20

2) 2, 4, 6, 8, 10, 14, 18, 22, 26, 30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이 2, 4, 6, 8, 10의 숫자의 수열을 보고 다음에 올 숫자를 고르라고 하면, 1번의 답을 고를 것이다. 고등학교 교과 과정을 배웠으면 공차가 2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2번의 답을 골라도 답은 틀리지 않는다. 앞서서 2를 5번 더하는 규칙다음에, 다음 규칙으로는 4를 다섯 번 더하는 규칙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1번의 답을 강요할 것이다. 과학적 사고는 두 가지의 답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사고의 전환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과학의 패러다임은 두 가지로 정의된다. 첫 번째로 기존의 과학의 체계가 변환되어 이전의 믿었던 법칙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의로 정상과학의 궤도가 설정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과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믿는 생각 혹은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두 가지의 의미는 매우 다르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을 기존의 있던 정상과학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상과학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쿤은 일반화 되어있던 법칙을 쉽게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 이중적인 것 같다. 칼 포퍼는 이러한 토마스 쿤의 태도를 비판했는데, 비판이 이해가 간다.
칼 포퍼는 반증주의자로서 자신이 선호하는 이론이라도 실험과 관측에 어긋날 경우 단호하게 폐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반증주의는 토마스 쿤의 과학적 패러다임을 비판했다. 쿤은 기존의 패러다임에 맞추어서 조금씩 수정되면서 과학이 나아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기존의 것을 버려야한다면, 버려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없었더라면,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 시대는 천동설이 정상과학이었고, 종교적인 이유와 함께 그러한 사실이 묵살 당하였기 때문이다. 후대 과학자 갈릴레이와 케플러같은 사람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지동설은 끝내 빛을 바라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이 변화가 생긴 것이다.
정상과학에서 어긋나면, 무조건 폐기되어야 하는가? 물론 기존의 정상과학이 틀릴 수도 있다. 당시 과학기술의 수준의 실험과 관측으로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무조건 폐기하기에는 옳지 않은 것 같다. 뉴턴의 역학법칙도 진리라고 여겨졌던 것이, 한순간 무너진 적이 있었다. 이론과 실재가 맞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실생활에 적용해왔던 법칙을 한순간 폐기한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험은 매우 크다. 뉴턴의 역학법칙은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하는데 적용되지 않았다. 여기서 임시방편적 가설이 나왔는데, 그 가설을 이용하여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해냈다. 그러나, 해왕성을 발견하고 나서, 뉴턴의 역학법칙이 적용이 됐는데, 다시 뉴턴의 패러다임이 되살아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법칙을 한순간 무너뜨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만약에 천왕성의 궤도계산에 뉴턴의 법칙이 적용이 안 됐다고 해서, 뉴턴의 법칙을 폐기했다면 해왕성을 발견하는 것이 늦추어 졌을지도 모른다.
과학은 귀납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런 귀납의 문제를 제대로 파헤친 것이 블랙스완이론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백조를 하얗다고 여긴다. 하지만, 검은 백조가 발견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세상의 모든 백조가 하얗다‘라는 명제를 ’대부분의 백조는 하얗다’라는 식으로 고쳐야할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믿는 영역에서, 아직도 보지 못하고 놓치는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영역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기존의 과학체계도 그렇다. 만약에 새로운 것이 발견되더라도 그것이, 법칙으로 구성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유지되다가 반증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폐기하기에는 위험이 크지만, 버려야할 것을 버리는 것도 맞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의 법칙이 아니라 다양하게 예외로 두어서 적용한다면, 우리는 상대주의라는 감옥에 시달릴 것이다.
항상 맞는 체계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준은 법체계 안에서의 자유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도덕과 양심의 영역도 있다. 우리는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동시에 법을 어기지 않으면, 비난을 받지만 형벌을 받지 않는다. 도덕과 양심의 영역은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영역이다. 그러나 법은 절대적으로 적용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절대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절대적인 법칙을 무조건 신봉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과연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과학이란 분야는 참 난해한 것 같다.
저자는 우리가 ‘혁명’이 아니라 ‘진보’를 통해서 과학이 이루어져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혁명이 이루어지게 되면, 기존의 이론 체계는 모두 폐기처분되어 버린다. 하지만 진보되어 나간다면, 기존의 이론 체계를 흡수하는 동시에, 새로운 체계가 세워져서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예로 플로지스톤 이론을 들었는데, 화학의 혁명을 일으킨 라부아지에와 프리스틀리의 플로지스톤 이론이 맞붙어서 라부아지에가 승리를 거두고 만다. 만약에 라부아지에의 이론뿐만 아니라, 프리스틀리의 이론을 어느 정도 참고하면서 화학이 발전해 나갔더라면, 더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쿤은 일원주의적 사고로 패러다임의 독점설을 내세웠다. 정상과학상태에서는 각 과학 분야에서 패러다임이 한 개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저자는 과학자들이 패러다임을 일원화하려고 경쟁하지 않아도, 정상과학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패러다임의 일원화를 이끌기 위해서, 과학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경쟁 패러다임이 아닌, 다원주의적 사고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상생활에서 태양계까지의 규모는 뉴턴역학을 사용하고, 규모가 아주 작아지면 양자역학을 적용하며, 규모가 매우 커지면 일반상대성이론을 사용하며, 속도가 빨라지면 특수상대론을 사용한다고 한다. 물론 상대론적 양자역학을 잘 세우게 되면, 필요한 모든 내용을 표현할 수 있지만, 다루는 대상이 복잡해질 때 계산이 힘들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기에 효율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법칙이 조금 어긋난다고 해서 그 법칙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원주의적인 사고를 갖추어야 한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물리와 화학의 과학혁명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되어 있는데, 지구과학과 생물에 대해서는 부족한 것 같다. 화학분야는 정말 세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물리는 그렇지 못하다. 저자의 다음 책이 기대된다. 다음 책에서는 다른 분야에서도 흥미롭게 설명해주셨으면 한다.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http://blog.naver.com/young92022/220208936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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