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비타민 -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내가 바뀌는
도마스 아키나리 지음, 전선영 옮김 / 부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철학비타민

 

이 책은 과거 고대 철학부터 현대 사상까지 한눈에 정리한 철학이야기이다. 깊이가 있는 수준의 책을 원하신다면, 이 책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초심자를 위한 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서술된 모든 부분이 이해하기 쉽다고는 못하겠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마음에 들었던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의 서술 부분이다. 철학의 모든 부분을 알 수는 없지만, 철학에 어느 부분을 관심을 가지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처음부터 벽이 높으니, 우리는 다가기도 힘든 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자신이 철학사를 쭉 읽어보고 어느 철학자가, 자신에게 맞는지 파악하고, 그 철학자가 저술한 원작을 읽어보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질료는 재료이고, 형상은 재료로 만들어지는 구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질료가 구리라면, 구리로 만들어지는 동전, 조각상, 컵 등은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을 질료인, 형상인, 동력인, 목적인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자면, 집을 지을 때 필요한 목재나 기왓장 같은 재료가 ‘질료인’이다. 집을 지을 때 필요한 설계도가 ‘형상인’이고, 집을 짓는 목수나 인부가 ‘동력인’이며, 만들어진 집에 들어가서 살 수 있어야한다는 최종적인 목적이 ‘목적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최고선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한다. 최고선이란 곧 행복이다. 앎을 추구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앎으로 인해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앎 그 자체가 행복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중용이란 다양한 감정에 대해 지나치게 강하거나 약하게 반응하지 않고 그 중간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습관으로 완성시킬 수 있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

종래의 철학은 객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러한 철학에 대해 회의를 갖은 것이 키에르케고르이다. 내게 진리인 진리(주체적 진리) 즉, 내 생활에 정말 깊은 의미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인간은 실존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나 자신은 타인과 바꿔치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존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지만, 이 병에 걸리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동물보다 나은 존재이다. 절망하기에 인간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실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실존을 단계에 따라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한다.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의 질적 변증법을 주장한다. 미적 실존은 쾌락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하루하루 즐거움을 추구하더라도, 어느 순간 그 즐거움에 대해 지루하고 우울하게 된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윤리적 실존이란, 양심과 도덕에 맞추어 사는 인생을 지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앞의 두 단계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인이므로 마지막 단계인 종교적 실존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런 실존의 단계가 헤겔의 변증법을 질적으로 비판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즉자(아직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자(즉자의 원래 다른 상태로 바뀐 두 번째 단계) 그리고 즉자적 대자(즉자와 대자의 대립을 지양한 새로운 것으로, 갈등이 통일되어 완전한 상태로 정리되는 단계)로 나아간다. 하지만, 대자에서 바로 즉자적 대자로 넘어갈 수는 없는 단계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을 하지 않더라도, 종교적 실존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변증법을 비판하는 것이다. 물론, 종교적인 가치가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가치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에 따라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이 완전 틀릴 수 도 있다.

 

니체

“아무리 자신의 인생이 고통스럽더라도 몇 번이건 그것을 받아들인다.” 운명애의 철학, “원한을 품지 말라! 비뚤어지지 말고 똑바로 나아가라!” 니체는 ‘힘을 향한 의지’에 대하여 주장한다. 만약에 누군가가 무단횡단을 통하여 급하게 길을 건너고,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게 무단횡단을 하지 말라고 도덕적으로 훈계했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니체는 결국 두 존재 모두가 ‘힘을 향한 의지’로 인해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무단횡단한 사람은 급하게 어떤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훈계한사람은 도덕적으로 더 높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더 높은 존재가 되는 것과 더 많은 힘을 갖는 것을 원한 것이다. 이것이 ‘힘을 향한 의지’이다. 힘을 향한 의지가 삐뚤어져 우리는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이 생기고 만다. 이러한 르상티망으로 인해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다. “지금 자신은 불행할지 모르지만 신의 나라에서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독교를 비판한다. 누군가의 성공이나 행복 그리고 무엇인가를 시기하는 마음은 ‘힘의 향한 의지’가 비뚤어져 르상티망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마음이 계속 생겨나면, 결국 이 인생은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탄생하고, 천국이라는 허황된 곳을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이 죽었다는 한마디에, 모든 철학은 분쇄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영원한 존재‘를 바라는 바람(르상티망)이 만들어낸 망상이 되고, 기독교의 신도 마찬가지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도 “내가 가난하므로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망상이 되고 벤담의 공리주의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도 인간을 평균화하고 싶다는 르상티망에서 나온 발상이 된다. 이러한 발상은 참된 세상이나 진리가 없다는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로 나아간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를 건너질러 매어 놓은 한 줄기 밧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 깊숙이 용솟음치는 ‘힘을 향한 의지’가 있다면 현실의 사회에서 방해받아 잘 풀리지 않을 때도 끄떡없다. 어떤 인생이든 등을 돌리지 않고 견디며 상황을 원망하지도 않고 그 운명을 사랑하는 굳센 인간. 이것이 초인이다. 초인은 신을 대신하는 궁극의 가치다. 딱히 지금 자신이 초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그런 존재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노력하며 살면 된다는 것이다. 초인 사상은 니힐리즘을 뛰어넘어 인생을 최고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너는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 온 이 인생을 한 번 더, 더 나아가 무수히 되풀이하며 살아야만 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영원회귀’라는 사상을 표현한 구절이다.

끝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일은 다 일어나고 만다는 사상이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빅뱅으로 우주가 태어나고 지구가 생겨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언젠가 우주가 소멸하고 다시 우주가 생기는 것을 되풀이하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히 똑같은 유형의 지구와 인류의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바보 같은 말로 들릴지라도 어쩌면 우리는 같은 인생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수없이 여러 번. 니체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긍정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만약 조금도 다름없이 지금의 인생이 되풀이될 때, 그래도 “이것이 인생이었던가! 좋다. 다시 한 번 살아 보겠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인생이 영원회귀된다면,

또 다시 살아보겠는가?

 

 

하이데거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를 사유하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원래 현상학이라고 불리는 분야에 속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삶의 자세를 말하는 부분이 부각되어 실존주의로 분류되고 만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 일상을 둘러싼 환경 세계에 먼저 나타는 것이 ‘도구’이다. 그리고 이런 도구는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OO을 위해서라는 식으로 서로 지시해서 하나로 연관을 맺고 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서, 못은 널빤지를 고정하기 위해서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도구 연관’을 성립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염려(Sorge)이다.(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불렀으며 ‘염려’도 하이데거 철학에서 현존재의 존재 양식을 설명하는 철학 용어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염려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내일 비가오니 우산을 챙겨야지라는 식이다. 왜 우산을 준비하는가? 젖기 않기 위해서, 혹은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내일도 무사히 있고 싶다.” 자신의 존재를 염려하기에 도구가 쓰이는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유의미성’이라고 한다. 오늘 밤에 심장마비로 죽는다면 우산은 필요가 없다. 세계란 인간의 염려에서 시작되어 연결되는 거대한 의미의 틈새기와 같은 것이라고 하이데거는 생각했다.그런 틈새기가 풀려서 알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리하여 생기는 것이 불안이라고 한다. 두려움이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어쩐지 불안하거나 아무튼 불안하거나 한다면, 대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하이데거는 “불안은 무(無)를 드러나게 한다”라고 표현한다.

 

 

하이데거는 대중 사회 속 안일한 일상에 젖어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사람을 ‘다스 만(das Man,일반적인 사람, 일상인)이라고 한다. 연예인 누가 음주운전을 냈다더니, 누가 바람을 피웠다는 등하는 소식에 눈을 돌리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왜 자신의 존재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이 죽는 존재라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을 아는 듯해도 사실을 잘 모른다. 타인의 죽음을 알아도 그것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토막살인되서 죽었대.”라고 신문에서 보고 수다를 떤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자신의 죽음은 누구와도 교환할 수 없다.(교환 불가능성)

2. 고독해진다.(몰교역성)

3. 반드시 죽는다.(확실성)

4.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무규정성)

5. 마지막에 온다.(추월 불가능성)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이렇다.

1. 자신의 죽음만은 아무도 대신하지 못한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죽음에서 시선을 피하고 있을지 모른다.

2. 죽음이란 이제 아무와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3. 게다가 누구는 죽고 누구는 죽지 않는 불확실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4. 덧붙여 언제 죽느지, 날짜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당장 1초후에 죽을 지 몇 년 후에 죽을지 아무도 알 수없다.

5.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에 찾아온다. 죽음을 앞서 치르고 살 수 없다. 어김없이 마지막에 올 것이다.

 

 

죽음을 향하는 존재, “자신의 죽음을 피하려 하지 말고 마주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이나 막연하고 있는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것이 현상학이다. 어처피 죽을건데 왜살아?라는 생각을 갖을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인 자신을 감추려고 사람들이 일상성에 파묻혀서 얼버무리며 살고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움츠려들지 말고, 감추지도 말고 자신이 ‘죽음을 향하는 존재’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한다. 죽음을 받아들일 각오를 함(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으로써 우리는 ‘다스 만’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신(실존)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여라.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한 순간이 소중해진다. 만약에 영생이 가능하다면, 이 순간, 오늘, 그리고 내일이 소중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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