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돌리노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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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바우돌리노가 처음 나왔을 때 썼던 북리뷰 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북리뷰로는 처음 썼던 것이기도 하구요.)

 일천한 분야에 손을 대려니까 두렵기도 하고, 결국 잡식성 취향이 여기까지 손을 뻗었느냐는 힐난도 들리는 듯하군요. 그러니 제가 잘 아는, 안전한 방향으로 가야겠죠. 바우돌리노 자체보다는 '작가' 에코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영화에서의 작가주의를 슬쩍 들여올 생각입니다.

에코는 참으로 특이한 인물입니다. 소설과 잡문과 시사평론과 학술서를 종횡무진하는 다작+잡식성 저작, 수많은 인용과 패러디의 향연으로 구성되는 현학 등이 그를 특이한 작가-학자로 자리매김하는 근거가 되겠지요. 그러나 그는 동시에 동시대 최고의 정통(orthodox) 기호학자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들은 그의 소설들입니다. 제가 읽어보지 않은 '전날의 섬'을 제외한 세 작품 - 장미의 이름, 푸꼬의 진자, 바우돌리노- 는 모두 동일한 주제 하나를 위해 복무하는 일관성 하에 쓰여진 작품들입니다. 그것을 영화적 개념에서 차용해 정의한다면 일관된 주제의식과 연출방향을 가지고 있는 감독- 다시 말해 '작가주의'라 할 수 있겠지요.

무슨 근거에서 세 소설이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단언하는가. 그 소설들은 모두 문학개론 1장 1절에 있는 소설의 정의, 즉 허구적인 이야기(fiction)에 대한 메타소설(meta-fiction)인 동시에 기호학의 1장 1절, 즉 '기호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설명해주고 있는 학술적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세 소설은 모두 실제 유럽 역사-특히 이태리- 속에 소설적 허구들을 절묘하게 배치해내고 있습니다. '장미의 이름'이 중세의 수도원과 마을간의 주종관계, 그리고 수도원의 생활사를 치밀하게 묘사해내면서 그 속에 가상의 서적-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곡-이야기를 끼워넣었다면, '푸꼬의 진자'는 전 유럽의 비밀결사 전통에 대해 거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방대한 역사적 현학을 보여주면서, 사실은 이들이 모두 푸꼬의 진자,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는 세상의 중심을 찾아 다녔다는 허구를 밀어 넣습니다.  '바우돌리노' 역시 마찬가지여서, 프리드리히 대제 시대의 역사 뒤안에 그 모든 역사적 사실들을 만들어 낸 바우돌리노라는 인물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우돌리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소설속 기록자의 입을 빌려 이런 그럴싸한 거짓말들이 자신의 소설세계임을 밝힙니다. ("언젠가 바우돌리노보다 더한 이야기꾼이 나타나서 이런 거짓말들을 들려줄걸세.")

재미있게도 이 소설들은 모두 허구적 대상을 찾아 죽을 고생을 하며 헤매는 모험소설 형식을 갖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곡, 푸꼬의 진자, 요한 사제의 왕국으로 각각 대표되는 이 허구들은 그러나 실제로는 사라지거나(희곡), 없는 것을 재현해 내거나(진자),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왕국). 주인공들은 모두 이것들을 획득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이것들은 기호이지 그것이 표상하는 사물 자체가 아니니까요.

기호와 사물간의 관계가 벌어지는 성향은 최근작으로 올수록 점점 더 심해집니다. 속되게 말해 뻥이 점점 심해지다는 말이지요. '바우돌리노'는 전체가 '뻥'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연대기형식을 띄고 있고, 각 소제목들은 그 장의 바우돌리노의 행적을 간단히 말해줍니다. 이를테면 '바우돌리노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성배를 찾다'는 식이죠. 그러나 그 내용들은 이 소제목들을 배반합니다. 거의 모든 바우돌리노의 행적은 자신이 조작하거나 만들어낸 것들이지요. 이를테면 성배는 자신의 아버지의 잔이고, 찾아냈다는 요한사제의 왕국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 유지 수단으로 만들어진 가짜 왕국이고, 동방박사의 유해도 모두 가짜입니다. 소설의 후반부에는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 퍼진 가짜 성물들을 주인공 일행이 만들어내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프리드리히 대제의 살해 또한 알고 보니 허구적 사실임이 밝혀집니다. 재미있게도 이 모든 조작 사건들은 악의가 아닌 그럴듯한 정당성을 부여받은 상태에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결국 수많은 일들을 역사 막후에서 해 낸 것처럼 보이는 바우돌리노는 한 번도 진정한 업적을 이뤄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사서에 남을 수 없었고, 결국 그의 일대기를 듣던 사가 역시 이를 사서에 등재하기를 거부합니다.

그 소제목들이 기호라면, 그 기호들은 소설속 사건이나 내용, 즉 기호가 표상하는 사물들이 아닙니다. 많은 사회학자, 기호학자들이 지적하듯 이러한 경향은 현대의 지배적인 현상 중 하나이고,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지요. 에코는 이러한 현실을 '가벼운' 소설의 틀을 빌어 비판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코에게 그런 냉소주의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다시 '희대의 뻥장이'에게로 돌아가 보면, 바우돌리노는 그 기호들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에 끈질기게 집착합니다. 그런 모습은 이미 현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지요. 현대인들은 기표와 어긋나는 기의들에 대해 냉소하거나,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을 따름입니다.

아마도 에코는 그런 바우돌리노의 어리석은 모습이 결국 이성적인 것만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고, 모험가나 허구의 모험가인 소설가(둘 다 현대에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아 버린!)의 운명 아니겠냐고 이야기하는 듯 싶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우돌리노가 이순의 나이에 '실재하지 않는' 요한사제의 왕국으로 다시 길을 떠나는 소설의 마지막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에코는 실제 바우돌리노의 고향인 알렉산드리아 출신이고, 역시 환갑을 넘겼으며, 희대의 이야기꾼이 아닙니까? 아마도 이 장면은 그에 대한 세간의 비난, 그러니까 현학만 있고 따뜻한 가슴은 없는 차가운 소설들을 쓴다는 험담들에 대해 날리는 그의 대꾸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몽상가의 발걸음이 어디에 가 닿을 지를 살펴보는 건 정말로 멋진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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