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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몬스터
김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한겨레21에서 가장 읽을만한 칼럼은 언제나 맨 뒤에 실리는 비장미 넘치는 시사컬럼이 아니라 1/2쪽에 불과한 김경의 칼럼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저없이 그녀의 칼럼집을 사게 되었다. 비록 절반 가까운 내용이 이미 한겨레21에서 읽었던 것이지만 다시 읽어도 그녀의 글은 매력적이다.
스스로 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녀는 화려한 패션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면서도 '주렌더' 같은 영화속 패션계 종사자들처럼 멍청이가 되기에는 너무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늘 중간자적인 자신의 위치와 그것으로부터 자주 불거져 나오는 모순에 대해 고민한다.
거의 동시에 나온 그녀의 인터뷰집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직업적 세계에 더 가깝다면, 이 칼럼집은 조금 더 인문학도로써 정치와 사회를 읽어내는 본질적인 그녀에 가깝다. 그래서 두 책은 각각 다른 저자소개명을 표지에 달고 있다. 인터뷰집은 '바자 피쳐 디렉터 김경'으로, 이 칼럼집은 '한겨레21 칼럼리스트 김경'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 직함은 당연히 그녀 자신이 붙인 것일테지. 그녀는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
물론 다중인격자가 아닌 그녀는 완전히 분리되진 않는다. 인터뷰에서도 그녀는 곳곳에서 예리한 인문교양에 기반한 이성적인 사고를 드러내고, 칼럼집에서도 와인 이야기를 하거나, 남성 슈트에 대한 일장 강의를 할 때에는 영락없는 패션지 기자의 모습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두 책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성공한 자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에게서 지워졌던 모순, 혹은 인간적인 측면이 칼럼속의 김경에게서는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가? 그녀가 인터뷰했던 많은 인물들이 이른바 '자수성가형' 인물들이다. 지독하게 어려운 시절을 겪고 성공해서 상류사회로 편입된 사람들, 그러나 불과 한두시간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예전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의 '차이'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드러내지 않는다. 환상을 부추키고 남루한 현실을 최대한 감추어야 하는 패션지의 특성 탓인지 이 인터뷰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쿨'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현재에 대해 너무나 만족하고, 가난하고 신산스러웠던 과거를 그냥 단지 성공을 위한 디딤돌 정도로만 여긴다.
반면 칼럼속의 그녀는 끊임없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인문학, 혹은 정치과잉의 홍수를 겪어왔던 과거의 자신과 현재 청담동 사회에서 화려한 삶을 목격하거나 혹은 동참하는 자신간의 괴리, 혹은 모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래서 유독 그는 인터뷰에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성장기에 대해 자주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망가져버린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때로는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자의식을 상기하고, 때로는 '이렇게 쿨하게 사는 것이 왜 나빠?' 라고 역으로 물어보면서. 이게 바로 '사람'이다. 칼럼집의 발가벗겨진 김경에게서는 너무 완벽한 인터뷰이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사람 냄새가 난다.
내 생각인데, 실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녀는 이 칼럼집에서 밝히듯이 명품에 대해 그렇게 초연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건 그녀의 남아있는 자의식이 만들어낸 일종의 심리적 방어벽일 뿐, 실제의 그녀는 아마도 가끔씩 너무나 아름다운 디자이너 부띠끄의 상품에 넋을 잃고 지갑을 열곤 할 것이라고 추측된다. 만일 그녀가 정말로 정말 명품 따위는 바보같은 사람들의 소비행태일 뿐이라고 콧방귀를 뀌며 살아간다면 난 다소 실망할 것이다. 그건 이 칼럼집 내내 그녀가 보여준 솔직함과 거리가 멀다.
고백하건데 이 칼럼집이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적당히 먹물티 내고 적당히 벌어 가끔 터무니없는 소비를 즐기면서도 마음속 어딘가엔 늘 90년대 초반 박혀버린 어떤 원죄의식같은 걸 담고 살아가는 (그리 많지않은) 부류. 아, 그러고보니, 그녀는 나와 동갑이다. 반가워, 김경.
*재미있게도 그녀는 최근 책 홍보를 위한 인터뷰에서 내가 바로 이 책 다음에 읽었던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노대통령에게 추천하고 있다. (이 책 역시 나도 추천하는 바이며, 리뷰도 썼다) 나만큼이나 이 여자의 취향도 잡식성이다. 정말 닮은 꼴인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