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 폴 - 3집 국경의 밤
루시드 폴 (Lucid Fall) 노래 /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Stone Music Ent.)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돌아온 미선이라고 제목을 붙이긴 했지만, 사실 이 앨범이 그런 말을 듣는다는 건 모독이다.

미선이로부터 10년. 조윤석은 끊임없이 그러한 말을 들어 왔다. 미선이로부터 남은 것은 서정적인 감성이고, 잃어버린 것은 날이 선 비판의식이라고.

그러나 그는 그에 개의치않고 계속 음악을 해 왔다.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있었지만 그의 음악에는 늘 어쿠스틱 기타가 중심에 있었고, 거기에 가끔 얹혀지는 날아갈듯한 경쾌한 셔플링의  드럼연주도 그 느낌을 바꾸진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를 세상에 알렸던 '송시'가 그의 곡으로는 이례적으로 훅(hook)을 갖춘 강렬한 곡이고, 그를 더 많은 이들에게 소개했던 '그대 손으로'가 앞에서 말한 댄서블한 리듬의 모던록이었음에도 그는 오히려 이런 곡들을 갈수록 더 만들지 않았다. 루시드폴의 두 번째 앨범은 첫 번째 앨범보다도 더 소박하고 더 단촐했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인터뷰들(우리의 책을 포함해서!)에서 묻는, 아니 기대하는 '미선이 시절의 날카로운 사회비판'에 대해 그것은 그 때의 생각과 느낌을 담았을 뿐, 지금의 자신에게 그것을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자주 자신을 낚시꾼에 비유했다. 조용히 곡이 써질 때까지 기다리는 강태공.
(그는 그 낚시하는 동안에 세계최고수준의 공대에서 연구를 계속해 세계 최고수준의 논문을 썼다. 이 정도면 낚시꾼으로는 아마도 세계 최고가 아닐까^^)

그리고 루시드폴의 세 번째 앨범, 그러니까 그의 네 번째 앨범에서 그는 비로소 세상에 대해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 앨범의 절반을 지날 때까지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통기타 하나를 들고 조용히 삶에 대해, 자신의 내면에 대해 읆조린다.
(그의 이번 앨범이 지겹다고 한 어느 신문기자는 아마도 여기까지 듣다가 포기한 것 아닐까)

이 초중반부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서정적이고, 루시드 폴의 이전 앨범들과 다를 바 없는 감수성을 보여주지만, 여기에 무언가 더해진 것이 있다. 그의 삶에 큰 충격을 주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선이 결성 당시 초기 멤버이자, 미선이의 정식멤버 김정현의 형, 그리고 미선이 앨범의 '두번째 세상'에서 랩을 했던 김정찬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던 그의 죽음은 조용히 낚시를 하던 그를 세상으로 불러냈고 곡을 쓰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쓰여진 곡들에는 짙은 슬픔이 배어난다. '국경의 밤'이나 '노래할께'에는 슬픔을 덤덤하게 억누르고 서정으로 승화시킨데서 나오는 감동이 있다.

그리고 앨범이 중간을 넘어서는 순간 나타나는 놀라운 반전. 그는 아홉번째 곡 '키드'에서부터 세상, 정확히 말하면 그 속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참으로 오랫만에 듣는 특유의 경쾌한 리듬을 타고 루시드폴은 어느 아이에게 다가가 이야기한다. 그 아이는 흑인 혼혈아일수도, 동남아 아이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살아가는 곳은 '대한민국'이다. 그 아이가 받는 대접도 그는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어리석은 눈빛이 아이를 경멸하고, 주먹이 날아오고, 차별은 일상이 된 곳. 그리고 루시드폴은 그 지옥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아이에게 노래해준다.

'너는 똑똑하다.
 너는 건강하다.
 너는 아름답다'


누구보다? "대한민국보다"라고 루시드폴은 담담하게 말해준다. 근 10년간 한국 주류가요는 물론 인디에서도 듣기 힘들었던 이 놀라운 가사는 그것이 담겨있는 서정적인 멜로디와 절묘하게 대위법을 이루며 영혼과 가슴으로 바로 다가와 호소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첫 데뷔앨범 '미선이'에서 사람들이 '우리 음악의 미래'를 봤던 바로 그 놀라운 음악적 감성은 다시 재현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건 시작일 뿐이다. 그는 작심하고 다음 두 곡을 계속해서 세계화의 그늘인 차별, 그리고 그 결과로 이방인들이 이 지독한 나라에서 겪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이앤트 메리와 함께 한 '라오스에서 온 편지'는 이방인이 이 나라에서 겪는 고통과 그 속에서 싹트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앨범의, 그리고 올해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빛나는 트랙인 '사람이었네'가 이어진다. 아마도 세계의 어느 뮤지션도 이렇게 서정적으로 '세계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자체가 시(詩)인 아름다운 가사를 아래 싣는다. 

어느 문닫은 상점
길게 늘어선 카페트
갑자기 말을 거네

난 중동의 소녀
방안에 갇힌 14살
하루 1달라를 버는

난 푸른빛 커피
향을 자세히 맡으니
익숙한 땅, 흙의 냄새

난 아프리카의 신
열매의 주인
땅의 주인

문득, 어제산 외투
내 가슴팍에 기대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난 사람이었네
어느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공장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자본이란 이름의, 세계라는 이름의, 정의라는 이름의, 세계라는 이름의, 정의라는 이름의, 개발이란 이름의,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그 서정과 날선 비판을 동시에 갖춘 가사를 실어나르는 음악 역시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후렴구인 '사람이었네'의 짧은 구절만으로도 그는 자신이 최고의 멜로디메이커 중 하나임을 가볍게 증명해낸다. 

그리고 그 멜로디와 가사를 전달하는 그의 보컬은 속삭이는 것처럼 자신의 음역을 넘지 않고 가볍게 노래한다. 당연히 여기에는 나얼과 같은 초절정기교의 감동 만땅 보컬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 브라운아이드 소울 2집도 사서 하는 이야기이다. 역시 훌륭하다. 그러나 이 앨범을 듣다 그 앨범을 들으면 뭔가 거북하다) 또 여기엔 화려한 연주도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음악의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본질은 아니라는 것은 이 앨범, 특히 그 중에서도 백미인 '사람이었네'를 들으면 거듭 느끼게 된다. 가장 중요한 음악의 본질은 사람의 영혼과 가슴에 다가가 그 영혼을, 가슴을 움직이는 것이다.  

참으로 영민하게도 그는 이 곡을 들은 사람들이 느낄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이어지는 닫는 곡 '당신 얼굴, 당신 얼굴' 다음에 히든트랙으로 다시 '사람이었네'의 extended version을 실었다. 원곡보다 두 배가 길어진 '사람이었네'는 듣는 이를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탕(미안하다. 감성이 메마른 나는 이런 유치한 표현밖에는 이제 머릿속에 남은 것이 없다)으로 몰고간다.

곡이 기니, 가사가 좀 더 길다. 2절은 이렇다.

붉게 화려한 루비
발가벗은 정열이 되어
돌처럼 굳은 손을 내밀며
내 빈 가슴 좀 보라고

난 심장이었네
탄광속에서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난 심장이었네
어느날 문득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자본이란 이름의, 세계라는 이름의, 정의라는 이름의, 세계라는 이름의, 정의라는 이름의, 개발이란 이름의,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난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사람이었네


그리고 이 애절한 호소를 이어가면서 앨범은 끝을 맺는다. 감동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나를 비롯해 참 많은 사람들이 '성질급한 한국인'답게 그를 몰아붙여 왔다. "대체 왜 미선이 시절의 그 놀라운 감성과 이성의 결합"을 보여주지 않는 거냐구. 그럴 때마다 그는 선승처럼 '낚시를 하면서 기다린다'고 답해 왔다. 그리고 십 년. 그는 여기서 그의 십 년간의 기다림이 전혀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이렇게 자랑스럽게 제출하고 있다. '미선이'에서 볼 수 없었던 성숙함과 깊이가 더해진 이 트랙들은 그에게 성급하게 이야기했던 나를 참으로 부끄럽게 만든다. 그는 이렇게 '희망'에서 '대가'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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