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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ㅣ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고르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청춘의 문장들'을 펼치자 마자 단숨에 아우토반으로 달린 다음 숨을 고르느라 앤소니 버클리 콕스의 추리소설 '독초콜릿 사건'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런 문장이 나오더라. '기억은 쉽게 사라져도 편견은 오래 남는다' 그러고 보면 나는 김연수에 대한 어떤 편견이 있는 거 같다. (작가나 팬 모두 너그럽게 봐주시길)
내 경우 장르는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읽으면서도 작가에 대한 호불호는 심하다 싶을 만큼 극명하게 갈리는지라 '특기'가 '독서'인 사람치고는 대표작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고 건너띄는 작가가 많은데, 사실 김연수도 그런 운 나쁜 케이스에 속한다.
아무 생각없이 단편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읽다가 내 취향이 아니길래 다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내 취향이 아니라는 편견은 지금까지 강하게 남아 있지만 도대체 그 글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부끄럽다) 단 한 문장도 생각이 나지 않는 거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김연수에 대한 미씸쩍은 불안은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지만 그래도 '청춘의 문장들' 이 수필집만큼은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한 문장, 한 문장들이 편견을 뛰어넘을 정도로 너무 많아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가끔 들리는 맥주집 바에 앉아 좋아하는 버드와이저를 (그것도 3병이나) 마시며 읽어서 그런 걸까.. 애초에 내 편견이 옳지 않았던 걸까.. 다시 꼼꼼히 읽어보는 수 밖에 없다.
요즘 세상은 박민규의 표현처럼 너무 '쿨하고 자빠져서' 때로 세상 다 산 늙은이들처럼 그래도 옛날이 정답고 좋았어, 라는 착각을 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 이런 청춘의 환영같은 책을 만나면 갑자기 억장이 무너지면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 구식의 문장들 하나하나가 눈에 와 밟히고 어느새 그 시절 그 골목길을 울면서 달리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마치 고향을 떠나온 다음 소식이 끊겼던 옛친구를 만난 거처럼 반갑고 소중하고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애닯고 애틋한 그런 마음들..
그 시절에는 즉석 떡볶이 가게에서 떡이 불어터질 정도로 떨리는 가운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만나 데이트를 했고, 음악다방 dj 인혁이 하는 팝송강좌를 들으면서 녹음 테잎을 가지고 공부했으며, 아직 김광석이 살아있을 때라 대학 캠퍼스에서 그가 부르는 청승맞은 노래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미덕은 그런 과거를 되살려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세월이 지난 다음 돌아온 청춘의 화살을 다시 그 시절로 되돌려 보내는 작가의 담담한 포즈에 있는 거 같다. (쓰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매 펙트마다 따라오는, 작가의 취미라는 고상한 한시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드는 지도.. 한시가 이렇게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다는 사실.. 예전엔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하긴 나이가 들고보니 예전엔 미처 몰랐던 거 투성이다. 지긋지긋해서 도망치듯 떠나온 D시가, 그 곳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친구들과 친척들이, 그리고 추억들이 때때로 너무 그리워서 가슴에 암덩어리가 올라온 거처럼 몹시 뻐근하다. 왜냐하면 빚이 있는 자는 언제나 마음이 무거울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곳에 내 청춘을 저당잡혔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김연수는 인기있는 작가라도 되서 기가 막히게 멋진 청춘의 문장들로 그 시절을 찾는 데 성공했지만 나는 그 놈의 청춘을 전당포에서 되찾아오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지불해야 좋을지 아직도 모르겠다. 설령 맡겨둔 그 값어치보다 더 비싼 이자를 호되게 치르더라도 언젠가는 유전기간이 끝나기 전에 내 청춘들이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기억은 쉽게 사라져도 편견은 오래 남는다'라는 문장으로 처음을 연 거처럼 역시 한 문장으로 끝을 맺어보자. 작가의 말처럼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내)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참, 쓰다보니 너무 감상적으로 흐른 이 글을 읽은 나머지 쉬- 김연수의 문장들도 감상적일 거라는 편견을 가지지 않을 지 걱정이 드는데, 염려 붙들어 놓으세요. 책 날개에 나온 프로필을 그대로 옮기자면 '전적으로 이과에 적합하게 태어난 냉철한 머리가 그만 이상과 김수영과 김지하의 시를 읽으면서 이상해지기 시작해 대학에 들어갈 때는 수많은 문학과 중에서 천문학과를 택했다가 결국 영문학과에 들어가게 됐다'지만 '드넓게 바라볼 때, 두 과 사이에 별 차이는 없었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