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만필
황인숙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황인숙의 세 번째 산문집 <인숙만필> 제목부터 웃기지 않은가. 김만중의 <서포만필> 패러디라니! 마음 내키는 대로 쓴 우스꽝스러운 글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산문집은 거의 만담 수준을 지향한다. 좌석버스에서 읽으며 집으로 가는데 어찌나 웃어댔는지.. 솔직히 말하면 시인이 쓴 시집 아닌 책들은 대체로 재미가 없다. <나는 고독하다> 였나, 황인숙의 첫 번째 산문집도 그냥 그랬는데 이번 껀 놀랍다. 시집에서 느꼈던 특유의 발랄함이 그대로 살아나 있던 것이다.

나는 시집만 보면 그것도 특히 결혼도 안 한 전업시인의 시집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내 삶이 더 불쌍한데도 그깟 시 나부랭이 써서 먹고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돈도 얼마 못 버는 주제에 집어들고 마는 것이다. 학교다닐 때 <나의 침울한 이여, 소중한 이여> 까지 읽은 후 오랫만에 황인숙의 산문집을 사면서 그동안 시집을 영 안 봤구나, 그녀의 팬으로서 약간 가책을 느꼈는데 책 날개를 보니 웬걸. 98년 <나의 침울한 이여, 소중한 이여> 가 시집으론 마지막이다. 생각해보니 언제나 젊을 거 같은 황인숙도 마흔을 넘긴지 오래. 이십대엔 연애를 하고 삼십대엔 시를 사십대엔 소설을 쓰라는 말처럼 나이가 꽉 차서도 시를 쓴다는 건 무지 힘들 것이다.

아, 비천하게도 나는 아씨 체질인 것이다. 처지는 비록 아씨를 모셔도 시원치 않을지라도
- 나의 맹세 中 에서

아씨를 모셔도 시원치 않은 처지에 체질이라고 외치는 황인숙. 그녀는 여전히 가난하지만 정신의 귀족이고 고매한 아씨다. 비록 직업이 없어 늘 가난한 데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책을 읽고 시를 쓰며 친구가 쓰다 버린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다고 하지만. 뜬금없는 얘기지만 나는 늘 사자 갈기머리를 한 여자들에게 약한 편인데 예를 들면 헬레나 본햄 카터나 니콜 키드만같은 여자들 말이다. 단정하지 못하고 부스스한, 늘 제멋대로 뻗치는 파마머리의 여자를 보면 거지같은 세상이지만 절대 굴복하지 않을 자신감을 엿보는데, 황인숙은 자신의 머리도 그녀의 영혼처럼 또한 시처럼 자유롭게 풀어놓은 거 같아 마음에 든다.

그녀의 첫시집 <새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를 읽고 딱딱한 우리 말들을 그렇게 시로 자유롭게 풀어놓은 데 얼마나 감명을 받았던가. 그 발랄하고 상큼하기 짝이 없는 시어들! (이렇게 밖에 표현 못 하는 내 글빨이 암울하다) 그런데 이번 산문집에서도 그 감명을 그대로 돌려 받았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엉뚱한 구석이 딱딱한 글 속에서 톡 톡 튄다.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는 자신의 습관을 말하다 교회 얘기로 새고.. 그러다 어릴적 친구 얘기로 순식간에 공간이동하는 식이다. 눈치도 못 차린 사이에 이 얘기에서 저 얘기로 끌려다니다 보면 어느새 낄낄 거리면서 웃고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여전히 그녀는 마흔을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얼굴을 가져야 한다는 그 나이에 엄숙한 게 자신없고 어른이 어렵다고 쩔쩔매는 철없는 소녀다. 그러나 순수하기 때문에 책 앞표지에 쓰여진 그대로 <인숙만필> 이라는 이 산문집은 '기품 있는 한 영혼의 엉뚱하고 천진한 생활의 발견'이다. 사는 게 몹시 지루하고 따분하고 한심하고 뚱뚱하다 느낄 때 보기만 해도 산뜻한 표지를 가진 이 얍삽한 책을 펼쳐 보라. 외롭지만 고매한 영혼을 가진 한 노처녀의 대책없는 수다에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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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14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인숙씨의 팬을 만나니 정말 반갑네요^^

로드무비 2004-10-14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노래도 잘 듣고 왔어요.^^

히나 2004-10-19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달전에 인사동에서 어두컴컴한 밤에 책을 읽으며 걷는 이상한 여자를 봤어요.. 누군가 해서 봤더니 황인숙씨더군요. 저도 황인숙씨 팬 만나서 반갑습니다. ^^

릴케 현상 2004-10-20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어쩐지 황인숙씨다운 느낌이네요. 저는 고종석씨랑 데이트하는 모습은 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