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법칙 - 함께 승리하는
존 맥스웰 지음, ㈜웨슬리퀘스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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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세기의 인간관계론은 카네기가 도맡았지만, 21세기의 인간관계론은 이제 맥스웰이 전담할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탑리더 중의 하나로서 명망이 높았던 그이지만(명성 높은 대형교회인 스카이라인 교회의 담임 목사 역임), 작금에 와서는 리더십 전문가요 사업가(INJOY 그룹의 설립자)로 더 명성이 높은 맥스월은 이제 자신의 교육 사업을 리더십에서 포괄적인 인간관계로 확장하고 있다. 마치 화남금녀의 존 그레이가 남녀애정상담에서 인간관계교육으로 확장해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맥스웰의 소통능력의 탁월함은 명확한 표현력과 체계적 구성력, 그리고 풍부한 사례제시에 기인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삶을 통해 체화되고 검증된 것들을 전달하는 데에서 그의 탁월함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맥스웰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그가 인간관계의 모든 것을 체득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나, 우리(독자)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저자) 모두에게 준엄한 교훈으로 다가오는 것만을 소개한다. 자신이 먹어보아 독이 없고, 몸에 좋다고 판명된 것만을 그는 제공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맥스웰이 강조하는 것 중 개인적으로 크게 공감하고 있는 것 몇 가지에 국한하여 살펴보겠다. 첫째, 거울의 원칙에 나오는, ‘거울 테스트’에 대한 부분이다. 그는 다섯 가지의 명제로 정리될 수 있다. 내가 가장 알아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내가 가장 잘 지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내가 가장 변화시켜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은 나 자신이다. 이는 다시 자아 인식, 자아상, 자기 정직, 자기 성장, 자기 책임감으로 바꿔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다. 내가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혹은 내 밖의 환경은 바뀔 수 없으므로 유일하게 내가 바꿀 수 있는 나 자신에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는 절반의 진리와 절반의 왜곡으로 구성되어있다.


다음으로 카리스마의 원칙. 이 장의 도입부에 소개하는 필리즈 부인의 예화는 퍽 인상적이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중심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훌륭한 역할 모델이다. 위싱턴 사교계의 여왕, 펄 메스타가 오는 손님에게는 “이제야 오셨군요!”라고 하고, 떠나는 손님에게는 “이렇게 일찍 가시다니 너무 서운해요”라고 하는 것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결국 카리스마라고 하는 것을 남을 밟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세워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맥스웰은 카리스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리스마가 없는 사람은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나 왔어”라고 말한다.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은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다들 여기 있었군”이라고 말한다.”(121쪽)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것은, 실상 “내가 그들에게 관심이 있고 또 그들을 도우려 한다는 사실을”(122쪽) 확신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면에서 접근성의 원칙과 연결되는 접점이 발견되는데, 곧 이는 관계 맺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우리의 수고를 요하는 일이다. 『피너츠』에서 찰리 브라운이 “난 인류는 사랑하지만 인간은 싫단 말이야!”(193쪽)라고 하는 것도 놀랄 일은 못된다. 그것은 한갓 유머를 넘어서 우리 자신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다. 결국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다가가야 한다. 상대에게 원하는 것을, 우리 자신이 먼저 줘야만 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중요한 통찰이 바로 우리 자신의 자율성에 입각한 주도적 실천이다. 우리가 먼저 실행해야 남들도 반응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가 그렇다면 어떻게 동력을 끌어내느냐의 문제이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단점이며, 한계이다. 인간관계 형성의 원천(영성)이 공백으로 남아있다. 저자는, 기독교인이기에 아마도 신앙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우리들은 -다른 종교들을 포함한- 범(凡)영성적 견지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무엇이 됐건 간에 그 에너지의 원천이 누락되어있다. 아니, 원천 자체가 무언지는 중요하지 않다(이 책은 종교를 변론하기 위한 서적이 아니다). 정말 요구되는 것은 에너지를 얻는 방법인데, 이 책은 그 점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관계가 구현되는 장인 이 세상 내의 왜곡된 권력 구조의 비판(정치)이 결여되어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필시 저자가 기독교 계통에서 활동하는 성직자라는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콘스탄티노플 이후로 사회 구조를 건드리기보다는 그 구조의 존속(소위 status quo) 안에서 인간관계를 포함한 개인윤리에 치중한 편이다(물론 예외적 사례가 꾸준히 존재해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주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 또한 일종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할 수 있겠는데, 결국 모든 문제의 해법이 내 안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내 영향력의 반경이 한정되어있는 관계로 내가 변화될 시의 파장 역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끝으로 책에 등장하는 작은 교훈 하나만 지적하자. 좀 사소해 보이지만, “나는 훌륭한 책을 읽고 거기서 많은 도움을 받으면 저자에게 잊지 않고 감사의 말을 전한다(110쪽)”는 그의 말에 공감하고, 앞으로는 매번 그렇게 해야겠다는 다짐하는 바이다(종종 이렇게 하기는 하지만,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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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
로이 H. 윌리엄스 지음, 이은선 옮김 / 더난출판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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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와 비글의 여행기. 이것이 [내 비글은 어디에 있을까]에 대한 하나의 축약이다. 그리고 이는 이 간결하게 ‘보이는’ 우화를 접근하는 출발점을 제공한다. 즉 인생은 여행이며, 그것도 나를 찾아나서는 여행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부제가 “데스티나이로의 여행”이다.

그런데, 이 여행에서 주인공인 변호사가 가져가야하는 것은 비글이다. 이 개의 이름은 인튜이션, 즉 직관이다. 그 밖의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의 미국 발행인이 알려주는 바, 저자의 핵심은 균형감각이다. 즉, 이 책은 주인공이 사는 세계와 주인공의 성격과 직업으로 표명되는 이성과 비글의 이름으로 드러나는 직관 간의 균형이 인생 여정의 성공적인 완수에 필요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또 여기에서 짚어봐야할 핵심적인 측면이 있다. 바로 북극성이다. 주인공이 비글과 함께 데스티나이로 가는 데에 있어서 지표로 삼을 수 있는 오직 그것 뿐이다. 이것은 삶의 지표, 또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븐 코비의 용어를 따르자면, ‘나침반’인 셈이다.

필자는 이렇게 세 가지를 핵심 사항으로 본다: 인생에 대한 전망으로서의 여행 모티브와 인생 성공의 비결로서의, 이성과 직관의 균형감각 유지, 그리고 인생의 지표/목적의 일관된 추구. 하지만 이렇게 핵심을 잡아놓고 새롭게 책을 읽어가노라면 그 세부적인 측면에 대한 해석은 십인십색일 수밖에 없다.

아니, 사실은 책 전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단일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저자가 원치 않던 것이다. 작가, 로이 윌리엄스는 자신이 선정하여 불러 모은 여섯 전문가 모두가 각자 달리 해석되도록 책을 구상했다. 그리고 이 시도는 성공했다. 비단 이들 토론 참가자에만 해당할 수 없는 결과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윌리엄스의 의도와 관련하여 앞서의 세 요소를 염두에 두고 읽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목사는 신앙적 여정으로, 여류 사업가는 경영의 과정으로, 의사는 이 여행을 위한 이성과 직관의 균형 유지의 권면 등으로 읽어갈 때 우리는 어떤 일관성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 책을 단순히 [오즈의 마법사] 복사판으로 절하하는 경우는 예외이다. 그러한 해석도 가능하도록 저자는 의도했지만, 이는 이 책을 통해 통찰을 얻을 수 있는 독해 방식이 아닌 것이다. 즉, 이 책은 열려있는 텍스트이지만, 경계선(세 가지의 핵심)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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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요와 재물 예찬믿음 274
안드리아스 휴브너 지음, 임은묵 옮김 / 예찬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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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요와 재물,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들 부자되기를 꿈꾸며, 그 소망을 당당하게 밝힌다. 나는 기독교인이기에, 교회에서도 거의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물론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부자로 살고 싶고, 부자로 사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사실, 요새 한국교회 안에 '깨끗한 부자론'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내가 재테크나 부자 마인드를 다루는 책들을 틈틈이 펼쳐보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기독교권에서도 종종 나오기 때문에 역시 눈여겨본다. 좋은 책들도 있고, 평범한 책들도 있다. 가끔은 아주 천박한 것들도 있다. [부요와 재물,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가 바로 그러한 책이다. 다음의 문장들을 보라.

'당신이 하나님의 물질의 복을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받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면 어느 곳이든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돈을 볼 것입니다. 당신이 그 집을 방문하고자 해도 그 집은 돈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집에는 당신이 거할 방이 없습니다. 그 집의 수영장에는 물이 없습니다. 물 대신 돈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는 다른 것이 자리를 차지할 공간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돈 속에서 수영할 것입니다.' (75쪽) … '백화점에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상품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 백화점을 다녀온 후에는 남아 있는 상품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76쪽)

이렇게 천박할 수가! 이렇게 허무맹랑한 과장법을 사용하다니…. 그가 이러한 부를 누릴 수 있는 방도로 제시하는 바도 허무맹랑하다. 그의 위대한(!) 선포를 들어보라. '나는 당신의 빚이 불법한 것임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나는 당신의 빚이 하나님의 말씀의 방망이에 맞아 깨어졌음을 선언합니다.' (120쪽) 그는 빚을 '귀신의 역사'(145쪽)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영적인 능력으로 빚은 해결되는 것이다. 카드의 남용 같은 문제 이면에 놓인 훈련되지 않은 삶의 자세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가 주장하는 바, 가난에 머무르는 이유가 또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가 보는, 기독인이 부자되지 못하게 하는 원인들 중의 첫 번째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이다. 그 일차적 성서의 근거는 창세기 12장 3절이다. '너[유태인의 시조인 아브라함]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그 구절에 입각한, 다음과 같은 충고는 상식적으로 볼 때,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인 유대인들을 적대하는 악한 말이나 생각 혹은 행동은 아예 하지마세요. 반유대주의는 가난하게 되거나 가난에서 머물게 되는 제일의 원인입니다.' (137쪽) 휴브너는, 아브라함에게 제공된 약속을 유태인 전체에게 확장시키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더욱이 아브라함에 대한 그 본문 자체의 해석에도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문제가 많지만, 그나마 마음에 드는 한 가지가 눈에 띤다. 저자, 휴브너는 주기도문(Lord's Prayer)에서 '너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어라'는 구절을 빚 탕감으로 확장한다. 나는 이 사람과 같은 해석을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휴브너의 성서 은유에 대한 접근 자세는 문학적 성격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준다), 적어도 그 사람의 윤리적 실천으로서 제법 쓸만하면서도 자신의 체계 하에서 꽤 일관된 부분이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하나님이 우리의 재정적 채무를 해결해주신다. 금전적 빚은 영적 빚에 기초하기 때문에, 기독인들(영적 문제가 해결된 이들)은 금전적 해방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먼저 이를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채무를 청산해주어야 한다. 마치 나 자신은 비폭력주의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비폭력주의자들을 존경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이런 점이라도 있는 걸로 봐서 나름대로 이 책의 저자도 진지하게 사는 것으로 인정해주어야 할 것 같다(별 하나로 매기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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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의 위협 앞에 선 기독교 신앙
프랑스와즈 돌토 지음 / 다산글방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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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그마한 서책, <정신분석학의 위협 앞에 선 기독교 신앙>은 유명한 정신분석가 프랑스와즈 돌토Dolto의 기독교 신앙을 -제라르 세베랑Severin과의- 대화적 방식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드러나는, 가톨릭 교인인 돌토의 신앙은 라캉Lacan의 관점으로 해석된 것이다. 돌토는 -프로이드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제시하는- 라캉의 제자이며 동료였다. 구절구절마다 라캉의 흔적이 배어있다.

책 전체에서 계속 강조되는 것은 욕망(desire), 사랑, 그리고 모험이다. 욕망은 인간의 직접적이고 신체적인 필요로 인해 발생하는 욕구와는 구별되는 관계적이고 정신적인 갈망이다(46). 인간의 억압된 욕망을 참으로 해소해야 하며, 그럴 때 인간의 내면은 진정한 사랑(욕망이 궁극적으로 조화를 이룬 상태-110)으로 넘쳐 흐른다. 욕망의 해소에서 사랑의 충만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곧 -앞으로 나아가는- 모험이다. 욕망실현의 위험을 감수하는 이 모험이 바로 신앙이며, 이는 곧 오늘에 충실하는 것이다.

돌토는 제도적 종교는 멀리하나, 체험으로서의 종교, 즉 영성 체험은 높이 산다. 그가 생각하는 참된 종교의 경험적 의미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이 자유가 바로 모험의 동인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모험은 위험의 감수이며 신앙이다. '사랑 안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입니다.' (218) 바로 이것이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정신분석학, 프로이드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적인가? 돌토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이야말로 신앙의 기제(mechanism)를 설명할 좋은 수단으로 본다. 신앙인이 모호하게 인지하고 있는, 자신의 경험한 종교적 체험을 정신분석학의 개념과 용어를 통해서 명확하게 파악하고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정신분석학을 통해 새롭게 정립하였다.

종교(특히 기독교)적 차원에서 구별되는 바, 이 책이 주는 다른 유익은 죄와 죄의식의 문제이다. 그녀는 현명하게도 모든 인간의삶의 조건의 하나로 죄인됨을 제시한다(127). 즉 인간은 그 유한함으로 인해 계속 죄를 지으며 그러한 필연성은 곧 인간의 죄책에 대해 용납이라는 해법으로 연결된다. '죄는 우리 정신 또는 의식의 자발적인 행위와는 거리가 먼 것'(114)이다. 이를 가지고 한탄하고 곱씹는 것은 낭비이다. 그러므로 신앙, 즉 정신적인 바라봄의 대상으로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제시한다(127). 복음은 우리에게서 죄의식을 거둬가는 욕망의 열쇠로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152).

손바닥보다 좀더 큰 소품, <정신분석학의 위협 앞에 선 기독교 신앙>은 정신분석학과 종교(기독교)의 긍정적인 만남의 좋은 사례이자, 대화적 구성을 통한 흥미로운 교양 자료이다. 프로이드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몰라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알면 더 좋겠지만).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거나 기독교 신앙의 사회 안에서의 적용 가능성을 탐구하는 분들의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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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상실
톰 울프 지음, 박순철 옮김 / 아트북스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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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inted Word>는 1975년에 출간되자 마자, 저자(Tom Wolfe)에게 명성을, 그리고 미술계에 논란을 제공한 책이다. 이번에 <현대미술의 상실>이라는 제목으로 아트북스를 통해 역간됐다. 전체 분량이 고작 135쪽에 불과해 완독하는 데에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아니, 빨리 읽으면 한시간에 독파할, 작고 얇은 책이다. 하지만 30여년 전의 미국 미술계에 이 책이 가져다 준 파장은 작지 않았다.

저자, 울프의 논지는 책의 원제가 잘 보여준다: 그려진 말씀(The Painted Word). 이 '말씀'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것은 평론가들과 작가들이 사용하는 이론이다. 이론을 '말씀'이라고 부름으로써(즉 신학적 은유를 차용함으로써), 저자는 그 이론의 정전화 현상을 꼬집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에서 울프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는, 자신이 배워오고 믿어온 명제를 거짓된 것, 혹은 잘못된 것으로서 배척하고, 이의 반제, 즉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Believing is Seeing)'라는 명제를 현대미술계에 놓여있는 진실로 제시한다. 이론이 있고 나서, 그림이 있는 것이다. 즉, 현대 미술은 이론을 적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론이 없으면, 그 그림은 이해할 수 없게 된다(이야기와 입체감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회화적인 것, 즉 평면을 추구해야 한다는, 현대 미술의 일관된 정향성을 가리킨다).

책의 뒷부분을 보면, 미래의 어느 전시회에서 커다란 이론설명서가 벽면에 걸려있고, 그 이론에 대한 회화화로서 -엽서 크기로 축소 복사된- 그림(폴록 등이 그린)이 곁에 붙어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 물론 웃기려고 지어낸 것이지만, 아마 가장 정확하게 그의 논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림은 말씀의 회화화(즉, 그려진 말씀)이기에 말씀(즉, 이론)보다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의 현대미술계를 다루는 방식은 <지적 사기>에서 소칼이 수행한 것처럼 과격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일관되게 미술계(화가/평론가/화랑 등)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리고 종종 하나의 대상을 가리키기 위해 대여섯 개의 단어를 병렬, 제시함으로써 누적된 힘으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사용되는 단어들은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끌어온 은유들의 다발이다. 그러나, 번역의 한계로 그 맛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

사실 저자는 반드시 현대 미술계를 비판하려는 의도로만 집필한 것 같지는 않다. 이론선행적인 노선으로 치우쳐가는, 그리하여 대중과 분리되고 있는, 현대미술의 암호화 현상의 역사적 맥락을 꼼꼼하게 짚어내는 과정은, 적어도 1974년까지는, 그가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는 여전히 현대 미술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미술계에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는 명제에 충실해주길 바라고 있다(적어도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그의 예언에 따르자면 그렇게 보인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어렵지 않다. 저자, 자신이 현대 미술의 이해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던 차에 신문에서 발견한 하나의 문장(이론이 없으면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는)을 통해 '득도'하고 난 후에, 일반인들에게 -현대미술이 극도로 이론의존적이기에- 그림만 본다고 해서 저절로 그 그림의 의미를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는 비밀을 알려주고자 쓴 것이다. 태생적으로 이 책은 쉽게 씌어질 운명을 타고난 것인다. <현대미술의 상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웃게 만들며, 또한 부담 없이 읽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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