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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요와 재물 ㅣ 예찬믿음 274
안드리아스 휴브너 지음, 임은묵 옮김 / 예찬사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부요와 재물,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들 부자되기를 꿈꾸며, 그 소망을 당당하게 밝힌다. 나는 기독교인이기에, 교회에서도 거의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물론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부자로 살고 싶고, 부자로 사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사실, 요새 한국교회 안에 '깨끗한 부자론'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내가 재테크나 부자 마인드를 다루는 책들을 틈틈이 펼쳐보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기독교권에서도 종종 나오기 때문에 역시 눈여겨본다. 좋은 책들도 있고, 평범한 책들도 있다. 가끔은 아주 천박한 것들도 있다. [부요와 재물,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가 바로 그러한 책이다. 다음의 문장들을 보라.
'당신이 하나님의 물질의 복을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받은 사람의 집에 들어가면 어느 곳이든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돈을 볼 것입니다. 당신이 그 집을 방문하고자 해도 그 집은 돈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집에는 당신이 거할 방이 없습니다. 그 집의 수영장에는 물이 없습니다. 물 대신 돈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는 다른 것이 자리를 차지할 공간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돈 속에서 수영할 것입니다.' (75쪽) … '백화점에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상품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 백화점을 다녀온 후에는 남아 있는 상품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76쪽)
이렇게 천박할 수가! 이렇게 허무맹랑한 과장법을 사용하다니…. 그가 이러한 부를 누릴 수 있는 방도로 제시하는 바도 허무맹랑하다. 그의 위대한(!) 선포를 들어보라. '나는 당신의 빚이 불법한 것임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나는 당신의 빚이 하나님의 말씀의 방망이에 맞아 깨어졌음을 선언합니다.' (120쪽) 그는 빚을 '귀신의 역사'(145쪽)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영적인 능력으로 빚은 해결되는 것이다. 카드의 남용 같은 문제 이면에 놓인 훈련되지 않은 삶의 자세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가 주장하는 바, 가난에 머무르는 이유가 또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가 보는, 기독인이 부자되지 못하게 하는 원인들 중의 첫 번째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이다. 그 일차적 성서의 근거는 창세기 12장 3절이다. '너[유태인의 시조인 아브라함]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그 구절에 입각한, 다음과 같은 충고는 상식적으로 볼 때,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인 유대인들을 적대하는 악한 말이나 생각 혹은 행동은 아예 하지마세요. 반유대주의는 가난하게 되거나 가난에서 머물게 되는 제일의 원인입니다.' (137쪽) 휴브너는, 아브라함에게 제공된 약속을 유태인 전체에게 확장시키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더욱이 아브라함에 대한 그 본문 자체의 해석에도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문제가 많지만, 그나마 마음에 드는 한 가지가 눈에 띤다. 저자, 휴브너는 주기도문(Lord's Prayer)에서 '너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어라'는 구절을 빚 탕감으로 확장한다. 나는 이 사람과 같은 해석을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휴브너의 성서 은유에 대한 접근 자세는 문학적 성격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준다), 적어도 그 사람의 윤리적 실천으로서 제법 쓸만하면서도 자신의 체계 하에서 꽤 일관된 부분이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하나님이 우리의 재정적 채무를 해결해주신다. 금전적 빚은 영적 빚에 기초하기 때문에, 기독인들(영적 문제가 해결된 이들)은 금전적 해방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먼저 이를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채무를 청산해주어야 한다. 마치 나 자신은 비폭력주의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비폭력주의자들을 존경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다. 이런 점이라도 있는 걸로 봐서 나름대로 이 책의 저자도 진지하게 사는 것으로 인정해주어야 할 것 같다(별 하나로 매기지 않은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