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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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는 건 겁나지 않아,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내 지금 상태는 약간 두려워. 날마다 내 존재는 조금씩 줄어들어. 오늘의 나는 말이 결여된 생각이지. 내일의 나는 생각이 결여된 몸뚱이가 될 거야. 그렇게 되는 거지. 하지만 마야, 지금 네가 여기 있으니 나도 여기 있는 게 기뻐. 책과 말이 없어도 말이야. 내 정신이 없어도. 대체 이걸 어떻게 말하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_[섬에 있는 서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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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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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생기자 이상하게도 왈칵 솟구쳤던 화가 사그라들고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 자리에 있으면 터져버릴 것 같아서, 터지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두려워서, 나는 농밀한 슬픔을 품은 채 아버지가 사라진 후 오랫동안 비어 있던 서재로 스며들었다.

 

 (…) 외할아버지가 쏟아냈던 사나운 말들 가운데 이런 말들이 기억난다. "물러터진 놈 같으니. 하청업자한테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했다는 게 말이 돼? 칭얼댄다고 다 들어주면 그자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하나를 달라고 해서 하나를 주면 고맙다고 하고 물러갈 것 같아? 세상을 어떻게 그렇게 몰라. 굽힐 때 굽히고 밟을 때 밟아야지. 그게 세상 이치인데. 굽힐 데서는 뻣뻣하게 머리 쳐들고 있고, 밟아야 할 데서는 굽신굽신, 무슨 바보짓이야. 발지 않으면 밟히는 건데, 그래서 밟는 건데,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인정하고 사죄하고, 각서 써주고, 원하는 대로 협상해주고, 그렇게 해서 돈을 어떻게 벌 건데. 회사 말아먹을 작정이야? 사업이 무슨 소꿉장난인 줄 알아? 내 밥 먹은 지 몇 년인데, 어떻게 나아지는 게 없어. 어떻게 맨날 그 모양이야. 발전이 없어, 발전이."

 세상은 견디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은 것이 그날 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밤 아버지가 자기의 공간인 서재에서 밖으로 나왔다는 기억이 없다. 그 말을 들은 곳이 어디였는지도 선명하지 않다. 내가 서재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내가 들어가지 않았고 아버지가 나오지도 않았다면, 나는 언제 어디서 그 말을 들은 것일까. 아버지가 정말로 그 말을 하긴 한 것일까. 갑자기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그날 밤 그 방의 고요와 어둠 속에서 내가 모멸감에 대해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 방에서 견뎠을, 사는 일의 수치스러움에 대해서.

 

_이승우, 「모르는 사람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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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와서 다행이야 음악이 있어서 다행이야

  두 개의 불행과 한 개의 다행이 있어서 다행이야

 

  봄이 와서 다행이야 광장이 있어서 다행이야

  여러 개의 의문문과 한 개의 결정문이 있어서 다행이야

 

  (…)

 

  발이 손이 되도록 취했다

  벽이 문이 되도록 취했다

 

  (…)

 

  문, 그런데 우리는 광장에 가듯 혁명 곁으로 가고 있습니까?

 

  _안현미,詩 「주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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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임영태 지음 / 마음서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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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 쪼들려 살면서도 나는 돈 버는 일에 열심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먹고사는 일에 무심했다.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고, 노후를 준비하고, 이런 것들에 저당 잡혀 사는 인생을 시시하게 생각했다.

 혹시 쌀이 떨어져 굶어 죽을 상황이 된다면 그전에 죽으면 된다. 먹는 문제는 산 자에게나 필요하고 위협이 되는 일이지 죽은 자에겐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먹고사는 일 따위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결혼하기 전부터 '생활'이라는 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그렇다고 생활 이상의 거창한 목표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다만 먹고산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노동한다는 것, 인간의 삶이라는 게 그런 것만으로 채워져선 안 된다고 믿었다. 뭔가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무슨 열망은 아니었다. 기질적으로 나는 무언가를 강렬하게 열망하거나 동경하는 게 없었다.

 

 (…)

 

 "나는 누구인가?"

 

 한때는 나에게 특별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해 겨울 아침, 아홉이나 열 살쯤, 대문을 나서자 찬바람이 온몸에 달려들었다. 숨이 막힐 듯 차디찬 바람이었다. 몸이 금세 얼어붙어오는데도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쨍하고 쇳소리가 날만큼 눈 시린 햇살이 저 앞의 키 크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맑게 반짝거렸다.

 무엇인가 경이로웠다. 말로는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어린 나는 그때, 이 세계의 비밀스러운 무엇 하나를 보았다고 느꼈다.

 

 (…)

 그런 날들, 삶의 이면들에 언뜻언뜻 매혹적인 것이 번득거릴 때 나는 내 앞에 비범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먹고사는 것에나 매여 있는 시시한 삶을 결코 살지 않을 것이다. 더 높고 더 고결한, 눈부신 무엇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돌아보면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니 평범하기라도 했다면…… 허술하고 조급하고, 때로 시건방지기까지 했다. 늘 추상적으로 더듬거렸을 뿐 발 딛고 사는 세상의 어느 것 하나 성실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박한 휴식조차 만들어주지 못한 구차한 사내일 뿐이었다.

 

 (…)

 무슨 일이든 끝나지 않는 일을 나는 못 견뎌했다. 공고 삼학년 때 실습 나갔던 선풍기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하염없이 흘러오는 것, 엔딩이 없이 내일도 모레도 되풀이되는 일들, 이제는 그런 것에 아득해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한 끝나는 일이란 없다.

 

_임영태, 『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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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사람 2017-10-11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 장면이 기억나요. ˝우리 슈퍼 보고 왔어요?˝
 
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 - 거지에서 기생까지, 조선 시대 마이너리티의 초상 서해역사책방 21
최기숙 지음 / 서해문집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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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낮은 것들은 자기보다 더 낮은 것을 찾아 스스로 윗자리가 되는 데서 위안을 찾았다. 나보다 더 못한 자, 나보다 더 낮은 자가 있다고 믿어야만 밑바닥에서 사는 자의 수치와 모멸감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아랫자리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다는 거지패들이 감히 장안 제일의 풍류패에게 풍악을 요청한 것이다.

 

 (…) 

 저물도록 흥취에 젖어 있던 거지들이 잠시 쉬는 사이 시장기를 달래려고 자루를 뒤졌다. 잔칫집에서 얻어 온 음식을 깨진 기와에 정성껏 담아 풍류 판을 벌여 준 이 패두에게 바쳤다. 기와 조각을 받쳐 든 손에 더럽게 때가 끼어 있고, 소맷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났다. 이 패두는 차마 그 정성 을 받을 수 없었다. 거지들도 그 거절의 뜻을 알아차렸다. 다만 그들에게도 마음을 표할 길이 없기에, 알맞지 않은 궁여지책을 선택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 패두도 알고 있었다. 형식이 가짜인 줄도, 세상살이의 매 순간이 음악 같을 수만은 없다는 것도, 악취가 전부는 아니지만 현재를 알아볼 수 없게 마비시키는 강렬한 힘을 가졌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겉이 아니라 속이고, 지금이 아니라 가능성이며, 조건이 아니라 실체라는 걸 알지만, 그 모든 것이 눈으로 보고 코로 맡는 감각적 현재로 경험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감각에 울고 웃는 몸뚱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_최기숙, 「거지에 홀린 선비 추문 속에 꽃을 보다」, 『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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