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아이들의 계급투쟁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전(*2차대전) 직후 탄생한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의 노동당 정권은 국가건강서비스라는 국가 무료 진료 시스템을 구축하고, 대규모 공영 주택을 건설하고, 대학 수업료를 철폐하는 등 생활의 최저 수준을 끌어올리는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했다. 그 효과가 일제히 꽃을 피운 시기가 1960년대였다. 계급 유동성이 없는 사회에 갇혀 부모와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인생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그 부모들은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직장에 취직했다. 배우, 디자이너, 저널리스트, 뮤지션, 작가, 예술가, 그때까지만 해도 중산층 자녀들이 독점하던 업계에 새로운 계급의 다른 사고 방식과 다른 감각을 지닌 사람들의 에너지가 흘러 들어왔다. p159

이렇게 함께 어울리는 방식을 고민하여 실천한 끝에 현실로 자리하였었건만(이것이 바람직한 성장/발전 임은 두말할 것 없겠고) 그런데 이런 사람은 줄고, 대신 서로 간 배척에 골몰하는 이들은 늘어만 간다니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을까.

안정/성장/발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긴축'이 뒤바꾼 현실을, 저자는 탁아소 폐쇄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이며 증거한다. 위축/지체/정체/퇴보.etc 긴축책을 반대하는 편의 우려를 벗어나지 않는, 기대와 상반되는 결과. 불황 타계책이란 것이, 마치 기아 해결 위해 일정 비율의 인구를 제거하잔 식과 다를 바 없으니 이거야 원.

처음부터 기대하고 목적한 바가 ‘저변’의 배제가 아닌 이상 굳이 긴축책을 고수할 이유는 없을 터. 불안정을 현실로 마주하는 속에서 증폭되느니 불안이요, 심화되느니 갈등인 당장의 형편이 장기에 안정되리라 믿는 것이야말로 미생지신尾生之信. 자신만 지키려는 데에 급급한 사회라면 최종 승자 아니고는 죄다 패자일밖에. 구성원 각자가 서로의 사정과 형편에 눈 감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무시와 배제로 담을 높이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사회상을 안정적이라 이른다면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 또한 바람직한 성장/발전은 더더욱 아니겠고. 그보다 눈 씻고 서로를 찾아 살피는 데에, 눈/손/발로 길을 내어 마음 오가는 데에 힘을 쏟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마땅한 격格이랄까, 성장으로 이루는 사람의 품위 아닐지. 이런 사람들이 주축을 이룰 때에나 국격을 위시한 사회의 품격을 논할 수 있지 않겠나.


사람이 결속하는 모든 것을 '안 된다'고 하며 서민들을 분할 통치하고 있다. '제힘으로주의'가 활짝 핀 상승의 시대라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기대고 지탱해주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하강의 시대가 되었는데도 개인주의라는 토대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시대에 그럼에도 '연대'에 끌리는 사람은 그야말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점프할 수밖에 없다고나 할까. p173

광화문에 불려 나온 어르신들, 방황하는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¹이 연상聯想되는 대목.

이분들이야말로 '연대에 끌리는 사람'이지만 정작 '오른쪽으로 점프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해 있는지도 모를 일.

판단은 권좌에 맡기고, 자신은 맡은 일에만 열심이었을 뿐인데 응분의 처우는 고사하고 생각 없는 치로 내몰리면 억울할 만도 하겠다. 그런데 차근차근 살피면 알게 될 일, 당초 생각 없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여기는 자체부터가 오해. 요는 사실을 근거로 살펴 직접 판단하기를 바라는 것. 못 믿는 게 아니라, 직접 살피면 이해하고도 남으리라는 믿음이 바탕. 그러니까 믿지 않고는 할 수 없고 믿으니 드리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어르신 -_-;;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건 다름 아닌 피해 의식. 안타까운 점은, 군부독재 폭정 아래 침묵으로밖에 경험할 수 없었던, 하여 왜곡된 형태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던 공동체 의식. 판단은 맡기고 침묵을 내면화한 끝에 얻은(아니 잃은), 적의敵意를 토대 삼지 않고는 내보이지 못하는, 연대連帶의 정서와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 이렇게 속하기를 바라는 형편에서 '도당감徒黨感'²에 갈팡질팡하다 자꾸만 우측으로 기울고 마는 건 아닌지.

그러니 자신을 산업역군으로 불러주던, 자신이 이 나라 발전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한다 여길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鄕愁는 번번이 초과 상태. 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앙시엥 레짐의 복권復權을 기도.

OMG, 정녕 이 어르신들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꽈~~;


얼마 전까지의 영국이었다면 아나키스트라 불리는 사람들이 젊은이들과 함께 싸웠을 것이다..

아나키스트 계열의 무직자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 실업보험금과 생활보호수당을 받으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거나 정치 운동을 했다. 하지만 노동당 정권 시절 이들의 주요 활동은 무농약 야채 재배나 유기농 식품 판매, 혹은 래디컬한 책을 모으는 도서관 운영 등 소프트한 방향으로 전환했다.

소위 '싸우는 극좌'라 불렸던 세대의 못 말리는 펑크족이나 히피 계열의 아저씨들은 그 모습을 보고 뜨뜻미지근하다며 화를 냈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반긴축의 깃발 아래 모여 생기 넘치게 활약할 수 있을 텐데..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긴축의 영향을 받았다. 실업보험금과 생활보호수당이 끊기자 그들도 저임금의 일자리를 얻었다(노숙자가 되거나 행방불명이 된 사람도 있다)..

긴축은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했으니 경제적인 면보다 정치적인 면에서 더욱 효과적이지 않았나 싶다. 긴축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고독하게, 그리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휴머니티, 즉 인간성이 자본보다 열등하다고 규정한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p69~p71

그래, 결국 사람. '인간성이 자본보다 열등하다고 규정'하는 '긴축'에 열 올리는 이 또한 사람이며 이에 맞서 '인간성'을 보이는 이 또한 다름 아닌 사람. 조직/사회에 휘둘리니 사람이지만, 이를 바꾸고 가꾸는 이 또한 바로 그 사람인 것.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싶은 중에도 성원 개개인이 저마다 어찌할 수 있는바를 책임질 때에야 비로소 사회는 변화를 맞게 되는 것.

그런데 변화에는 한목소리를 내면서도 책임은 사회에 돌리고 '보이지 않는 손' 뒤에 숨는 편리에 기대니(너도 나도 '한나 아렌트'를, '악의 평범성'을 입에 옮기는데 그 악을 별다른, 거창한 무엇이나 되는 양 여기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상은 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 손' 뒤에 숨어 제가 거머쥐게 될 이익─작든 크든 간에─을 셈한 끝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해야 마땅한 일을 하지 않는, 이 모오든 짓거리가 죄다 그 악에 해당. 그러니 과연 평범하다 이를 만하지 않겠냐는 것!) 문제. 이 때문에 정작 돌봄과 살핌이 필요한 개인들은 오히려 소외되고 마는 형국. 공무, 정치를 비롯하여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장년 세대라면 특히 자기 목소리만 낼 게 아니라 대의제代議制에 걸맞는 책임을 져야 마땅! 보신을 비롯한 일신의 안위, 제 편의 이익을 구하는 데에만 혈안인 자체가 이미 인도人道를 저버린 행태. 따라서 해야 할 일을 함은 물론이거니와(당연하잖아요) 더하여 할 수 있는 걸 찾아 하는 때에만 사회는 마침내 변화를 일구어 낼 수 있을 것. 그런데 응당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의 사람들조차 책임을 미루고 피하니 사각死角이 발생하고 그 그늘에서 신음하는 이들이 생겨나는 것.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식의 선先 성장 후後 분배 기조. 트리클-다운이니 어쩌니 죄다 무의미 아니 일편一便에만 유리하게 실현됨이 수차례 증명되고 있음에도 '긴축' 운운이라니. '재정적자'야말로 곳간 자체가 인심人心의 합일合一로 이뤄진 것임을 천명闡明, 다시 그 인심의 씨알을 배양하는 적극적인 실천인 것을!! 

따라서 배운 자들(당초 공부에 들일 수 있었던 시간 만큼 사회에서 다른 누군가가 노동에 참여/감당함으로써 얻어진 것임을 상기해야 마땅. 사회 전체가 향유할 가치 생산은 책무!!),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공무/정치를 비롯한 영역에서 기능하는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장년 세대라면 특히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는, 사회적 양육 책임을 공동 분담하는 데에 적극 나서야!! 이것이 이 시대가 요하는 '어른'으로서의 책무!! 그러자면 사즉생死卽生으로 임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가난을 대물림한 청년 세대는 이미 요단강을 배후에 두고 지·옥·고─지하/옥상/고시원─를 진지陣地로 삼고 있잖은가)에 양손에 떡을 쥐려 드니 맴돌 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안으로 굽는 팔을 어쩌지 못하는, 개인 영역/혈연 서사를 넘어서지 못하는 입바른 소리, 국한된 '정치적 올바름'이야말로 공허. 차든 뜨겁든 분명히 해야!!


분열된 영국 사회에 대한 분석은 학자나 평론가, 저널리스트에게 맡기면 된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단절을 조금씩이라도, 단 1밀리미터씩이라도 좁히는 것이다. p168

굳이 맑스³를 옮기지 않아도 될 것. 그러니까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니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이니 미니멀리즘 등등 예산 선 내로 욕망을 축소하며 자기 만족 만을 극대화하는 형태의 퇴행을 '나답게'라 이르는 욕망의 키덜트를 벗어나자는 것. 후세를 위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지는 어른으로 이제 그만 성장하자는 것. 이를 바탕 삼고서 무책임/회피하려는 모든 짓거리를 멈추라고, 책임 분명히 지라고 목소리를 내자는 것.

어른이 어른으로서의 책무를 방기할 때 아이들 마음에 염증은 뿌리를 내리고 혐오는 싹을 튀우게 마련.

이를 방치/방조 심지어 조장하는 자, 모두 유죄!!

아, 제발 좀!! '_'



물려줄 유산은 돈이 아니에요, 스피릿이란 말입니다, 스피릿!!

(아스피린 말고 아,스피릿 가즈아 ~ '0'/)

"캘리는 너무 기분이 나쁜 거야. 그래서 담임 선생님한테 따졌대. 도대체 왜 여자아이는 치마를 입어야 하느냐고, 누가 그런 걸 정한 거냐고."

..

"그러게. 그게 우리 탁아소만의 스피릿이지."

..

'보통'이라는 개념을 의심하라.

..

어른이 되면 일을 하는 것이 보통. 어째서?

일하는 부모님의 수입으로 가정의 생계를 잇는 것이 보통. 어째서?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것이 보통. 어째서?

부모님은 서로 다른 성별이 보통. 어째서?

이 탁아소는 '어째서?'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 그리고 이 사회에 '어째서?'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이들의 자녀들이 주로 다녔다. 보수당이 정권을 잡아 긴축 재정을 실시하고 복지와 유아 교육에 대한 지출을 싹둑싹둑 잘라버리기 전, 그러니까 저변 탁아소 시절의 이야기다. p200



¹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 김원, 현실문화연구


² '긍정적 뉘앙스의 소속감이나 연대 의식, 혹은 부정적인 느낌의 패거리 문화 같은 표현과 거리를 두고, 좀 더 중립적인 의미를 전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어색하지만 원문의 표현 그대로 두었다-옮긴이(노수경)', p171, 브래디 미카코 『아이들의 계급투쟁』, 사계절

³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테제11,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 박종철출판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쩌면 모든 상투적인 말이 다 비장한 말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겟다. 늘 염원하면서도 내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희망을 그 상투적인 말이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글어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이 상투적인 말이 되도록 놓아둔 것은 늘 보던 것 외에 다른 것을 보려 하지 않는, 다른 것을 볼까봐 오히려 겁을 먹는 우리들의 나태함일 것이 분명하다. 말은 제 힘을 다해 우리를 응원하는데, 우리가 먼저 포기해버린 탓일 것이 분명하다. 상투적인 말들도 처음에는 그 날카로운 힘이 우리의 오장에 파고들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말이 나를 넘어뜨리고 내 안일을 뒤흔들 것이 두려워 우리가 철갑을 입을 때 말도 상투성의 철갑을 입기 시작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인들이 말의 껍질을 두들겨 그 안에서 비장한 핵심을 뽑아내려고 사시사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2014. 1. 4.)

_『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죽는 건 겁나지 않아,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내 지금 상태는 약간 두려워. 날마다 내 존재는 조금씩 줄어들어. 오늘의 나는 말이 결여된 생각이지. 내일의 나는 생각이 결여된 몸뚱이가 될 거야. 그렇게 되는 거지. 하지만 마야, 지금 네가 여기 있으니 나도 여기 있는 게 기뻐. 책과 말이 없어도 말이야. 내 정신이 없어도. 대체 이걸 어떻게 말하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_[섬에 있는 서점]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나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생기자 이상하게도 왈칵 솟구쳤던 화가 사그라들고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 자리에 있으면 터져버릴 것 같아서, 터지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두려워서, 나는 농밀한 슬픔을 품은 채 아버지가 사라진 후 오랫동안 비어 있던 서재로 스며들었다.

 

 (…) 외할아버지가 쏟아냈던 사나운 말들 가운데 이런 말들이 기억난다. "물러터진 놈 같으니. 하청업자한테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했다는 게 말이 돼? 칭얼댄다고 다 들어주면 그자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하나를 달라고 해서 하나를 주면 고맙다고 하고 물러갈 것 같아? 세상을 어떻게 그렇게 몰라. 굽힐 때 굽히고 밟을 때 밟아야지. 그게 세상 이치인데. 굽힐 데서는 뻣뻣하게 머리 쳐들고 있고, 밟아야 할 데서는 굽신굽신, 무슨 바보짓이야. 발지 않으면 밟히는 건데, 그래서 밟는 건데,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인정하고 사죄하고, 각서 써주고, 원하는 대로 협상해주고, 그렇게 해서 돈을 어떻게 벌 건데. 회사 말아먹을 작정이야? 사업이 무슨 소꿉장난인 줄 알아? 내 밥 먹은 지 몇 년인데, 어떻게 나아지는 게 없어. 어떻게 맨날 그 모양이야. 발전이 없어, 발전이."

 세상은 견디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은 것이 그날 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밤 아버지가 자기의 공간인 서재에서 밖으로 나왔다는 기억이 없다. 그 말을 들은 곳이 어디였는지도 선명하지 않다. 내가 서재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내가 들어가지 않았고 아버지가 나오지도 않았다면, 나는 언제 어디서 그 말을 들은 것일까. 아버지가 정말로 그 말을 하긴 한 것일까. 갑자기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그날 밤 그 방의 고요와 어둠 속에서 내가 모멸감에 대해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 방에서 견뎠을, 사는 일의 수치스러움에 대해서.

 

_이승우, 「모르는 사람들」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가 와서 다행이야 음악이 있어서 다행이야

  두 개의 불행과 한 개의 다행이 있어서 다행이야

 

  봄이 와서 다행이야 광장이 있어서 다행이야

  여러 개의 의문문과 한 개의 결정문이 있어서 다행이야

 

  (…)

 

  발이 손이 되도록 취했다

  벽이 문이 되도록 취했다

 

  (…)

 

  문, 그런데 우리는 광장에 가듯 혁명 곁으로 가고 있습니까?

 

  _안현미,詩 「주문」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