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임영태 지음 / 마음서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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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 쪼들려 살면서도 나는 돈 버는 일에 열심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먹고사는 일에 무심했다.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고, 노후를 준비하고, 이런 것들에 저당 잡혀 사는 인생을 시시하게 생각했다.

 혹시 쌀이 떨어져 굶어 죽을 상황이 된다면 그전에 죽으면 된다. 먹는 문제는 산 자에게나 필요하고 위협이 되는 일이지 죽은 자에겐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먹고사는 일 따위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결혼하기 전부터 '생활'이라는 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그렇다고 생활 이상의 거창한 목표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다만 먹고산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노동한다는 것, 인간의 삶이라는 게 그런 것만으로 채워져선 안 된다고 믿었다. 뭔가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무슨 열망은 아니었다. 기질적으로 나는 무언가를 강렬하게 열망하거나 동경하는 게 없었다.

 

 (…)

 

 "나는 누구인가?"

 

 한때는 나에게 특별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해 겨울 아침, 아홉이나 열 살쯤, 대문을 나서자 찬바람이 온몸에 달려들었다. 숨이 막힐 듯 차디찬 바람이었다. 몸이 금세 얼어붙어오는데도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쨍하고 쇳소리가 날만큼 눈 시린 햇살이 저 앞의 키 크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맑게 반짝거렸다.

 무엇인가 경이로웠다. 말로는 어떻게도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어린 나는 그때, 이 세계의 비밀스러운 무엇 하나를 보았다고 느꼈다.

 

 (…)

 그런 날들, 삶의 이면들에 언뜻언뜻 매혹적인 것이 번득거릴 때 나는 내 앞에 비범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먹고사는 것에나 매여 있는 시시한 삶을 결코 살지 않을 것이다. 더 높고 더 고결한, 눈부신 무엇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돌아보면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니 평범하기라도 했다면…… 허술하고 조급하고, 때로 시건방지기까지 했다. 늘 추상적으로 더듬거렸을 뿐 발 딛고 사는 세상의 어느 것 하나 성실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박한 휴식조차 만들어주지 못한 구차한 사내일 뿐이었다.

 

 (…)

 무슨 일이든 끝나지 않는 일을 나는 못 견뎌했다. 공고 삼학년 때 실습 나갔던 선풍기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하염없이 흘러오는 것, 엔딩이 없이 내일도 모레도 되풀이되는 일들, 이제는 그런 것에 아득해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한 끝나는 일이란 없다.

 

_임영태, 『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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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사람 2017-10-11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 장면이 기억나요. ˝우리 슈퍼 보고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