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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 - 거지에서 기생까지, 조선 시대 마이너리티의 초상 ㅣ 서해역사책방 21
최기숙 지음 / 서해문집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 낮은 것들은 자기보다 더 낮은 것을 찾아 스스로 윗자리가 되는 데서 위안을 찾았다. 나보다 더 못한 자, 나보다 더 낮은 자가 있다고 믿어야만 밑바닥에서 사는 자의 수치와 모멸감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아랫자리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다는 거지패들이 감히 장안 제일의 풍류패에게 풍악을 요청한 것이다.
(…)
저물도록 흥취에 젖어 있던 거지들이 잠시 쉬는 사이 시장기를 달래려고 자루를 뒤졌다. 잔칫집에서 얻어 온 음식을 깨진 기와에 정성껏 담아 풍류 판을 벌여 준 이 패두에게 바쳤다. 기와 조각을 받쳐 든 손에 더럽게 때가 끼어 있고, 소맷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났다. 이 패두는 차마 그 정성 을 받을 수 없었다. 거지들도 그 거절의 뜻을 알아차렸다. 다만 그들에게도 마음을 표할 길이 없기에, 알맞지 않은 궁여지책을 선택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 패두도 알고 있었다. 형식이 가짜인 줄도, 세상살이의 매 순간이 음악 같을 수만은 없다는 것도, 악취가 전부는 아니지만 현재를 알아볼 수 없게 마비시키는 강렬한 힘을 가졌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겉이 아니라 속이고, 지금이 아니라 가능성이며, 조건이 아니라 실체라는 걸 알지만, 그 모든 것이 눈으로 보고 코로 맡는 감각적 현재로 경험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감각에 울고 웃는 몸뚱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_최기숙, 「거지에 홀린 선비 추문 속에 꽃을 보다」, 『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