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뭐랄까 넌... 예의바르고 도덕적이고 곧아. 그런데 약간 엉뚱해. 넌 그 도덕적인 첫인상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거고 엉뚱함 때문에, 내가 옛날에 주창했던 3단 이론대로라면 이른바 최측근인 '1단계 친구'들에겐 사람 냄새 풀풀 나는 매력적인 애로 비칠거야. 재미없는 범생이 같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거고. 음, 도덕성은, 이를테면 그런 부분에서 느껴져. 내가 만약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였다고 해. 아마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너겠지만 너의 도덕성 때문에 좀 망설일거고, 그런데 엉뚱한 따스함 때문에 결국 너에게 갈거야. 넌 내게 사람을 죽일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뢰하고 달래주고 숨겨주고 혹은 도피방법을 함께 모의하겠지. 그렇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내게 자수를 권할 거야, 그게 너야. 음, 어쩌면 지금의 넌, 그 총대를 매기 싫어서 자수하라고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내가 만약 사형이라도 받는다면, 그런 생각 할테니까. 하지만 어찌되었건 내가 아는 너는 그래. 그런데 그렇다면, 나의 캐릭터는 뭐지?"
"너는, 너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야. 그러니까 내가 먼저 다가갔겠지. 알잖아,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가 먼저 다다간 사람은 너 하나야."
"알지, 넌 가만히 있어도 천부적으로 사람을 끄는 타입이니까. 아마 정치해도 잘할거야."
"정치나 할까, 그럼?"
"게으름부터 청산하고."
"시작이네. 그런데 너 매력은, 분명히 좋은 부분도 있는데 , 그러니까 너가 못되었다거나 하단 소리가 아니라, 음, 나쁜 매력도 공존해. 너 역시 나처럼 예의바르고 곧고 도덕적이야.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잘 해. 그런데 넌... 좀, 제멋대로야."
"맞아, 나 제멋대로야."
"이걸로 그 제멋대로가 설명이 될까 모르겠지만, 내 경우 1단계와 2단계와 3단계의 선이 분명한 데 반해, 넌 그 경계를 넘나들어. 너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냐, 그냥 타고난 게 그래.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너에게 대단히 소중하다고 착각했다가 한순간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다시 소중한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가.... 혼란스럽게 되지. 이미 너와 1단계인 사람이라면 너의 "상냥함"의 경계를 알아차리겠지만, 2단계나 3단계라면 절대 알 수 없어. 어느 순간 넌, 정말 모든 걸 다 줄 사람처럼 보이거든. 1단계에 근접한 2단계 사람들은 혹은 너를 자신의 1단계 범주에 넣은 사람들은, 너가 "아무에게나 잘해준다"고 생각하고 불만이고, 넌 그들에겐 특별하다고 항변할거야."
"너도 내게 그 이야기 했었어. "넌 모두에게 잘해주잖아."라고."
"기억해. 지금은 알지, 내게 특별하다는 걸. 또한 너의 그 상냥함은, 나와 마찬가지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다는 걸. 무의식이지만 그것은 또한, 나보다 강하지.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좋아보이면서도 나는, 그게 가끔 안타까울 때가 있어. 그래, 넌 사람을 뒤흔들어. 어쩌면 남자애들이 너에게 자꾸 고백을 해오는건, 너 외모나 개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종잡을 수 없는 태도때문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들어. 옆에서 보면 어떨 때는, 그 애가 사귀자고 하면 정말 당장 그럴 거 같이 보이기도 하거든. 절대 가식은 아니야.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에 밴 너의 습관 같은거야."
"인정해... 그런데 아마 지금은 예전만큼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않을거야. 언젠가도 한 소리지만 "한없이 착하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면 지금은 아니거든. 나이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겠지만 내 경운, 그 과정이 자연스럽지만은 않았지. 너무 많은 나쁜 사건을 겪었고... 지금 와서야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설령 습관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진심까진 아녔더라도 진실이오 사실이었는데, 내 행동을 두고 그들은 가식이라 욕했었지. 그때까진 착하게 살겠다 생각한 적 없었는데, 계속 욕을 먹고 배척 당하면서 착하게 살겠다 다짐했고, 자연스럽게 하던 일이 다짐으로 되면서 뭐랄까 인위적인 것이 되었지. 한 마디로 살기 참 힘들었단 거지. 내가 적당히 가식적이 되어 못되게도 굴고 적당히 농담도 하게되면서부터 난 쿨한 사람이 되었어. 그게 현실이야. 가식적인 내가 진실된 나보다 더 환영받아. 물론, 이건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되는 건 아니지만, 과정이 순탄치 못해서 최근의 내가 더 오락가락 하는 것도 같아. 말 꼬인다."
"추측컨데 아마 내 성격상 우리가 처음만났던 고등학교 때, 널 2단계로 쫓았던 적이 있는 것 같아. 내가 먼저 다가선 최초의 사람인데 넌 기대만큼 내게 오지 않았지. 참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그랬어. 알잖아, 나 결코 호락호락 1단계에 넣어주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넌 결코 널 보여주지 않았어. 너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어. 아까 말했든 도대체 내가 소중해서 잘하는 건지 아님 모두에게 그러는건지, 당시의 나로썬 알 수도 없었고. 굳이 딱 표현하자면 넌, 결정적인 순간 내게 믿음을 주지 못했었어."
"그랬을 거야... 너가 다가온 게 2학년 3월 중반이었지. 넌 내 뒷자리에 앉게 되었고 내게 편지를 써서 줬었어. 너 캐릭터를 생각하면 아직도 신기한게 넌 그 때 여자애들이 흔히 주고받던 편지 답장도 잘 안써주는 애였잖아, 너. 그러니 너가 '먼저' 편지를 쓴 건 정말 고교 생활 통틀어 나 하나밖에 없을 거야. 야, 이거 자부심 느껴진다. 그런데 내가 널 1단계의 범주에 넣은 건 여름방학 중간이나 끝나서였던 것 같아. ** 자살 사건 첫번째 기억해? 그 무렵이었어. 나로선 굉장히 빠른 진도였지만 그 사이에 분명히 갭이 있지. 우린 매일 한반에서 부대껴야 했으니까. 아마 여름 무렵 넌 마음에서 날 떨어뜨렸을 거고, 근데 이번엔 내가 잡았겠지. 그 때... 그 롯데월드 근처서 한 이야길 생각해보면 둘 다 다가서본 적은 없었던 아이들이라 탐색이 길었는지도 몰라. 혹은 상대의 패턴을 눈치채어 부러 더 역방향으로 가려 했을지도."
"맞아, 어렴풋하게, 2학년 2학기 쯤이 널 1단계에 넣었던 때라고 기억해. 너가 정말 큰힘이 되었었어. 잘하기도 했고."
"사건들도 많았고, 어쩌다보니 사건의 중심에 둘이 있었고, 그리고 항상 옆에 있어줬으니까. 뭐 정신적으로나, 아님 환경미화같은 자잘한 일... 반장이었으니까, 너. 이후 그 이상의 뭔가가 우리 사이에 있지."
"야, 사건. 어찌나 많았는지 정말 기억도 안난다,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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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쓴 건 짧은 한토막에 불과한 이 날의 긴 대화는-설령 그녀와 나 둘 다 "데니스는 통화중" 모드인 점을 감안해도 엄청났던-, 96년 잠실 롯데월드 아이스링크를 내려다보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그녀와 내가 나눴던 짧은 이야기를 기억함에서 비롯되었다. 3월이었고, 그녀때문에 치킨을 먹을 수 있게 된 내가 아직은 치킨을 먹지 못할 때였고, **빌라에서 **으로 이사하기 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삼성동에 사는 그녀와 대치동에 살던 내가 왜 굳이 잠실까지 갔는지(롯데월드에서 논 것도 아니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학교 근처가 아닌 장소에서 처음으로 둘이 만난 날이었다. 함께 영화를 보고 중국요리를 먹고 껌을 씹고 서점에서 영어 잡지를 뒤적이고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샀다.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다가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했었고, 그래서 난 "너 머리 좋잖아. 난 부러워."라고 말해줬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난 내 머리가 날 망쳤다고 생각해." 정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런 기억이 있다. 듣는 모든 이들을 감동시켰다던 그놈의 "3단계 이론"도 좀 구체적으로 생각이 나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