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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뭐랄까 넌... 예의바르고 도덕적이고 곧아. 그런데 약간 엉뚱해. 넌 그 도덕적인 첫인상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거고 엉뚱함 때문에, 내가 옛날에 주창했던 3단 이론대로라면 이른바 최측근인 '1단계 친구'들에겐 사람 냄새 풀풀 나는 매력적인 애로 비칠거야. 재미없는 범생이 같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거고. 음, 도덕성은, 이를테면 그런 부분에서 느껴져. 내가 만약 도끼로 사람을 찍어 죽였다고 해. 아마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너겠지만 너의 도덕성 때문에 좀 망설일거고, 그런데 엉뚱한 따스함 때문에 결국 너에게 갈거야. 넌 내게 사람을 죽일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뢰하고 달래주고 숨겨주고 혹은 도피방법을 함께 모의하겠지. 그렇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내게 자수를 권할 거야, 그게 너야. 음, 어쩌면 지금의 넌, 그 총대를 매기 싫어서 자수하라고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내가 만약 사형이라도 받는다면, 그런 생각 할테니까. 하지만 어찌되었건 내가 아는 너는 그래. 그런데 그렇다면, 나의 캐릭터는 뭐지?"

"너는, 너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야. 그러니까 내가 먼저 다가갔겠지. 알잖아,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가 먼저 다다간 사람은 너 하나야."

"알지, 넌 가만히 있어도 천부적으로 사람을 끄는 타입이니까. 아마 정치해도 잘할거야."

"정치나 할까, 그럼?"

"게으름부터 청산하고."

"시작이네. 그런데 너 매력은, 분명히 좋은 부분도 있는데 , 그러니까 너가 못되었다거나 하단 소리가 아니라, 음, 나쁜 매력도 공존해. 너 역시 나처럼 예의바르고 곧고 도덕적이야.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잘 해. 그런데 넌... 좀, 제멋대로야."

"맞아, 나 제멋대로야."

"이걸로 그 제멋대로가 설명이 될까 모르겠지만, 내 경우 1단계와 2단계와 3단계의 선이 분명한 데 반해, 넌 그 경계를 넘나들어. 너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냐, 그냥 타고난 게 그래.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너에게 대단히 소중하다고 착각했다가 한순간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다시 소중한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가.... 혼란스럽게 되지. 이미 너와 1단계인 사람이라면 너의 "상냥함"의 경계를 알아차리겠지만, 2단계나 3단계라면 절대 알 수 없어. 어느 순간 넌, 정말 모든 걸 다 줄 사람처럼 보이거든. 1단계에 근접한 2단계 사람들은 혹은 너를 자신의 1단계 범주에 넣은 사람들은,  너가 "아무에게나 잘해준다"고 생각하고 불만이고, 넌 그들에겐 특별하다고 항변할거야."

"너도 내게 그 이야기 했었어. "넌 모두에게 잘해주잖아."라고."

"기억해. 지금은 알지, 내게 특별하다는 걸. 또한 너의 그 상냥함은, 나와 마찬가지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다는 걸. 무의식이지만 그것은 또한, 나보다 강하지.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좋아보이면서도 나는, 그게 가끔 안타까울 때가 있어. 그래, 넌 사람을 뒤흔들어. 어쩌면 남자애들이 너에게 자꾸 고백을 해오는건, 너 외모나 개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종잡을 수 없는 태도때문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들어. 옆에서 보면 어떨 때는, 그 애가 사귀자고 하면 정말 당장 그럴 거 같이 보이기도 하거든. 절대 가식은 아니야.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에 밴 너의 습관 같은거야."

"인정해... 그런데 아마 지금은 예전만큼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않을거야. 언젠가도 한 소리지만 "한없이 착하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면 지금은 아니거든. 나이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겠지만 내 경운, 그 과정이 자연스럽지만은 않았지. 너무 많은 나쁜 사건을 겪었고... 지금 와서야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설령 습관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진심까진 아녔더라도 진실이오 사실이었는데, 내 행동을 두고 그들은 가식이라 욕했었지. 그때까진 착하게 살겠다 생각한 적 없었는데, 계속 욕을 먹고 배척 당하면서 착하게 살겠다 다짐했고, 자연스럽게 하던 일이 다짐으로 되면서 뭐랄까 인위적인 것이 되었지. 한 마디로 살기 참 힘들었단 거지. 내가 적당히 가식적이 되어 못되게도 굴고 적당히 농담도 하게되면서부터 난 쿨한 사람이 되었어. 그게 현실이야. 가식적인 내가 진실된 나보다 더 환영받아. 물론, 이건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되는 건 아니지만, 과정이 순탄치 못해서 최근의 내가 더 오락가락 하는 것도 같아. 말 꼬인다."

"추측컨데 아마 내 성격상 우리가 처음만났던 고등학교 때, 널 2단계로 쫓았던 적이 있는 것 같아. 내가 먼저 다가선 최초의 사람인데 넌 기대만큼 내게 오지 않았지. 참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그랬어. 알잖아, 나 결코 호락호락 1단계에 넣어주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넌 결코 널 보여주지 않았어. 너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어. 아까 말했든 도대체 내가 소중해서 잘하는 건지 아님 모두에게 그러는건지, 당시의 나로썬 알 수도 없었고. 굳이 딱 표현하자면 넌, 결정적인 순간 내게 믿음을 주지 못했었어."

"그랬을 거야... 너가 다가온 게 2학년 3월 중반이었지. 넌 내 뒷자리에 앉게 되었고 내게 편지를 써서 줬었어. 너 캐릭터를 생각하면 아직도 신기한게 넌 그 때 여자애들이 흔히 주고받던 편지 답장도 잘 안써주는 애였잖아, 너. 그러니 너가 '먼저' 편지를 쓴 건 정말 고교 생활 통틀어 나 하나밖에 없을 거야. 야, 이거 자부심 느껴진다. 그런데 내가 널 1단계의 범주에 넣은 건 여름방학 중간이나 끝나서였던 것 같아. ** 자살 사건 첫번째 기억해? 그 무렵이었어. 나로선 굉장히 빠른 진도였지만 그 사이에 분명히 갭이 있지. 우린 매일 한반에서 부대껴야 했으니까. 아마 여름 무렵 넌 마음에서 날 떨어뜨렸을 거고, 근데 이번엔 내가 잡았겠지. 그 때... 그 롯데월드 근처서 한 이야길 생각해보면 둘 다 다가서본 적은 없었던 아이들이라 탐색이 길었는지도 몰라. 혹은 상대의 패턴을 눈치채어 부러 더 역방향으로 가려 했을지도."

"맞아, 어렴풋하게, 2학년 2학기 쯤이 널 1단계에 넣었던 때라고 기억해. 너가 정말 큰힘이 되었었어. 잘하기도 했고."

"사건들도 많았고, 어쩌다보니 사건의 중심에 둘이 있었고, 그리고 항상 옆에 있어줬으니까. 뭐 정신적으로나, 아님 환경미화같은 자잘한 일... 반장이었으니까, 너. 이후 그 이상의 뭔가가 우리 사이에 있지."

"야, 사건. 어찌나 많았는지 정말 기억도 안난다,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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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쓴 건 짧은 한토막에 불과한 이 날의 긴 대화는-설령 그녀와 나 둘 다 "데니스는 통화중" 모드인 점을 감안해도 엄청났던-, 96년 잠실 롯데월드 아이스링크를 내려다보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그녀와 내가 나눴던 짧은 이야기를 기억함에서 비롯되었다. 3월이었고, 그녀때문에 치킨을 먹을 수 있게 된 내가 아직은 치킨을 먹지 못할 때였고, **빌라에서 **으로 이사하기 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삼성동에 사는 그녀와 대치동에 살던 내가 왜 굳이 잠실까지 갔는지(롯데월드에서 논 것도 아니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학교 근처가 아닌 장소에서 처음으로 둘이 만난 날이었다. 함께 영화를 보고 중국요리를 먹고 껌을 씹고 서점에서 영어 잡지를 뒤적이고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샀다.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다가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했었고, 그래서 난 "너 머리 좋잖아. 난 부러워."라고 말해줬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난 내 머리가 날 망쳤다고 생각해." 정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런 기억이 있다. 듣는 모든 이들을 감동시켰다던 그놈의 "3단계 이론"도 좀 구체적으로 생각이 나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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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이십대 중반이 된다. 올해까지는 만 나이로는 아직 중반이 아니라고 우겨볼 수 있었지만. 그리고 서른에도 조금 더 가까워진다.

서른 살. 내 십대는, 훌쩍 서른쯤 되어버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서른 살이 되면 정말 어른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무지개꽃 핀 화려하고 마냥 행복한 인생은 아닐지라도 삶의 주체가 내 자신이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외부의 조건보다는 내 노력이나 실수, 순전히 나로 비롯되는 문제로 인생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스무 살 대학생의 모습을 동경할 때 난 스무 살은 아무래도 어른이 아닌 것 같아 서른이 되고 싶었다. 허나 내가 생각하는 서른 역시 이상일 뿐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스무 살이나 내가 생각하는 서른 살, 결국은 마찬가지다.

스무 살을 기대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열살 쯤에는 열여덟살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열여섯쯤 되서는 내가 기대한 열여덟은 내 인생에 혹은 우리 모두의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단 걸 자연스레 깨달았고, 이 년 더 지난 스무살이래봤자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았다. 불안한 손으로 지정해 놓은 선이 서른이었겠지.

그때는 서른에 가까워지면 내가 뭔가 되어 있고, 돈도 많이 모으고, 어쩌면 독립도 하고 그렇게 살 줄 알았다. 그런데 난 여전히 무엇이 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고, 아마 서른이 되도 그럴 게다. 서른은, 아이로 남기엔 많지만 아직 어른은 아닌 나이이다, 그런 거 같다.

그러고 보면 서른 살에 대해 생각하는 것 오래간만이다. 솔직하게, 대학교 3학년 이후로는 그 나이에 별로 연연하지 않았다.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고민했던 이전과는 달리 온갖 형이하학적 문제가 날 붙잡고 있었고, 박지영은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보다 피부 관리를 받고 매니큐어의 색을 바꾸고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고르는 쪽에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확실히 그런 시기였다.(대학 시절동안 발전한 것이 무엇인가 한참을 생각해보다가, 늘은 거라곤 매니큐어 바르는 실력밖에 없음을 깨닫곤 망연자실할때도 있다) 그냥 즐겁게, 되는대로, 아아, 고민 따위라니, 이십 년 동안 줄창 해왔는데 지겨워, 지긋지긋 해.

변화의 원인이 뭐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남자친구를 사귀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친구들이 그렇게 변해가는 시기였을 수도 있고, 스물 두 살, 세 살이라는 나이 탓일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서 그랬을 수도 있고, 주위의 기대와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였을 수도 있고,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 탓이었을수도 있고, 백만가지의 이유는 한 가지 이유와 같을 것이다.

다시 쓸 것. 뭔가의 소스로 쓰려 했는데 영 정리가 안된다. 너무 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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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촌이라고는 고작 30명 남짓이며, 다른 사람 미니홈피에 방문하여 글을 쓰는 일도 거의 없는 내 **월드 미니홈피의 1일 방문자 수가 100명에 육박했던 날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메일 찾기로 미니홈피를 알아낸 누군가가 찾아왔더라. 유난히 멀리하고 싶었던 사람은 아니었음에도 게시판 폴더의 대부분을 비공개로 해놨던 걸 그때만큼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차라리 말해주지 말지.

그래, 블로그는 블로그다. 꽁꽁 숨어버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한때는 비공개 클럽을 만들고 "엄선된 일촌"들만을 초대하여 회원가입 시켜 미니홈피 대용으로 사용할까 생각했었고, 그러다 어이없어 혼자 웃었다. 그냥 안쓰면 그만일 것을, 인간관계의 그룹이 섞이는 걸 그토록 싫어하는 내가, 일촌 뿐만 아니라 무촌과 이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내가 기어이 미니홈피에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어떤 사람이 내가 주로 사용하는 포털 사이트의 비밀번호를 알아내어 메일과 게시판의 글을 몽땅 훔쳐본 일이 있었고, 삐삐를 사용하던 시절 음성을 도둑맞았던 적도 있었으며, 다른 사람이 내 아이디를 도용하여 글을 써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나는 유명인이 아니니, 결국 삶을 잘못 산 것일까.

어쨌거나 나의 **월드 블로그는 사진첩 모음집이 되어간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사진 혹은 다른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 같은 건 없이 나만의 독사진이 그득그득한. 어차피 얼굴이야 빤히 아는 것 아닌가. 다만 내가 누구와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스케이트를 타는지는 알 수 없을 뿐.

 언젠간 이곳도 마찬가지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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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선생님의 만해문학상 수상 시상식장에 다녀왔다.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것은 일년 반, 상대적으로 다른 학번보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것과는 상관 없이 내겐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작품, 문학세계, 글쓰기 작법을 뛰어넘어 선생님은 존재한다. 불만, 아쉬움, 문학적 견해 차이 따윈 사소하다. 선배들에게 "98학번에서 제일 말 안듣는 녀석"이라고 나를 소개하고, 볼 때마다 "소설 안쓰고 뭐하냐"고 꾸짖고, 사실 몇 번은 지독하게 야단도 맞았지만... 문학을 생각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내 뒷목을 잡아채는 기분도 선생님에서부터 시작된다.

시상식장은, 대개 그렇듯 정말 많은 문인들과, 기자들과, 정계 인사 혹은 교수들로 붐볐고 다른 일로 여유가 없었던 난 후다닥 꽃다발만 드리고 나와야 했지만 2년 전, 김동리 문학상 시상식에 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복잡한 생각들.

그래, 어쩌면, 반드시, 혹은, 이제는, 꼭.

여기에 이런 이야기, 쓰지 말자. 다만 다른 곳에, 그리고 잊지 말자, 오늘의 기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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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2003-11-27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참 잘나오셨네요. 거기서 느끼셨던 기분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잊지마시고 되새기시길 바랄게요.

panky 2003-11-28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명의 힘은 위대하죠.-_-

_ 2003-11-29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해 카.....카메라의 힘도...(퍽..;;)

panky 2003-12-01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드나무로 컴백한 호빈님은, 음, 여전히 매를 버는.........
 

이번 계간 <문학동네> 겨울호 포커스 책이 <검은 꽃>이었습니다. 그래서 원고를 하나 썼습니다. 마이페이퍼 개장 기념으로 올려봅니다.

 

<검은 꽃이 피기까지>

애초에 하려고 했던 일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생각지도 않던 엉뚱한 일만 남은 것을 일컫는 사자성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창작의 세계에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어떤 문학평론가는, 본래 쓰려던 것을 쓰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노동이라고 말한 바 있기도 하다. 옳거니. 맞는 말씀이다. 자기가 뭘 하려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나는 가끔 무섭다. 그건 그렇고.
그 영화감독은 영화로 유명하다는 뉴욕대를 졸업한 패기만만한 친구였다. 이십대에 이미 35미리 장편 영화의 감독이 되었는데 흥행에는 참패했다. 그래도 영화제에선 가끔 불러주는지 이탈리아 어느 시골에서 열린 영화제에서 스타가 된 이야기를 가끔 하곤 했다. 포도를 밟아 와인을 만드는 시실리의 어린 처녀들이 잘생긴 이십대의 영화 감독을 따라다니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유쾌하다. 엉뚱한 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환대를 받고, 그런가하면 팡파레를 기대했던 곳에서 썰렁한 침묵의 야유를 받게 되는 것, 그런 게 있어야 인생에는 어떤 활력이 생겨난다.
그 감독은 찍고 싶은 영화가 많았다. 우리는 2000년에 만났는데 그는 미국식으로 일하고 있었다. 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며 집 근처로 찾아와 무턱대고 함께 시나리오를 쓰자고 했다. 아무래도 나는 점잔빼며 탐색하는 사람들보다는 그런 저돌적인 사람에게 끌리는 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게 치장한 느와르적 풍모가 거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청운의 꿈을 품고 고국으로 돌아와 영화계에 투신한 젊은 교포의 열정을 꺾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뉴욕대 선배 중에는 뉴욕 근처에도 안 가봤을 것 같이 생긴 곽경택이라는 감독이 있었는데 그 무렵 <친구>라는 도저히 흥행할 것 같지 않은 제목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영화를 하시려는 겁니까?"
"뭐든지 자신 있습니다. 시나리오만 써주시면 멋지게 만들겠습니다."
듣는 사람이야 기분 좋았지만 뭐든지 잘 만들 수 있다는 그 자신감은 과도해 보였다. 자기도 좀 그랬는지, "단, 뮤지컬만 빼구요."라고 토를 달았다. 몇 차례의 술자리 끝에 나는 그가 정말 만들고 싶어하는 장르는 역시 느와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패션이 말해준 것이 진실이었다.
나는 그와 일하기로 했다. 그는 신이 나서 영화사를 섭외하러 다녔다. 몇몇 회사가 그의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다. LA의 교포 건달들이 등장하는 데뷔작이, 내용의 완성도나 만듦새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지만, 그 화려한 스타일만큼은 영화판에서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었다. 특히 <장군의 아들> 이후 액션 영화에 목말라 있던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 같은 사람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어쨌든 흘러흘러 그는 대형 블록버스터를 줄줄이 기획하고 있던 신생 영화사와 계약을 맺었고 그와 나는 연세대 내에 있는 한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감독이라는 게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 할 일도 없는 날건달 같은 직업인지라 내가 책상에 앉아 써내려 가는 동안 그는 내내 옆에서 커피며 김밥이며를 갖다 바치며 어서 메가폰을 잡을 날이 오기만 바라고 있었다.
그는 유달리 감동을 잘하는 성격이었다. 내가 몇 장 쓰면 그걸 보고 감탄 또 감탄하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강하게 자기 의견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는 자기 영화에 반드시 넣고 싶어하는 어떤 장면,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그는 아르바이트 삼아 잠깐잠깐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장나라라는, 이름만 봐서는 도저히 뜰 것 같지 않은 무명가수의 데뷔 뮤직비디오를 찰리 채플린 스타일로 강원도 탄광에서 찍어오기도 했는데 주문한 회사에서는 신인가수 얼굴에 숯검댕이가 웬말이냐며 항의하는 바람에 결국 그 실험적인 비디오는 거의 사장되고야 말았다.
어쨌든 시나리오의 초고가 나왔다. 영화사에는 회의를 하더니 이대로는 흥행성이 없다고 했다. 다시 합숙에 들어가 2고가 나왔다. 회의가 다시 열렸는데 전보다 더 심해졌다고들 했다. 다시 3고가 나왔고 영화사에서는 당분간 프로젝트를 보류하는 게 좋다고 했다. (실망한) 그와 (어느 정도는 이런 사태를 예상했던) 나는 술집을 전전하며 예술을 몰라주는 세태를 원망하며 술을 퍼마셨는데 그때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다(역시 예술은 배가 고파야).
소위 '일레븐 데스페라도'의 구상도 그때 나왔다. 미국에 다녀오던 그가 비행기에서 들었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구한말인가 일제시대엔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팔려갔는데, 그 사람들이 나중에 엘살바도르인가로 옮겨가 거기에 나라를 세웠다가 몰살당했다는, 다소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떠난 연도는 1905년이고 간 곳은 하와이가 아니라 멕시코였고 마지막에 가서 죽은 곳도 엘살바도르가 아니라 과테말라였다. 어쨌든 그는 (미구에 자신이 만들) 그 영화의 라스트신만큼은 확실하게 그려놓고 있었다. 11명(왜 11명인지는 모른다)이 마야의 피라미드 위에서 멕시코제 기관총을 쏘다 장렬히 몰살당하는 것이었다. 거기가 엘살바도르이든 파나마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마카로니 웨스턴이나 존 포드 식 서부영화의 황량한 라스트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수첩에 적었다. 별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때는 뭐든지 다 적던 시절이었다. 그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는 있겠지만 그게 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도대체 엘살바도르에서 몰살당한 사람들과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그 구상을 적은 300원짜리 수첩을 서랍 속에 처박아두고 잊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팜므파탈이 등장하는 내 시나리오는 허공으로 날아갔다. 영화사에선 그래도 신의를 지켜 나머지 잔금을 치러주었고 나는 그쪽에서 완전히 손을 털었다. 그후 그 감독은 미국에서 혼자 썼던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들을 전전하며 몇 군데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듣기도 하고 또 막간에 뮤직비디오도 몇 편 찍으면서 세월을 보냈고 나는 나대로 소설에 전념하느라 그를 통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을 정리하는데 그 수첩이 눈에 띄었다. 물끄러미 수첩에 적힌 글귀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처음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떠올랐다. 총질이나 하는 마카로니 웨스턴 풍의 영화 말고 좀더 진지하고 근사한 그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 역시 옆구리를 찔렀다. '왜 그렇고그런 서부극이 될 거라고 생각해? 당신이 쓰면 다를 거야.' 돌아보면, 지난 세기에 내가 저지른 모든 일이 미친 짓이었는데 오직 결혼만이 예외였다.
나는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가 2001년이었다. 감독에겐 가끔 전화가 왔다. 나는 그 구상을 소설로 쓸 거라고 말했다. 그 무렵 그 감독은 한 신생 영화사의 창립 멤버가 되어 자기 방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호기롭게, "혹시 취재 경비가 필요하면 저희 회사에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큰소리를 쳤다. 충무로에 돈이 개똥처럼 흔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제작 경비를 지원받으며 소설을 쓰는 작가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또 그렇게 써서 과연 좋은 소설이 나오겠는가. 게다가 내 마음속에서 이 소설은 점점 영화라는 미디어와 멀어지고 있었다. 영화와는 무관하게 철저히 소설적인 그 무엇이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자료를 통해 속속 사건의 정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05년 1033명의 조선인이 멕시코행 배에 오르는 것이다. 하와이 이민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대한제국의 퇴역군인들을 주축으로 신부와 내시, 무당과 몰락 양반이 한데 어우러진 이들은 4년 계약을 맺고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게 되지만 계약이 만료된 후에도 돌아오지 못한다. 이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나라는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돌아와봐야 별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1910년, 유명한 멕시코 혁명이 시작된다. 에밀리아노 사파타, 판초 비야, 오브레곤이 등장하는 멕시코 역사상 최고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조선인들 중 일부도 혁명에 휩쓸리고 또 일부는 쿠바 등지로 옮겨간다. 1916년, 여전히 유카탄 반도에 남아 있던 젊은 남자들은 과테말라에서 벌어진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다가 무정부 상태인 과테말라 북부 밀림에 작은 나라를 세운다. 이 사건은 1916년 신한민보, 1922년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도 확인이 되었다.
문제는 <애니깽>이었다. 그 영화를 본 사람은 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제대로 개봉도 못하고 막을 내린 영화였다. 주연배우인 임성민이 촬영 중에 죽는 바람에 영화가 엉망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그 얘기를 했다. 내가 구상을 꺼내놓기만 하면 '어, 그거 애니깽이잖아?'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모두 흥미를 잃었다. 상황이 심각했다.
그러나 분명 그 이야기에는 내 영혼을 미혹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써야만 했다. 어쩌면 '유랑'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유랑. 나의 아버지는 오사카 근교의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만주를 떠돌던 할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해군 조선소 곁에 노동자들을 상대로 함바집을 열었다. 거기에서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났다. 대대로 빈농의 후손이었던 할아버지는 악착같이 일해 땅을 살 돈을 모았다. 꽤 수완이 좋았던지 그는 해방 전에 이미 논 마지기를 사기에 충분한 돈을 모아 고향의 처가로 보냈다. 할머니네 집에서는 물론 그 돈으로 논을 샀다.
해방이 되자 할아버지는 일본에서의 장사를 접고 할머니, 그리고 자식들과 함께 요코하마에서 귀국선을 탔다. 그러나 고향에선 엉뚱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 할아버지의 돈으로 산 땅 중에서 일부가 처가 쪽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토지개혁을 거치며 할아버지는 부재 지주로 분류되었던 것 같고 처가 쪽에선 땅을 잃지 않기 위해 경작을 하던 자신들의 이름을 등기부에 올렸던 것 같고 그러다보니 애초부터 그게 누구 땅이었는지 불분명해진 것이었으리라. 해방 후엔 그런 일이 흔했으니까. 어쨌든 그 후로 두 집안은 사이가 틀어졌다. 땅이 거기 있는 한, 그들의 화해는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만주와 오사카를 거쳐 다시 고령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는 자식들을 낳아 먹이고 길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뇌졸중으로,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었다. 초등학교를 마치자 집에서는 더 이상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는 가출하여 대구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혼자 힘으로 야간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사병으로 입대하여 장교가 되었고 몇 년 후 배를 타고 월남으로 떠났다. 바로 그해에 내가 태어났다. 그곳에서 벌어온 돈으로 부모는 서울의 외가 근처에 집을 샀다. 그런데 집장사가  사기꾼이었다. 월남에서 번 돈을 하루 아침에 날린 것이었다. 만약 내 부모가 그때 서울에 집을 장만했더라면 내 어린 날의 유랑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화천에서 태어나 대구(여기에서 내 동생이 태어났다)로, 광주, 진해, 양평, 파주를 거쳐 서울로 입성했다. 1년에 한 번씩 전학을 다녔고 매번 새로운 언어와 게임의 규칙을 익혔다. 나는 빨리 잊고 빨리 배우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유랑의 서사에 매혹되었는지도 모른다. 1996년의 나는 내 소설의 주인공의 입을 빌어,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라고, 제법 폼을 잡고 인생에 대해 아는 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건 그저 내 바람에 지나지 않았을 지 모른다. 사실 멀리 떠나면 모든 것이 변한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고 국가나 이념, 종교와 언어는 모두 그 다음 문제다. 미국으로 떠난 이민자들은 개신교도가 되고 탈북자들은 누구보다 열렬한 자본주의 신봉자가 된다.
나는 아내와 함께 멕시코행 항공편을 타고 멕시코로 날아갔다. 생각 같아서는 이민자들의 행로를 따라 배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멕시코까지 날아가는 비행기만 해도 천신만고였다. (어쩐지 이상하게도 값이 쌌던) 이 비행기는 도쿄와 밴쿠버를 들러 승객을 태우고 가는 바람에 바람에 물경 24시간이 다 걸려서야 치안상태 불량한 걸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멕시코시티 공항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멕시코시티는 그 자체로 라틴아메리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품고 있었다. 인상적인 유물, 가면, 도자기, 피라미드 같은 좋은 쪽으로부터 도둑, 택시강도, 매연, 오염, 무절제, 카니발적 광기, 경제 불안과 같은 나쁜 쪽까지, 모든 것을 다 아우르는 광범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 여행을 시작하는 곳으로는 그만이다.
나는 멕시코시티에서 무사히 일주일을 머무른 후, 비행기를 타고 유카탄 반도의 거점 도시인 메리다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1905년의 조선인들이 각 농장으로 팔려갔다. 나는 메리다에 여장을 풀고 본격적으로 그들의 흔적을 찾아나섰다(어떤 신문은 '그들'을 '조상', 혹은 '선조'라고 쓰고 내 여행을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 나선 고난의 여정'으로 표현했다. 내 소설 어디에도 그런 표현은 없다. 그들은 내 조상이 아니라 1905년 제물포를 떠난 1033명의 조선인들이다. 내 소설에선 이 점이 중요하다. 민족은 가족이 아니다. 나는 몇 번이고 거듭하여 '민족의 수난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민족의 수난사'가 되는 지점에서 소설은 끝나고 '8.15 특집극'이 시작된다).
나는 가능하면 그들처럼 먹고 그들처럼 자려고 노력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에네켄 농장들은 황무지가 되어 있었고 유카탄 반도엔 마야유적들을 찾는 관광객들만 북적거렸다. 수소문 끝에 택시를 대절하여 찾아간 농장 역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으로 변해 있었다. 한때 채무노예들이 북적거렸을 들판엔 녹슨 무개차와 레일이 깔려 있었고 창고엔 에네켄 삼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수북히 쌓여 있었다. 농장주의 저택에서 버스를 타고 온 미국 관광객들이 유카탄의 전통 음식을 먹고 있었다. 햇볕은 뜨거웠고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섰다.
당시의 조선인들이 세웠던 숭무학교 건물은 전자제품 대리점이 되어 있었다.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천천히 멕시코라는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서 소설이 시작되었다.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과테말라로 향했다. 기이한 것은 그들이 나라를 세우고 죽어간 띠깔 역시 지금은 과테말라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밀림 사이로 우뚝 솟은 띠깔의 피라미드들을 보러 일 년에 수십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관광지가 됨으로써 '그들'의 흔적은 더 빨리 사라졌다. 나는 관광객의 한 사람이 되어 가이드를 고용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밀림을 지나고 열대의 새들을 만나고 피라미드에 오르고 허름한 식당에서 콜라와 살사 소스에 버무린 닭요리를 먹었다.
며칠 후 나는 해발 1500미터에 위치한 안티구아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소설의 나머지 부분을 썼다. 그리고 몇 달 후, 도저히 영화화할 수 없는 1350매짜리 장편 소설을 탈고했다. 너무 많은 인물과 너무 광활한 지역이 나오는, 헐리우드조차도 시도하기 어려울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 감독에겐 미안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애초에 하려던 일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을 일컫는 한자성어가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인생의 버스는 항상 엉뚱한 곳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1905년의 그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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