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 PATA
문가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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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용기 없는 날 ‘파타'라고 하자.”


『 파타』는 배우 문가영의 산문집으로, 그가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사람을 만나오며 겪고 느낀 바가 듬성듬성 기록되어 있다. 마음 가득한 말들은 입을 통해 겉으로 표출되지 않고, 손 끝에서 뻗어나와 글로써 우리에게 전해진다. 문가영은 용기 없는 자신을 ‘파타’로 칭했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파타는 필요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문가영이 누구인가? 나는 모른다. 그렇다면 파타는 누구인가?

파타는 자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들을 저주하고, 예쁜 걸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너를 질투한다. 열심히 써내려간 연애편지를 도로 빼앗기도 하는 파타는 기대보단 확신을, 무리에 속하기보단 경계인으로서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 배우가, 이 사람이, 이 작가가 써내려가는 연대기는 제법 혼란스럽고 우울한 감상을 준다. ‘용기는 거짓보다 진실을 전할 때 더 필요로 한다(102면)는 걸 알기에 진심을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파타는 ‘새로운 사람을 안아주느니 아는 사람을 두 번 세 번 안아줘야겠네(109면)’라며 따뜻한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 문득 열 손가락을 펴고 계산을 해 보았을 때, 죽을 때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은 서점에 있는 것만큼도 못 하겠다는 감상을 하기도, 매년 한 번씩 여행을 간다고 해도 지구의 반조차 모를 것 같다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문가영이 누구인가? 나는 여전히 모른다. 하지만 파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이제 나는 파타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파타는, 가면을 방패삼아 뒤로 도망친 또 다른 자아가 아니다. 파타는, 카리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주기도 하고, 부모님의 기쁨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파타는 살아있다. 이 모든 순간들을 거치며, 그들과 함께.

"사람들이 자꾸만 내가 행복하기를 빌어주는 거야. 그들의 소망이 덕지덕지 내 몸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 널 사랑하기 때문인 걸 잘 알지 않냐는 말에 "알아. 내가 나쁜 거 알아. 아니, 이게 싫은 거야. 자꾸만 내가 나쁜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 그저 사는 나에게 자꾸만 행복하라고 하잖아! 그게 잘못된 건지 사람들은 모르나 봐. 그 마음이 얼마나 이기적인 건지." - P39

"난 무거운 임무에서 도망친 건데, 떠난 나에게 또 물어보더라. 여행은 행복하냐고. 돌아온 나에게 또 물어보더라. 어땠냐고. 다녀오니 행복하지 않으냐고." - P40

파타는 기대보다 확신을 사랑했고 기대라는 말보다 인정이 필요했다. - P41

용기는 거짓보다 진실을 전할 때 더 필요로 한다는 걸 그녀는 이때 알게 되었다. - P102

문득, 파타는 열 손가락을 펴고 계산하기 시작한다. ‘정해진 시간 아래 내가 죽을 때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쯤 되려나.’ 서점에 있는 책만큼도 못 읽겠네… ‘정해진 시간 아래 내가 몇 명의 사람을 더 안아줄 수 있으려나.’ 새로운 사람을 안아주느니 아는 사람을 두 번 세 번 안아줘야겠네… ‘정해진 시간 아래 여행을 몇 번이나 갈 수 있으려나.’ 매년 한 번씩 간다고 해도 지구의 반도 모르겠네… - P109

"어딘가에서 같이 공기를 나눠 먹고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그래도 불쑥 괘씸할 땐 숨을 조금 크게 들이마셔. 걔가 마실 공기가 조금은 부족하길 바라면서." - P113

그녀는 이 작은 방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지만 얕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얼굴도 모르던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했던 그녀는 이 작은 방에 홀로 들어왔다. 시간을 사는 일은 간단했지만 그 공간을 채워야 한다는 건 꽤 어려웠다. - P130

성공법칙 ― 잘 되는 사람의 이유와 내 주변의 실패와 내 경험의 판단이 합쳐지면 틀릴 이유가 없는데 - P153

입을 다물고 창을 바라보니 새가 울었다. 새소리조차 듣지 못한 내가 창피했고 새소리로도 행복해 하던 네가 부러웠다. - P183

겨우 예쁜 걸 예쁘다고 생각해낸 내가 기특할 뻔했는데, 소리 내어 말하는 네가 또 부러웠다. 별걸 다 질투하네. 부끄럽다 하자. - P185

꽉찬 말 — 빈말로 쓴 단어는 하나도 없고 진심이 안 담긴 문장조차 없어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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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십육일 -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 에세이
4·16재단 엮음, 임진아 그림 / 사계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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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97년생. 누가 나를 소개해보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이렇게 말할 것이다. 2024년을 맞아 27살이 된 저는 비운의 97년생입니다, 라고.


수학여행을 떠올려보자면 나에겐 기억이 없다. 그도 그럴게 초등학생 때는 신종플루 때문에 졸업여행이 취소되었고, 중학교 땐 팔공산에 야영을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무슨 멧돼지가 나오는 바람에 못 갔고, 고등학교때는 세월호 참사가, 대학교 후반부에 터진 팬데믹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까지. 이 모두 97년생인 내가 겪었던 일이라면, 비운의 97년생이 아니고 달리 뭐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그래. 2014년 4월 16일을 모두가 뚜렷하게 기억할 것이다. 4·16 재단에서 매월 16일 연재한 『월간 십육일』에 참여한 저자들도 그날 각자 다른 위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던 사람,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던 사람, 길을 걷던 사람. 모두가 일상을 살아내고 있던 사람들일 뿐이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그때 교실 한 쪽 편에 앉아 졸업여행을 어디로 가면 좋을지 학급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가는 수련회는 아니었지만, 기념으로 삼을 만한 이벤트는 처음 맞아보는 셈이었다. 제주도가 좋을까? 해외에 갈 수 있을까? 부푼 기대가 여러 입을 통해 표출되고 있을 때 소식을 접했다. 배가 가라앉고 있다고. 거기에 우리와 꼭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타고 있다고 했다. 수업 하나가 끝났을 때는 전원 구조였고, 다른 수업이 끝났을 땐 오보였고, 또 다른 수업이 끝났을 땐 참담한 소식이 전해졌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는데 습관처럼 틀어놓은 TV 뉴스에서는 연신 세월호 관련 속보가 이어졌다. 그때 나는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했더라? 울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울 줄을 몰랐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나는 그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며, 어떻게 해야하는 지 전혀 알지 못했다.


후에 옆 학교에서 마침 타려던 배가 세월호였지만 모종의 사유로 일정이 미뤄졌었단 얘기를 들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와전된 것이든 간에 그제서야 좀 실감이 났다. 아,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구나. 그게 우리였을 수도 있었겠구나. 바다 밑에 잠긴 아이들이 단원고 학생들이 아니라 우리였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서웠다. 결국 졸업여행이 취소되었을 때 실망한 기색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당연한 슬픔과 애도의 물결이 온 국가를 뒤덮었고, 우리 또한 불쌍한 아이들이 되었다. 이슬아가 ‘딱 이맘때 아이들이었겠구나(34면)’라고 느낀 것처럼, 어른들은 나를 긍휼히 여겼다.


그런 내가 이제야 너무 슬프다고 고백하자니 미안해서 미칠 것 같다. 피해자 대부분이 내 또래였기 때문에, 그들은 살아보지 못한 10년이란 세월을 내가 대신 걸어왔기 때문에 나는 지독히도 슬프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들 하는 것처럼, 이태원 참사를 직접 겪은 나에게 세월호 10주기는 너무나 참담하게 다가왔다. 10년이 지나서야 더 깊은 눈물을 흘리고 공감하는 것이 희생자들에게, 유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까먹어서, 구태여 드러내야할까 싶어서 SNS에다 세월호 관련 언급을 건너뛰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제대로 슬퍼할 줄도 모르는 아이였던 내가 강산이 바뀌는 세월이 지나서야 지독한 슬픔에 잠겨버릴 줄 아는 성인이 되었다. 그게 자그마치 3,600여일이 지난 시점이라니. 죄스럽고 속상했다.  이 죄책감을 어떻게 하면 떨쳐낼 수 있을까 싶어 어제는 『월간 십육일』 북토크에, 오늘은 안산에 다녀왔다.


안산에는 난생 처음 가보았다. 겨우 마음을 먹고 방문할 곳을 이곳저곳 저장해놓고 갔는데, 추모식과 안산 문화예술의 전당 3, 4 전시실에서 열린 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물품 특별전 <회억정원>을 보고 나니 진이 빠져서 도망치듯 서울로 돌아왔다. 작은 물건들에 담긴 이야기들에도 눈물 콧물 쏙 빼는 게 힘들었다. 이걸로도 모자라 10주기를 맞아 개봉한 영화 <바람의 세월>까지 훌쩍이며 봤으니 그날 바다에 묻힌 이야기들을 꺼내어 보는 게 나에게,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경험일까 싶은 의심마저 들었다.


김신지는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기억을 열어볼 수 있단 가정을 두고 느낄 점들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모르던 사실이 너무 많아서, 어쩌면 그제야 이 사람을 알아가는 기분이 들거야. 이런 걸 기억했구나. 이런 순간을 좋아했구나. 이 사람, 마음이 오래도록 여기에 머물렀구나. 그러다 끝내는 어째서 이 깊고 넓은 존재가 사라졌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다시 울게 되겠지.(139면)’


그 사람의 기억은 너무나 그 사람만의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하기 전에, 이건 모두가 보유하게 된 기억임을 살펴야 한다. 우리들이 잊지 말고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기억이다. 기억은 힘이 세다. 방문한 전시의 총괄감독인 서영걸의 말을 빌리자면 ‘기억물품이라 칭해지는 세월호참사 희생자들의 유류품이 가져오는 기억은 개인적인 범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라면, 책임의 주체가 국가라고 한다면 사회적 기억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기억은 현재의 시간과 연결되고,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중첩된다.


예컨대 이태원 참사가 있은 이후, 강원도에 여행을 갔을 때 강릉에 산불이 크게 났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질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서 불이 막 여기저기 옮겨 붙었다. 그때의 나는 인명 피해가 없길 기도하는 것보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재해를 몰고 다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최현수가 잇따른 참사를 두고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 같다고,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다(217면)’고 말한 것처럼, 살아있어도 사는 게 아니었다. 모든 사건·사고를 내가 직접 겪고 일으킨 것처럼 아팠다. 이걸 친한 친구에게 말했더니 너는 재해를 불러오는 사람인 게 아니라 재해에서 살아남은 인간이랬다.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곳에서 연대와 실천은 기억에 기반한다. 나는 그걸 유념하기로 했다.


그래. 우리는 살아남았다. 이 모든 일에도 살아남아서 애통해하고, 분노하고, 명복을 빌어주고, 서로를 위로하며 위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지금에서야 또다시 슬픈 한편, 슬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운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추모의 이유를 드러낼 수 있으니 현명하고 똑똑한 것이다. 그러니 살자. 살아남은만큼 살아서, 비통에 찬 울분을 터트리고, 낙루하고, 애쓰자. 그 결과가 어찌됐건 내 자리에서 슬퍼하는 것. 그것에서부터 모든 변화가 시작된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 추모 프로그램은 아래에서 자세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416act.net/29/?idx=19228349&bmode=view 




내 마음 아플까 봐 못 보겠다, 이 말이 얼마나…. 그것을 감당하고 맞서서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는 진짜 얼마나…, 작고 좁은 마음인지 알겠더라고요. - P29

이 정도 자랐고 키와 머리와 체구…. 딱 이맘때 아이들이었겠구나. 처음 실감하게 되었죠. 조금 다른 의미로 미치겠더라고요. 이름을 읽었을 때보다, 딱 그맘때 애들이 생생하게 움직이는 것을 가까이서 봤으니까요. - P34

창문 하나 내지 않은 지하 공간은 사람들의 눈물과 회환, 피로로 공기의 밀도가 한계치에 다다른 듯했다. - P81

그런 생각을 해봤어.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을 떄, 그의 기억을 열어볼 수 있다면 어떨까. 더 가까울 수 없을 만큼 가까웠던 사이여도, 그 사람의 기억은 너무나 그 사람만의 것이어서 나는 슬프고도 당혹스럽겠지. 모르던 사실이 너무 많아서, 어쩌면 그제야 이 사람을 알아가는 기분이 들거야. 이런 걸 기억했구나. 이런 순간을 좋아했구나. 이 사람, 마음이 오래도록 여기에 머물렀구나. 그러다 끝내는 어째서 이 깊고 넓은 존재가 사라졌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다시 울게 되겠지. - P139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 같다고,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 P217

304명의 죽음은 304가지 사랑의 소멸이라는 것. 304개의 전구가 꺼진 만큼 세상은 어두워졌겠고 304개의 사랑 이야기가 중단된 만큼 인간 정신은 쪼그라들었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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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 생존자와 유가족이 증언하는 10·29 이태원 참사
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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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그날 이태원에 있었다.


삶은 대체로 평온하다. 가난한 삶이든, 부유한 삶이든 각자의 우여곡절이야 있겠지만 대체로 인간의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비슷하다. 마치 인생이란 물질이 어떤 항상성을 띈 것처럼 지진부진한 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니 모든 테러와 재해와 사고가 별다를 것 없는 날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예고장 없이 불현듯이 찾아오는 시련. 거센 소용돌이 같은 그것은 2022년 10월 29일, 아주 보통의 나에게도 찾아왔다. 내 품에서 한 청년이 죽었고, 내 눈 앞에서만 수십명이 죽었다.

할로윈의 이태원이 처음은 아니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이전에는 종종 이벤트를 좇아 찾던 곳이었다. 좁은 골목을 누비는 인파, 새벽까지 붐비는 술집, 아예 거리 밖으로 난 스피커에서 터질듯 울려대는 노랫소리.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한 해를 강타한 영화와 각종 TV쇼 속 주인공들을 따라한 사람 구경이었다. 혹자는 나이가 들수록 매해 있는 생일보다 4년에 한 번 뿐인 월드컵과 올림픽이 더 재밌어진댔으나, 서커스단 같은 무리 속에 섞이는 일은 매년 겪어도 낯섦과 설렘이 공존했다.

작년에는 갓 서울에 상경하여 나와 한 집에서 살게 된 C와 함께 이태원을 가기로 했었다. C는 축제라면 가리지 않고 찾을 정도로 활발한 편이어서, 할로윈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기에 ‘할로윈 하면 이태원이지!’ 그런 속설을 들먹이며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나에게는 하염없이 익숙한 곳이, 초행인 친구에게는 낯설고 새로운 곳이 되리란 생각에 신이 났다. 언니만 믿고 따라와.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다이소에 들러 메이크업에 필요한 것들을 급하게 사고 무려 2시간동안 화장을 했다. 공들인 시간을 따지면 분장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하겠다. 우리는 마치 삐에로처럼 눈 위아래로 구슬 모양을 그렸고, 검은 잉크로 물들인 깃털을 붙이기도 했다. 허리 벨트에는 인형들을 주렁주렁 달고는 그것도 모자라 머리띠까지 썼다. 그맘때쯤 집 한켠에 세워둔 행거가 걸린 옷들의 무게를 못 견딘 나머지 쓰러져있었고, 깃털을 염색하느라 화장실 세면대가 지저분해졌지만 아랑곳않았다. 그것들은 아주 부차적인 것으로 신경조차 안 쓰였다. 우리에겐 끝내줄 게 분명한 할로윈의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기다린 파티. 사람들과의 만남. 신나는 밤이 될 것이 확실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행운이 크게 다가온 하루였다. 손님 발길이 드문 찰나를 틈타 맛있는 피자를 먹었고, 신논현에서부터 사람을 가득 실어나르는 버스에서는 운 좋게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었다. 이태원퀴논길과 세계음식거리를 지나칠 적에는 사람이 많은 게 싫어서 이태원어린이놀이터공원에 들러 우리끼리 한참을 깔깔대며 놀았다. 관광객이나 외지인들은 몰랐겠지만, 그날 이태원은 그렇게 한 골목만 비껴나도 고요했다.

아무래도 주민들이 사는 동네라 한적한 길거리를 유유히 부유하며 한창 유행하던 틱톡 챌린지를 따라 찍고 나니 배가 좀 고팠다. 아마 10시를 넘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단골이던 타코집은 영업시간이 마감되어서, 발걸음을 돌린 우리는 타파스바란 식당을 가기로 했다. 아니나다를까 그 앞 거리는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에도 이태원에 왔던 나는 C에게 그때보다는 사람이 적다고 말했다. 사람간 간격도 널널하고, 걷는데 불편하지 않네. 이런 식으로 친구를 안심시켰다.

막상 타파스바에 도착하고 보니 바로 식사를 할 수는 없었고 웨이팅을 해야 했다. 시간이 시간이다보니 다른 곳을 갈 여력은 없어 가게 앞에서부터 골목이 꺾이는 곳까지 선 줄을 따라 서서 사람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우리 앞에 대기하고 있던 커플은 깜찍한 교복을 짝맞추어 입고 분장 퀄리티도 대단해서 여러명이 지나가며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우리도 열심히 분장했는데 왜 아무도 같이 사진 찍자고 안 물어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길 안쪽에서 어떤 남자가 당황한 듯 뛰어왔다. 의식이 없는 여자를 업은 채였다.

처음에는 술 취한 사람을 부축해 온 줄 알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헤롱대는 사람일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실려나오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갈 때도, 뛰어오는 사람들의 코스튬이 경찰복과 소방관 유니폼인 경우가 더러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퍼레이드 같은 행사인걸까 싶었다. 걱정되긴 하지만 별 일 아닐거라고. 금방 해결될거라고 믿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사이로 웅성거림이 커졌다. 처음에는 화재가 났다고 했다. 저 앞 어떤 지하 클럽에서 불이 났다며 누가 손으로 가리켰다.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검은 연기는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 실려 나오는 사람들 모두 맨발인 상태여서 여기에 실내 클럽이 있었던가 기억을 되짚으며 더 의문에 빠졌다. 그때 누가 소리쳤다.

“안쪽에 더 많으니까 남자분들 가서 도와주세요!”

망설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말을 듣자마자 뛰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속이 탔다. 나도 뭔가를 하고 싶었다. 남자가 아니어서, 고작 여자란 이유 하나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어야한다는 사실이 짜증났다. 무엇보다 답답했던 건 아무도 정확한 정보를 모르는데 소문만 무성해진 상황이었다. 바로 휴대폰을 꺼내 네이버에 들어가 기사를 검색했다. 최신순으로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트위터를 켜서 이태원을 검색했다. 올라온 소식은 10개가 채 안됐다. 마약이 퍼졌단다. 3명이 죽었다고. 대한민국에 마약 파문이 인 지 얼마나 됐다고 이 즐거워야 하는 날 마약을 퍼트렸을까 안타까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어떤 마약이길래 한 날 한 시에 쓰러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거지?

“대로에 자리가 없으니 여기 눕히고 CPR 해야할 것 같아요.”

그 소리를 기점으로 사람들이 차곡차곡 자리잡혔다. 왼쪽부터 시작해서 오른쪽 끝이 보이지 않는 골목까지 헐벗겨지거나 헝클어진 사람들이 눕혀졌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CPR 할 수 있으신 분들은 나와서 도와달라고 했다. 불과 몇 달 전에 라이프가드 자격증을 땄기 때문에 나를 향해 외치는 말 같았다. 내가 해야 할 것 같았다.

“나 나갈까?”

사정을 알고 있는 C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고 생각했는데, 추후에 C와 얘기하다 보니 이미 나는 소지품과 머리띠를 모두 친구에게 맡기며 길 한가운데로 뛰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맡은 분은 체구가 작은 여성이었다. 현장이 급박하다보니 흰 블라우스를 잡아 뜯듯이 벗겨내고 몸을 옥죌만한 옷들은 다 풀었다. 허벅지며 몸 곳곳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압사의 자국이란 걸 나중에 뉴스를 보고 알았다. 나와 같이 부푼 마음을 안고 예쁘게 차려입고 왔을텐데 한 명은 바닥에 누워서 숨도 못 쉬고 있고, 한 명은 심폐소생술 하고 있고…… 그 형편이 기묘했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 상황을 해결해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CPR은 세명이서 교대로 돌아가며 했다. 뭇 남성들이라면 군대에서 CPR을 의무적으로 배우기 때문에, 구조 활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성이었다. 여자들은 피해자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혈액 순환을 도왔다.

물론 당시에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았다. 심폐소생술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거나, 자세가 엉망이라던가, 의사 행세를 하며 도움 안되는 말을 거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도무지 상황이 나아지질 않았다. 드라마나 영화처럼은 아니더라도 나는 다들 살 줄 알았다. 초반에는 사람들이 기절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들 금방 기침을 토해내고 숨을 쉴 줄 알았다.

여기서 밝혀두자면 그곳에는 참사를 막을 방파제나 댐이 없었다. 어떤 절차나 프로세스가 없었고, 눈에 닥치는 대로 조치를 취하기에 급급했다. 근데 그 얄팍한 조치조차 공권력을 가진 어느 기관이나 정치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컨대 내가 아는 CPR의 단계는 거기 검은색 모자 쓰신 분 119 불러주세요. 파란색 옷 입으신 분 제세동기 가져다주세요. 구령을 붙이며 CPR과 인공호흡을 하기. 딱 그거였는데,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119에는 누가 신고했겠거니 싶어 생략했고, 이미 신고가 들어갔을테니 제세동기는 응급구조사가 가져다줄 거라고 믿었다. 아니면 이미 누가 쓰고 있어서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거라고. 그리고 인공호흡은……. 못했다. CPR을 몇 분 하자 희생자분의 입 밖으로 피가 역류했기 때문이었다. 온 몸이 찬데 흐르는 피만이 유일하게 뜨거웠다. 인근 식당 등지에서 전달 받은 냅킨으로 닦긴 했지만, 닦아도 닦아도 피가 나왔다.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면 입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피를 게워내야 했는데 무서워서 못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자원해서 나오긴 했지만, 내 손에 피를 묻히는 게 겁이 났다. 그런 위인은 못 됐다. 내 그릇이 그랬다.

때마침 응급구조사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성분이 오셨다.

“저기요, 이 분 상태가 심각해요. 좀 봐주세요. 제세동기는 언제 오나요?”

다급하게 붙잡고 물었더니 한참을 내려다보다 일단 CPR을 계속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또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우린 그 말만 듣고 다시 CPR을 번갈아가며 계속 했다. 얼마 동안 했는지도 모르겠다.

“저희 한 30분은 했죠?”

“네……”

완전히 지쳤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서로 침묵 속에서 CPR만, 하란대로 그 빌어먹을 CPR만 했다. 다들 알았을 것이다. 이미 돌아오지 않는 호흡과 뛰지 않는 맥박을 미루어보아 이 사람이 진짜 죽었다는 사실을. 늦었단 걸 아는데, 이건 다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다들 모른 척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두면 이 사람이 진짜 잘못될까봐, 아직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더이상 CPR을 할 수 힘이 남아있지 않아 미안하지만 다른분께 계속 해달라고 부탁드리고는 일어섰다. 그제야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현장은 정말 아비규환, 아수라장, 혼돈, 그 자체였다. 구조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통제 속에서 식당이나 가게 등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시체들과 구조자들만으로 거리를 꽉 채운 광경은 경악스러웠고, 몸을 돌렸을 때 경찰 한 분이 머리에 손을 짚고 있는 걸 보았다. 아마 그 분도 처음 보는 상황이었을 것이었다. 어찌하면 좋을 지 몰라 우두커니 서서 황망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아,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느꼈다.

그 길로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 전까진 울어야 하는 상황인지도 몰랐는데, 곳곳에서 훌쩍이는 사람들을 보고 절망이 물밀듯 밀려왔다. 체제의 마비와 공권력에 대한 원망보다도 인간의 무력함과 한순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내가 왜 울지? 싶으면서도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모르는게 너무 많았다. 내가 더 뭘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저 식어버린 손을 주무르며 어떻게 여기서 죽어, 너는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따위의 말들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아직 못해본 게 많을텐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불러도 없는 대답에 성호를 긋고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올리려다 그러면 이 사람이 정말로 죽은 게 될까봐 그러지도 못했다. 대신 나중에 신원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나뒹굴던 소지품을 곁에 꼭 붙여주었다.

내가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울고 있자 타파스바의 유리창 너머로 상황을 지켜보던 C가 황급히 나와 너 안되겠다고, 집에 가야겠다고 강경하게 팔을 붙잡았다. 조금 뿌리쳤던 것 같기도 하다. 안쪽에 사람이 더 있다는데, 남아서 할 수 있는 걸 더 해야 하는데. 이미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나는 C가 이끄는대로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로 향했다.

대로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져있었다. 내가 황당했던 점은 앞에 분명 자리가 없어서 골목에 사람들을 눕혔다고 했는데, 큰 길에는 사람이 몇명 없었던 점이다. 해봤자 10명쯤 되는 사람들만이 눕혀진 채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거나 구급대원들에게 전문적인 CPR을 받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폴리스라인을 넘어 소방대원에게 뚜벅뚜벅 걸었다.

“저기 안쪽에 사람들이 더 있어요. 안에 진짜 심각한 사람이 있어요.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 안에도 사람이 있어요?”

소방관들은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더니 안쪽에도 사람이 있다며 그제야 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 곁에 남아 좀 더 도울지 고민하다 C도 있고 하여 집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다시 폴리스라인 밖으로 나갔다.

온 골목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태원을 빠져나가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아마 삼각지까지 걸어갔던 것 같은데, 간간히 응급차들이 웽 하는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갔다. 이미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 싶어 또 울었다. 상황을 따지지 않고 팔 걷고 돕는 시민들의 합심이나 미담이 이 세상을 밝게 만들기엔 이 얼마나 허망하고 어이없는 죽음인가. 정말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아무도 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참사가 발생한 지점을 좀 벗어나니 그제야 이태원에 도착한 사람들이 웃고 노래 부르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엉망이 된 얼굴로 비척비척 걸어가는 나를 보고 흠칫하거나, 상황 파악을 못하고 추파를 던졌다. 평소라면 눈치도 없다며 미웠을 그 사람들은 모두 다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다들 무사했으면 좋았을걸.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를 부르며 버스킹하는 사람도 있었다. 딱히 구슬프지도 잘 불렀던 것 같지도 않은데 아직 상황이 전파되지 않은 딴 세상에서 흐르는 그 노래가 심장에 퍽퍽 박혔다. 만일 그대 내 곁을 떠난다면 끝까지 따르리, 저 끝까지 따르리, 내사랑 그대 내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이 가사가 꼭 세상을 떠난 희생자분을 배웅하는 노래 같았다. 나는 그게 감당할 수 없을만큼 슬펐다.

잠실까지 가는 대로가 통제되어 있다는 C의 말을 듣고, 우린 안암에 있는 C의 동생네 집까지 가는 택시를 탔다. 사실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버스도 탔던 것 같은데, 그 안에서 뒤늦게 도착한 재난 문자와 사망자 수가 몇십명으로 집계된 기사를 보았다. 그렇구나. 다들 죽었구나. 다들 거기서 그렇게 생을 마감했는데 나는 도망쳐나왔구나. 죄책감에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윤석열이 방금 어떤 반응을 했단 기사도 보았다. 모든 게 다 의미가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수습한다고, 그런 가시 박힌 생각들이 자꾸 샘솟았다.

안암에 도착하니 그날 아마 연고전이 있었던 모양인지, 승리의 기쁨과 취기에 왁자지껄 떠드는 학생 무리들을 몇 번 맞닦뜨렸다. 나는 걔네라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한창 즐거워할 나이의 너네가 살아있어서 정말 감사하다고. 너네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C의 동생은 따뜻한 차를 대접했다. 그것도 미안해서 울었다. 나 스스로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을 자격도, 잠을 청할 자격도 없다고 여겼다. 겨우 얼굴과 손발만 닦고 자리에 누워 휴대폰을 확인했다. 사망자 수는 100명을 훌쩍 넘어 있었고, 이태원에 간 걸 아는 사람들로부터 카톡이 와 있었다. 괜찮아? 너 어디야? 응 나 괜찮아. 잘 돌아왔어. 동이 트기 전에 C의 어머니로부터도 전화가 왔다. C와 C의 동생이랑 연락이 안 된다고. 온 가족이 (뒤에서 할머님까지 웅얼거리는 소리가 넘어왔다) 걱정하고 있다고. 자고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어요. 그렇게 모두를 안심시키고 몇 분쯤 눈을 붙였다. 아침에 전화가 온 엄마에게도 나 괜찮다고 말했다.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에서 저자 김초롱이 말했듯, 나 또한 “뉴스에서 다루는 참사 사상자와 내가 전혀 상관이 없는 듯 의식적으로 덮으려 했다(77면)”. 이더러 몇몇의 친구들은 너네라도 살아 돌아와 정말 다행이고 행운이라고 했다. 나를 위해주고 가장 생각해주는 이들의 안도란 걸 마음속으로는 알았지만, 그게 몹시도 싫고 경멸스러웠다. 그럼 거기서 죽은 사람들은 단지 운이 없어서 죽은거냐고 따져묻고 싶었다. 마음속에 가시가 점점 돋아났다.

더 이상 서울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음날엔 선약이 있던 친구와 간신히 얼굴을 보고는, 곧바로 대구로 내려갔다. 눈만 뜨고 있으면 눈물이 나니, 회사에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매진인 기차표를 겨우 구해서 짐도 챙기지 않고 기차를 탔다. 내려가는 내내 마스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동대구역에 내리자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인데 갑자기 내려온 나를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간신히 참던 눈물이 또다시 터졌다. 엉엉거리며 안겼다. 엄마 사실 나 이태원에 있었어. 내 눈 앞에서 사람이 죽었어. 내가 어떻게든 하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숨을 안 쉬어. 피가 났는데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했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대구에 있는 일주일 동안은 눈만 뜨고 있으면 울었고, 그래서 회피성으로 잠을 17시간정도 잤다. 두근거림, 두통, 호흡곤란, 불안감, 죄책감, 우울감, 이 밖에 기타 등등의 증상을 몇 달간 앓았다. 회사에 복귀하긴 했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만무했다. 손이 너무 떨려서 글씨조차 쓰지 못했고, 집중도가 떨어지니 똑같은 이메일을 수십번 읽어야했다. 휴직을 하기 위해 진단서를 타러 병원에 여러번 내원할 때에 상사는 ‘네가 이태원 때문에 힘든 것도 있겠지만, 일을 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것’이라며 가스라이팅했다. 심리적으로 약해진 나는 진짜 그런가? 사실 퇴사하고 싶은데 이태원 일을 계기로 이러고 있나? 스스로 검열했다. 위에서 언급한 책에서 김초롱이 말했듯, 나는 몸도 다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고 멀쩡히 숨 쉬고 살아 있으며 다만 그냥 거기에 있었을 뿐(43면)이었으니까. “가족과 사별했거나 친구를 잃은 것처럼 ‘가까운 누군가를 잃은 경험’이라면 충분히 이해할만 하나, 알지도 못하고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잃고 힘들어(70면)”하는 상실감은 남들이 볼 때 납득할만한 이유는 못 된다고 여겼다.

상담을 받으며 여러 차례 테라피를 시도했지만 오히려 같이 이태원에 갔고, 같이 사는 C와 상태를 비교하며 상태가 악화되었다. 새로 배우던 운동도 제대로 못해내자 자존감이 수없이 깎였다. 아무것도 잘 하는 게 없었다. PTSD가 세게 오자 자살충동이 심해졌다. 사실 나도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고,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죄를 씻기 위한 결론은 죽음이었다.

상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휴직계를 내고 대구에서 요양을 했다. 첫 3달은 집에만 있었고, 그다음 3달은 운동을 했다. 그 다음 3달은 새로운 악기를 배우며 시 쓰는 법을 배웠다. 몇 차례 회사로 복귀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의사 선생님이 말렸다. 아직 섣부른 것 같다고. 약물 치료를 하고 좋아하던 여행도 가보며 그 사이 많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진심을 꾹꾹 눌러담아 쓴 편지를 몇 차례 펼쳐볼때마다 감동에 찬 눈물을 훔쳤다. 조심스러워하느라 마주보고 말을 건네지는 못해도, 마음이 느껴지는 문장들에 가슴이 아려왔다. 이들을 두고 어떻게 가겠는가. 과분한 사랑에 살아야겠다고,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시 10월이 돌아오자 나도 뭔가를 해야할 것 같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이제 숨지 않고 나서야겠다고. 당시에 못했던 일들을 지금이라도 해야겠다고. 그래서 용기를 냈다.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북토크에 가 유가족분들과 얘기를 나누었고, 인권 센터 선생님과 만나 기록과 운동에 힘을 보탰다. 1주기 추모집회도 가서 자리를 지키며 포스트잇에 이렇게 썼다.

정말 미안합니다.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이때까지 모르는 척 해왔어요. 제 몸 하나 가누느라 바쁘단 핑계를 댔습니다. 이기적으로 보이겠지만, 저도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합니다. 일상을 보내고, 웃어도 보고 이제 그럴려구요. 이제 마주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늘나라에서 편안할 수 있도록, 가족분들과 같이 싸우겠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욕심이라면 이마저도 미안합니다. 그러니 저를 잘 살펴봐주세요.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을 돕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지 감시해주세요. 저 정말 잘 살아가겠습니다.

기세를 타 같이 독서모임 하는 친구들에게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를 선물하며 같이 얘기 나누는 자리도 마련했다. 파라마운트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Crush>를 수급하여 당시의 영상도 함께 보는데, 더이상 죽고싶을만큼 괴롭지 않았다. 이제 그 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많이 괜찮아졌다. 그 날 함께 구조 활동을 했던 사람들, 목격자들, 생존자들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1년동안 많이 힘들었을 테지만 꿋꿋이 살아냈길 진심으로 바랄 수 있게 되었다.

2022년 10월 29일의 이태원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거리에 각자의 사연을 남겨두었다. 아직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한 이야기들은 몇 개나 있을까. 내가 전하는 이야기 말고도 다각적인 조각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에서는 “국가 부재 상황에서 서로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쓴 이들이 적지 않건만 그날을 증언하는 이들은 너무 적다(6면)”고 일컫는다. “혹여 자신들의 말이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 말을 고르다 채 토해내지 못하고 일어선다(9면)”는 것이다.

기타노 타케시는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라고 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합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을 힘이 된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으면, 우리가 똑바로 다시 이태원을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이태원 참사에 관한 소식은 하기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1029ac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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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도시를 생각해 - 우리가 먹고 자고 일하고 노는 도시의 안녕을 고민하다
최성용 지음 / 북트리거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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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사를 했다. 원래 살던 동네가 한적하고 조용해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는데, 물가를 반영하듯 자연스레 오른 월세와 겨울철 동파 방지를 위해 세탁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고택의 문제점 등의 이유로 갑작스럽게 결정된 것이었다. 책 『내일의 도시를 생각해』 작가의 말마따나, 내가 그 동네를 좋아하건 말건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계약할 당시에는 이사 갈 곳의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입주하고 나서 필요한 곳 이곳저곳을 들르다보니 사람들이 왜 ‘역세권’에 혀를 내두르는 지 절실하게 체감하게 됐다. 생활과 여가에 필요한 공간과 시설물들이 걸어서 10분 거리 내에 있었다. 각종 노선으로 뻗쳐나가는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 수많은 도서를 마음껏 대출할 수 있는 도서관, 주거래 은행, 맛있는 빵집, 고즈넉하거나 신상인 카페들, 최신 개봉 영화들을 밤낮으로 상영하는 영화관, 생필품 판매점, 대형 마트, 백화점, 각종 상점들과 음식점은 물론 술집들이 즐비해있는 시가지까지. 내가 아는 한 나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이 엄청난 기반에 감탄하기도 잠시, 최성용의 『내일의 도시를 생각해』를 읽고 나서는 이 도시의 화려한 면모에 현혹되어 사실은 내가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도시에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아니, 그것들이 훨씬 많았다. 『내일의 도시를 생각해』에서는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이 도시의 구조물들과 그 구성 요소들을 훑어보며, 그 발생 연고와 문제점 그리고 개선 방안까지 챕터별로 꼬집는다. 인간들의 삶만 살펴보지 않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작가가 공감했듯, 따지고 보면 도시는 원래 동식물들의 땅이었고, 그 땅을 사람들이 점령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투명 방음벽이었다. 매번 드라이브를 갈 때마다 고속도로 양 옆에 펼쳐진 울타리의 정체가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그게 바로 방음벽이었다. 큰 차가 지나가는 산업도로나, 빠른 속도를 달리는 자동차 때문에 엄청나게 시끄러운 고속도로 옆에 주로 설치되는 방음벽은 공간의 분리를 이끌고 소음을 차단하여 근처에도 집들이 들어설 수 있게 해주는 설치물이다. 그런데 이 방음벽이 조망권과 치안을 위해 투명으로 바뀌자 새들이 부딪혀 죽어나갔다. 국립 생태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하루 2만 마리의 새가 투명 방음벽과 건물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버드 세이버, 즉 맹금류 모양의 스티커를 부착하기도 하였으나 효과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이후 가로 10cm, 세로 5cm 간격으로 물방울무늬나 얇은 줄을 인쇄해 유리에 붙이는 방식이 채택되어 시행 중에 있다.


이처럼 지금의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도시의 모습은 원래부터 이랬던 게 아니라, 사실은 모두의 노력과 관심 덕택에 수많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현재진행중의 상태에 있다. 고가도로와 지하차도는 교통지옥을 해소하기 위해, 육교는 횡단보도를 없애 차들이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아파트는 주거안정과 도시로 밀려드는 시민의 집단 수용을 위해, 신호등은 도로의 신호 체계 정립을 위해 만들어졌다. 수도권 매립지나 초고압 송전탑과 같은 혐오 시설에 대한 공방전, 이주민들의 거주 문제에 얽힌 시선들, 반려동물을 도시의 구성원으로 바라보기 위한 제도의 수립은 각각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모두 다 같이 더불어 잘 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방음벽의 존재 의의를 몰랐듯,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도시 속에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고, 생활 편의성을 도모하는 것들이 참 많다. 물론 ‘문화지체 현상’, 즉 새로운 것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 부작용을 바로 알기 쉽지 않아서 한참 뒤에야 그 사용과 관련한 규범이 생기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각종 시행착오를 통해 물질적인 것(기술)과 비물질적인 것(규범)의 변동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조화를 해소해나가다 보면 현재의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이 사실 많은 논의 끝에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도시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사람들도 도시의 모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그러니 사소한 것부터 관심을 가질 것. 그것이 내가 이 책을 통해 받은 교훈이다. 사적 이익과 욕구를 좇는 것도, 공공성을 높이는 행동도 모두 도시를 바꾸는 힘이 된다. 지금의 도시 풍경이 선택과 움직임이 쌓여 만들어진 것처럼, 앞으로도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이 기회를 빌려 도시를 구성하고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터전을 제공해진 동식물에게 감사인사를 바치고자 한다.



아내와 저는 이 동네에서 오랫동안 아이를 키우며 살기로 결정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2년 후 전세 가격이 급등하면서 더 이상 그 동네에 살 수 없게 됐습니다. 제가 그 동네를 좋아하건 말건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지요. - P6

도시의 밤은 개인의 선택과 기업의 결정이 맞물린 문제입니다. 더불어 이는 정책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정책은 우리의 합의이고, 사회적 공감이지요. - P97

국립생태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하루 2만 마리의 새가 투명 방음벽과 건물 유리창에 부딪혀 죽습니다. - P164

사실 어떤 새로운 물건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 부작용을 바로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건이 도입되고 나서 한참 뒤에 물건의 사용과 관련한 규범이 하나둘씩 생기고는 합니다. 이를 문화지체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물질적인 것(기술)과 비물질적인 것(규범)의 변동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조화를 말하지요.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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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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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할머니는 내 동생이 막 들어간 초등학교에서 입학식을 치르던 중 돌아가셨다. 나 또한 새로운 반에서의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느끼고 있던 차에 비보를 전해 받았다. 무려 새 학기 첫날인데, 얼른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찾아오더니 제대로 얼굴 도장도 찍지 못하고 장례식장에 가야하다니.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보다 그게 더 슬펐던 어린 날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심윤경 작가가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서 “내 기억 속에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6면)”라고 말한 것처럼 뜨문뜨문하다. 세상 할머니들은 모두 “마치 공기에서 따뜻한 손이 솟아나 나를 달래고 어루만진 것처럼 (중략) 등 뒤의 익숙한 촉감과 목소리로만 존재(같은 면)”하는 걸까?

작가는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노르스름한 햇살이 드는 방, 공기 속을 떠다니는 먼지들, 콩기름을 먹인 장판, 그런 것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추억이란 건 아무래도 장소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마련이지 않을까 하는 게 지론이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라 해도 나의 관점으로, 나의 시선으로 저장된 것들이다. 내가 바라본 풍경, 내가 걸었던 골목, 내가 어루만졌던 할머니. 그 기억들은 아주 소중하고 쉽게 잊어버리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것들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나는 이 독후감을 통해 “오래된 감각들을 되살리는 일에 좀 더 집착해보기로 했다(49면)”.

나의 친할머니는 대구에서 차로 30분정도 떨어진 하양에 사셨는데,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가기 위해선 시골의 드넓은 논 사이 비포장도로를 지나야했다. 포도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지나칠 땐 엄마가 저건 어떤 밭이라고 설명해주었고,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나는 너무 신기했다. 종종 할머니가 키우던 텃밭에 가기도 했는데, 고추와 토마토를 따고, 감자를 캐거나 아궁이 불에 군고구마를 구워먹었던 일은 지금은 해 볼 수 없기에 아주 값진 경험이 되었다.

할머니는 아빠와 고모들이 마련하신 오래된 아파트에 주로 머무시며, 조금 떨어진 고택은 별장처럼 이용하셨다. 그 부근에 당신의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종종 나를 데리고 화투를 치러 가셨다. 할머니는 혼자 놀기 민망했는지 화투 룰을 모르던 나에게 그림 맞추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아직 어려 한 눈에 잘 외우지 못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으셨다. 작가는 이를 두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성벽처럼 강하고 높은 존재여야 하지만, 이럴 때는 아이가 가볍게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낮은 발판 정도로 슬그머니 몸을 낮추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113면)”고 일컬었고, 이 문장은 성인이 되어보니 그맘때의 할머니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한편으로 나는 그 낡은 한옥의 푸세식 화장실과 다 무너질 것 같은 인테리어가 싫었다. 아주 전형적인 도시 아이처럼 유난히도 깔끔을 떨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미 나를 당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셨던 분이었다. 시장에 가서 그맘때 유행하던 순정만화책을 한 권씩 사주셨던 것이다. 교육 방면으로 신경을 많이 쓰던 엄마가 절대 만화책은 못 읽게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할머니와 있을 때가 기회였다. 또, 할머니는 본인 특유의 레시피로 무장한 참기름간장계란밥과 비엔나소시지를 내밀기도 했는데, 그건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반칙이었다. 분명 집에서도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도, 혼자 해보려고 하면 영 그 맛이 안 났다. 할머니 집에 가게 되면 그것들을 먹을 생각에 군침부터 돌았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런 것들 덕에 나는 할머니와 손을 잡고 아파트와 고택 사이를 오갈 수 있었고, 아직까지 그 기억들을 반추하고 있다.

할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들은 대게 병상 위에서 아픈 미소를 짓던 모습이다. 병인은 단순히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 미끄러지신 것이었는데, 나이와 세월은 그 상처를 더욱 쑤셨고 할머니는 쉽게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게 참 억울했다. 내 생애 첫 장례식은 그렇게 치러졌다. 고모가 울며 감정을 추스르는 와중에 “엄마는 이제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어.”라고 말하던 것이 아직까지 사무치게 남아있다.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속 할머니는 “나처럼 억울한 인생이 또 있을까(71면)”하고 중얼거린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할머니들의 삶은 고통과 시련과 미련으로 점칠 되어 있다. 그 시대가 그렇다. 작가는 결혼과 육아 “이전에 살던 세계는 학교, 직장, 문화, 친구, 성취와 우정의 세계(34면)”이었다면, “아이와 함께하는 세계는 쉬, 똥, 침, 코, 토, 잠, 젖”이라 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당신의 아이들을 키우던 세계는 억울함, 절약적, 희생양 같은 한글자도, 두 글자도 아닌 무려 무게가 추가된 세 글자로 이루어진다. 애, 엄마, 할머니의 글자 수 구도가 똑같은 점도 신기하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예전의 기억들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릴 할머니가 있다는 건 나의 큰 행운이며, 아직 살아계시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더욱 끔찍이 모셔야하는 이유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말해보고 싶다. 할머니, 사랑했고 아직까지도 사랑합니다.




이전에 살던 세계는 학교, 직장, 문화, 친구, 성취와 우정의 세계였다. 모두 두 글자 이상이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세계는 쉬, 똥, 침, 코, 토, 잠, 젖, 신기하도록 모두 한 글자였다. - P34

울고불고 자지러지는 단계에서 분명히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감정이 선행되었을 텐데, 그 부분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휘발되어 놀랍도록 깨끗이 사라지고 할머니와 단둘이 있는 것에 흐뭇하고 만족했던 기억만이 안정적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나의 옛 기억이 그토록 불균형함에 신기함을 느끼며 오래된 감각들을 되살리는 일에 좀 더 집착해보기로 했다. - P49

내 기억 속에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 마치 공기에서 따뜻한 손이 솟아나 나를 달래고 어루만진 것처럼 할머니는 등 뒤의 익숙한 촉감과 목소리로만 존재했다. - P6

"나처럼 억울한 인생이 또 있을까." 할머니는 그런 고생은 다시 떠올리기조차 고통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 속은 아무도 몰러." 그게 내가 할머니에게 들을 수 있었던 전부였다. - P71

타인에 의해 내가 잘못한 부분이나 고쳐야 할 지점들을 마주할 때 내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드는 것은 예술에 가까운 섬세한 솜씨가 필요한 일이었다. - P85

이 아이가 부모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분노, 내가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하고 있다는 좌절감, 일어난 피해를 수습해야 하는 고단함,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화산처럼 돌과 불을 뿜어내고 싶어졌다. - P108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성벽처럼 강하고 높은 존재여야 하지만, 이럴 때는 아이가 가볍게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낮은 발판 정도로 슬그머니 몸을 낮추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 P113

첫째도 허술하고 둘째도 허술할 것.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부모가 되기에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라기 때문에. - P143

아이들에게는 무턱대고 믿어주고 기특하게 여겨주는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전에는 그런 존재들이 함께 살았는데 이제는 함께 살지 않는다. - P162

세상에는 나같이 범속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경지의 사랑을 실천하시는 부모님들이 계시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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