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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풍경 - 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
유지원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평점 :
지난 8월, 서울시의 새 슬로건이 공개됐다. ‘서울을 이루는 중심에는 사람이 있고 서울을 향한 다양한 마음이 모여 더 좋은 서울을 만들어 간다’(seoul.go.kr/newbrand/)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슬로건은 하트와 느낌표, 스마일로 이미지를 구성하고 진분홍·노랑·파랑·초록·검정 등의 다채로운 색깔을 사용하여 새로운 경험을 준다는 도시 정체성을 설명한다.
물론 시민 투표가 부쳐졌을 당시 후보작의 완성도가 떨어지는데다 표절 의혹까지 불거지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완성된 디자인은 채도를 높여 훨씬 밝고 경쾌해졌고 알파벳은 안정감 있게 수정되었다. 이 디자인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인지, 서울시는 현재 여기저기에 현수막을 걸거나 행사 조형물을 픽토그램으로 표현하는 등 이를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도시 브랜드가 지자체 입장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여기서 왈가왈부하진 않겠다(주혜진의 『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를 보면 좋다.) 그보다 무언가를 대표하는 로고의 시각적 상징에 주목해보자. 수많은 기업이나, 단체가 기존의 디자인은 버리고, 제구포신 하는 이유는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가시성과 임팩트를 높이는 방안을 취하는 것일 수도 있고, 트렌디한 이미지를 얻기 위함일 수도 있다. 변화와 혁신을 통해 소비자의 소통을 끌어냄과 동시에 강력한 브랜드 포지셔닝을 할 수 있는 마케팅 전략인 셈이다.
이처럼 로고는 어떤 브랜드를 대표하는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로고를 하나의 단적인 심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자고로 로고 디자인이란 ⑴ 호칭을 담당하는 문자, ⑵ 문자를 구성하는 폰트, ⑶ 그 외 로고를 구성하는 이미지(도형), 이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쨌든 로고도 ‘글자’에 속한다.
잘 생각해보면, 현대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잘 모른지만, 조금만 의식해보면 사방이 글자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있는 이 독후감은 물론, 도로의 교통 표지판과 식당의 차림표, TV나 유튜브 광고에도 모두 글자가 있다.
글자는 언어를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해 왔으나, 그 미적인 요소 또한 아주 오래전부터 연구되고 중요시되어 왔다. 과학자 정재승은 “언어가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정수라면, 글자들의 풍경은 도시의 전경처럼 문명의 외피를 보여 준다. 역사 속에 등장한 글자들의 기하학을 이해하는 과정은 그 시대 사람들을 내밀하게 공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아래 정지 표시를 보면 같은 유럽권에서 쓰이는 동일한 문구(STOP)라도 자간이나 크기, 서체가 모두 다른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각국이 지정하는 공식 글자체가 다르단 사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바탕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흥미로운 사실을 읽어내다 보면 미약하게나마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문화의 차이를 볼 수 있는 방법으로 로마자와 동아시아 문자를 비교하는 방법도 있다. “로마자가 1차원 줄 위에 선형으로 글자를 배열한다면 동아시아 문자들은 2차원 칸을 한 칸씩 채워가는 공간 관념(99면)”인데, 이는 혼합되어 쓰였을 때 더더욱 두드러진다. 여행지에서 글자를 읽거나 이해하지 않고 그 형태를 마주보고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더 넓은 세계와 지평을 경험할 수 있으니, 타이포그래피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얼마나 대단하고 축복인 지 새삼 느낄 수 있다.
『글자 풍경』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제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 나 또한 이 책을 완독하기 전까지 글자란 그저 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자 세계를 이루는 부품 중 하나로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딜 가도, 왜 이 글자체가 쓰였을까?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강동구립도서관의 상호대차 서비스를 통해 각기 다른 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머리에 찍힌 도장을 발견하고는, 서로 어울리며 단정하게 늘어진 글자와 로고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박근혜 시절 정부부처 로고 디자인을 획일적이고 몰개성하게 통일한 업적이 떠오르며, 여기까진 영향이 미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유지원은 전문가와 일반인을 두고 이렇게 얘기했다. “미묘한 차이를 언어화하는 것은 전문가이지만, 어떤 글자체가 더 좋고 나쁜지는 누구나 어렴풋이 알아본다. 심지어 의식이 감지하지 못해도, 신체가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176면)”. 과연 그동안 무의식 중에 수월하게 읽어갔던 책은 몇 권이나 될까? 나도 모르게 시선이 끌린 거리의 포스터는 몇 개나 될까?
이제와 타이포그래피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 그들의 눈에는 이 세상이 얼마나 신기하게 비칠까? 이제 나도 여행을 가면 읽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에 막막해하기 보단 찬찬히 거리를 둘러보려 한다. 그 나라의 영혼과 역사를 깨우치는 데에는 문자만한 게 없다는 걸 이제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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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유경선, “서울시 새 슬로건 ‘Seoul, My Soul’”, 경향신문, 2023, 08.16., https://www.khan.co.kr/local/Seoul/article/202308162148015
- 천지윤, “기업들의 연이은 로고 변경 행렬, 왜 그들은 로고를 변경할까?”, 소비자 평가, 2021, 03.10., http://www.iconsumer.or.kr/news/articleView.html?idxno=15367
- 플래텀(노지혜), 2022년 02월 03일, “명품브랜드는 왜 계속 로고를 변경할까? ‘폰트의 지적재산권’”, https://platum.kr/archives/180035
- 산돌구름(김연아), 2023년 09월 27일, “지구촌 글자 둘러보기”, https://www.sandollcloud.com/story/420
언어가 불연속적인 듯 바뀌지만, 국경 지역의 언어는 두 언어가 어느 정도 섞인 경계의 성격을 갖고 있다. 확실하게 불연속적인 것은 도로 표지판의 글자체들이었다. 국경을 넘는 즉시 도로에서 각국이 지정하는 공식 글자체가 바뀐다. - P25
책은 덮인 표지를 들추고, 긴 시간을 들여 인내심 있게 읽어 내는 능동성을 필요로 한다. 그런 한편 거리의 포스터는 굳이 보려 하지 않아도 시선을 끈다. - P43
로마자가 1차원 줄 위에 선형으로 글자를 배열한다면 동아시아 문자들은 2차원 칸을 한 칸씩 채워 가는 공간 관념을 가졌다. - P99
지금은 유니코드로 지구상의 각종 문자들이 통합되어, 이제 하나의 코드 체계 속에 공존한다. 글자들은 분쟁을 거두고 시대와 지역을 넘어 하나로 모이고 있다. 그래서 한때 ‘언어의 바벨탑’이 무너졌다면, 21세기에는 유니코드를 통해 이제 ‘문자의 바벨탑’을 세워가고 있다고도 한다. - P109
미묘한 차이를 언어화하는 것은 전문가이지만, 어떤 글자체가 더 좋고 나쁜지는 누구나 어렴풋이 알아본다. 심지어 의식이 감지하지 못해도, 신체가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전문가란 이렇게 사용자 본인도 모르던 피로를 살피고 치유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전체 사회의 감각을 건강하게 회복시킨다. - P176
글자에는 ‘가시성’·’판독성’·’가독성’이라는 기능이 있다. ‘가시성’은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힘이다. (…) ‘판독성’은 글자들이 서로 잘 판별되는가를 가른다. (…) 한편, 긴 글을 읽을 때 인체에 피로감을 덜 주는 글자체에 대해 ‘가독성’이 높다고 한다. - P209
글씨 쓰기란 그 결과가 평면으로만 드러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3차원 공간에서의 운동과 물리 작용이 반영되는 일이다. - P219
글자 = 글씨 + 활자(폰트) 글자체(글자의 모양) = 글씨체(글씨의 모양) + 활자체(폰트의 모양) - P224
물질과 자연과 우주를 압축적인 수식으로 통찰한 물리학을 탐구하는 인간의 마음과 이를 예리하게 벼린 함축적인 언어로 포착한 시를 쓰는 인간의 마음이란, 그 본질이 크게 다를까 싶다. - P226
뇌 신경과학자 이대열 교수의 저서 『지능의 탄생』에 따르면, 최근 인지과학에서는 직관과 감정을 이성 못지 않게 중요한 사고 능력의 본질로 본다. 장난치듯 이것저것 해보는 잉여 행동이 당장에는 쓸데없어 보이더라도 훗날 뜻밖의 위기를 헤쳐 나갈 경험적 자산으로 몸과 뇌에 새겨진다며 이 책에서는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 P272
또 다른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로 ‘월인천강(月印千江)’이 있다.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인쇄’되듯 ‘찍힌다(印)’라는 표현을 썼다. 달은 부처님의 말씀을, 천 개의 강은 사람들의 마음을 의미한다. 말은 한 번만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남도록, 복제와 대량 생산을 하는 과정이 바로 이 ‘인(印)’이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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