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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
전범선 지음 / 포르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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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에서 참여하고 있는 독서 모임은 환경 보호가 주된 토픽이긴 하지만, 구태여 기후 위기나 과학, 정치와 관련된 서적을 선정하진 않고 있단 점이 제법 재미있다. 주로 후보를 고르고 의견을 내는 분의 입김도 있겠으나, 모임원들도 딱히 불만을 갖지 않고 동조하여 되려 책이 주는 교훈에 매번 감탄하고 있으니, 그들에 비해 과격하고 어린 마음을 품고 있는 나는 그간 해소되지 않는 가려움증에 시달렸다.  따뜻하고 이상적인 공동체나 삶의 방향을 배우는 과정이 싫단 소리가 아니다. 다양한 연령대의 구성원이 3주에 한 번씩 모여 2시간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경청하는 경험은 쉽게 겪을 수 없는 감사함이고, 매번 충만한 마음과 다정함으로 가득 차서 귀가하는 것 또한 무척이나 소중하다. 그렇지만 가치관이 맞는 사람들끼리만 만나서 탁상공론처럼 느껴지는 좋은 얘기만 주고받기엔 현실은 가혹하다. 그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마다 나는 분노한다. 각종 재난, 소통의 부재, 혐오에서 비롯된 소식을 들을 때마다 세상이 정말 말도 안 되게 돌아간다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결코 찾아오지 못할 거라고 비관한다.


그렇기에 『앞으로 올 사랑』, 『나무를 심은 사람』, 『오래된 미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거쳐 자유 도서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살고 싶다, 사는 동안 더 행복하길 바라고』였던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말 못하는 생명들을 위해 발언한 책’이 주제였기에 비거니즘에 힘쓰는 전범선의 글이 좋을 듯 성싶었다. 아직 회사에 재직 중일 때 사내 북카페에서 발견하고 얼핏 훑어봤을 때 마음을 관통하는 문장이 있었던 터였다.


자연스럽게 살고 싶어서 평화를 꿈꾸고 채식을 하는 게 아니다. 이성적이고 성숙하게 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p. 61


비건 지향인으로 살다 보면 레퍼토리 같은 질문이라든가 특이하단 시선을 받기 일쑤다. 해명할 거리를 마련해 놓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고, 때론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한 농담 장착이 필요할 때도 있다. 자칫 심각한 표정으로 신념을 읊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기라도 하면 토론의 장이 열리기보다는 싸움에 대한 선제 공격이 되어버리는 곳이 대한민국 사회의 현 시점이기 때문이다. 아직 그럴 뿐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발전할 거라고 믿고 싶지만, 언제까지고 기다릴 순 없다. 그럼 가장 쉬운 방법은 나의 시각부터 바꾸는 것이다.


『하필 책이 좋아서』에서 신연선도 말했다. “여유가 있어서 친절을 베푸는 게 아니라, 친절을 선택”하는 거라고. 이 같은 문장들에 내가 비로소 꿈꾸고 원하는 미래가 담겨 있다. 아니, 다가올 시점이 아닌 이미 보유한 것에 대한 선언이다.



내가 속한 세계에서는 민의 문제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 그 세계의 특별함을 증명했다. - P11

페미니즘이 남성중심 사회를 해체하여 성 평등 사회를 이루고자 한다면 비거니즘은 인간중심 사회를 해체하여 종 평등 사회를 이루고자 한다. - P14

그러나 나에게는 고작 자존심의 문제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불평등, 나아가 안전과 생명의 문제였다. - P33

살림을 여성의 몫으로 할당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몫은 무엇인가? ‘살림‘의 반대인 ‘죽임‘이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그리고 육식주의는 똑같은 죽임의 메커니즘으로 유지된다. - P34

오늘날처럼 인간이 육식을 많이 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지만, 고기, 생선, 계란, 우유를 아예 안 먹는 완전채식주의자, 비건으로 사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나는 자연인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살고 싶어서 평화를 꿈꾸고 채식을 하는 게 아니다. 이성적이고 성숙하게 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 P61

인간은 사이보그가 되어 무한한 잠재력을 얻었지만 여전히 동물로서의 한계를 지닌다. 사바나에서 수렵-채집하며 형성한 유전적 특질을 가지고 사이버 세계를 살아간다. (…) 사이보그 전범선은 수천 명과 교류할 수 있지만 영장류 전범선은 백여 명도 버겁다. - P81

오천만 국민이 모두 비건이 되는 날을 상상하기 힘들다. 불가능한 과업 같아서 좌절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혁은 인구의 2~3.5%가 바뀔 때 발생했다. 사회과학에서는 이처럼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충분한 대중의 숫자를 ‘크리티컬 매스‘라고 한다. 대한민국에서의 크리티컬 매스는 100만 명에서 175만 명이다. 1919년 삼일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2016년 촛불행동 때 확인했다. 비건 100만 명이 생기면, 대한민국은 본질적으로 바뀔 것이다. (…) 영국, 독일 등에서는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비건이 급증하면서 전체 인구의 1%를 넘어섰다. 한국도 할 수 있다. 뭐든지 늦게 시작해서 그렇지 한국은 일단 바뀌기 시작하면 빨리 바뀐다. - P124

왜 이름 명을 사람 셀 때만 쓰는가? 사전상 마리는 ‘짐승, 물고기, 벌레 따위를 세는 단위‘다. 이름 있는 동물도 많은데 사람만 명이라고 세는 건 종차별이다. - P165

인간은 대부분 동물을 좋아하지만 동물을 먹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을 먹는 것은 끔찍하다. 여기서 인지 부조화가 발생한다. 그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인간은 둘을 언어적으로 구분한다. 살아있는 동물은 소, 돼지, 닭, 개라고 부르지만 죽은 동물은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개고기가 된다. - P165

"다윈 이후, 과학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할 떄 인간과 기타 동물 사이에 마법 같은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 합의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거의 완전한 구분을 지을까? 모든 생물이 하나의 물리적 연속선상에 있다면, 우리는 같은 도덕적 연속선상에 있어야 한다." - P173

나의 비거니즘은 ‘~을 먹는 것이 좋다‘가 아닌 ‘~을 먹지 말아야 한다‘였다. - P183

나는 채식은 오래 했지만 요가, 명상, 자연식물식, 소식은 모두 초짜다. 윤리와 철학을 떠들기에 급급하여 개인적 수행을 게을리했다. 아무리 비건이어도 평생 콩고기와 비건 라면, 비건 버거만 먹고 산다면 무언가 아쉽다. 아름답지 못하다. 육체와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도 최선이 아니다. 대체육은 말 그대로 육식을 잠시 대체하는 용도일 뿐이다. 금연초 같은 도구다. 궁극적인 지향점이 될 수는 없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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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책이 좋아서 - 책을 지나치게 사랑해 직업으로 삼은 자들의 문득 마음이 반짝하는 이야기
김동신.신연선.정세랑 지음 / 북노마드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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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교수는 말했다. ‘알면 사랑한다’고.


돌이켜보면 여지껏 내가 쌓아올린 장르 불문의 취향은 경험이 쌓여서라기보단, 발견의 기쁨이 단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서관에서 지나가듯 훔쳐읽은 책, 누군가 알려준 영화, 어쩌다 듣게 된 노래, 용기내어 맛 본 음식, 나눠받은 시향지 같은 것들. ‘나 그거 좋아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랑의 모든 시작은 그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필 책이 좋아서』가 독서 모임 책으로 정해지고 나서 발제를 준비하며 필연적으로 따라온 첫번째 질문은 “가장 먼저 책을 만난 순간을 떠올려봅시다”였다. 하필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 어떻게 이 디지털 미디어가 범람하는 21세기에 (종이)책을 매개로 이 자리에 모여 함께 있을 수 있는지 그 근원을 파헤치다 보면 추억에 잠길 수도, 보다 궁극적인 우리의 목표를 깨칠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 기억이 워낙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그런가, 다른 친구들은 어떠한 첫만남이 있었는지, 그때에 어떤 기분이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했을 뿐이었는데, 다들 두 눈으로 허공을 짚으며 그맘때를 추억하는 표정을 지어 기뻤다. 예상대로 쉽게 공유하진 않는 유년 시절의 조각들을 서로 더듬어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다음 발제문은 4월을 지나오며 각종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세계 책의 날을 맞아 진행한 이벤트들을 지켜보며 착안했다. 그 중 대부분이 나의 서재를 자랑하는 류의 것이었기에, “각자의 책장에서 빛나는 3권을 골라보자”는 질문을 어렵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인생작을 꼽는 일은 항상 어렵단 걸 충분히 헤아렸기에, 반대로 “모종의 이유로 구매를 망설이고 있지만 언젠가 꼭 읽을 책도 좋습니다.”라는 제안을 달기도 했다.


세번째는 마침 독서 모임 일정이 서울국제도서전 개최일과 맞물려있어서, 매년 선정되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의 추이를 살피며 “표지의 디자인이나 질감, 내지의 종류, 선호하는 작가나 장르 등 내용과 관계없이 구매한 책이 있는지 돌이켜봅니다”라는 발제를 꼽았다. 여기서도 “반대로 너무 끔찍해서 돌아선 책이 있는지”란 대체문까지 추가해뒀다. 『하필 책이 좋아서』에서는 북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도 굵직하게 들어있으므로 함께 얘기해보면 좋을 주제 같았다. 소장하는 것과, 즐겁고 재밌게 읽은 책에는 필시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나는 잘 몰랐던 웹소설 분야가 화두에 떠오르자 흥분해서 필리버스터하는 친구들이 웃겼다. 호기심이 동했다.


마지막으로는 아주아주 이기적인 욕심으로 최근 진행 중인 정 모 작가의 논란에 대해서도 얘기나눠보면 좋음직하여 판매 부진으로 인한 절판, 논란에 따른 중쇄 중지와 회수, 파본으로 인한 교환·환불의 반복을 언급하며 “우리가 책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발판이 마련되어야 할까?”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출판계와 전혀 상관 없는 업계에 종사하고 있고, 그저 한 명의 독자로서 출판계에 바라는 것을 외쳐도 될까 싶어 다들 조심스러워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진 문제들이 더 많을 것이란 걸 마음 깊이 통감하지만, 비록 쉽게 말을 얹기엔 어려운 주제일지라도 꾸준한 관찰과 관심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단 걸 잊고 싶지 않았다. 책이란 건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 사라지면 안 된다. 나부터가 독서 모임을 몇 년 동안 지속하며 독서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단 걸 깨쳤다. 그러니 부디 『하필 책이 좋아서』가 아닌, ‘역시 책이 좋아서’라는 책이 등장하길.

분석이라기보다는 빠른 미디어의 시대에 가장 느린 미디어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표면에 천천히 떠오른 질문들을 모은 것에 가까울 것이다. - P7

한 권의 책이 발간되면 보통 150권에서 300권 안팎의 증정본이 발송되는 것으로 아는데 포장재 생산과 물류에 드는 자원을 셈하면 까마득하다. - P19

소유보다는 경험에 집중하는 시대가 왔고, 책도 스트리밍의 방향으로 더 움직이게 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직접 생산자들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저렴한 금액으로 콘텐츠를 넘겨야 하는 결과가 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 P49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나에게 뭔가를 물었을 때 상대를 만족시키고 기억에도 남을 만한 멋진 대답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른바 멋진 대답(…)은 고도로 추상화된 것일 떄가 많다. 실제 작업 생활과 일견 즉각적으로 연결하기 힘들어 보이는 이러한 개념적인 것들을 적절하게 실무에 접목하고 이를 언제 어디서 질문 받든 말로 꺼낼 수 있게 하려면 평소에 이런 생각을 많이 해두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묵상이 일상화된 종교인이나 오랫동안 일한 대가들이 이런 식의 문답을 매끄럽게 잘하는 것 같다. - P92

뭔가 달라 보이는 느낌,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이상함. 어쩌다 눈에 띈 작은 차이는 ‘그것’을 그것 아닌 모든 것들로부터 떠내어 흐릿하던 세상을 대상과 배경으로 선명하게 구분하여 인식하게 만든다. 취향과 사랑 같은 편향적인 감정은 그렇게 차이가 벌린 틈에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 P109

껍질은 본질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상징해야 하며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워야 한다. 언뜻 보기에 당연하고 별문제 없어 보이는 이러한 생각은 실제로 책을 만드는 현장 속에 들어오는 순간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 아니라 수직적 위계의 형태로 나타난다. - P145

조용한 조직, 한 가지 목소리만 크게 들리는 사회는 위험하다. - P151

전문가가 할 일은 비전문가 입장을 의태하여 판단의 책임을 더는 게 아니라 필요하다면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라도 관점을 정립하고 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이다. 디자인이 생산된 맥락을 잘 아는 것과 심사의 공정성을 유지하는 별개의 문제다. 일반 독자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차라리 온라인 투표를 진행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 P157

한국 사회에서 어떤 관행에 대한 집단적 반성이 일어나는 것은 극히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다. - P168

나의 친절은 나를 낮춰야 하기 때문에 소비되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진정으로 존중하기 때문에 발현되는 행위, 타인과 평등하게 만나기 때문에 발휘되는 결과였다. - P187

여유가 있어서 친절을 베푸는 게 아니라, 친절을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 P190

출판계 동료들과는 페미니즘, 비거니즘, 노동권과 환경 문제 등의 주제를 기본적인 공감대 아래에서 편하게 의견 나눌 수 있다. - P207

‘알면 사랑한다’는 말을 늘 좋아하는데 나로 말하자면 책이 가져다준 다양한 세계 덕분에 사랑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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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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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식물을 좋아한다. 거실 한편과 베란다는 물론, 가게 앞까지 모두 엄마의 정원이다. 길을 걷다가도 예쁜 꽃이 보이면 한참을 들여다보며 이름은 뭔지, 언제 개화하는지를 탐구한다. 금목서를 좋아해서 싱가폴의 찻집 ‘티챕터’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추천받은 ‘임페리얼 골든 카시아’가 오스만투스 향이란 걸 깨닫고는 무척 기뻐했다. 알맞은 계절이 되면 튤립을 심고, 백합을 심고, 양귀비를 심는다. 지나가던 불청객이 몇 송이를 파내어 훔쳐가도 개의치 않는다. 얼마나 예뻤으면 그랬겠니. 내가 잘 키웠나봐. 그런 낙관적인 마음으로 경찰에 신고하라며 아우성인 딸의 말을 흘려듣는다.

어렸을 적엔 이러한 엄마가 달갑지 않았다. 가야 할 길이 있는데 왜 자꾸 멈춰서서 시간을 배로 쓰는거지? 이름을 알아서 어쨌단거야? 뿌리와 잎이 마를까봐 여행도 마음 편히 못 간다고? 당신 자식은 말 못하는 그 녹색의 생명체가 아니라,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나입니다. 철 없이 삐뚤어진 태도로 한참을 두리번거리는 엄마의 뒤에서 휴대폰이나 두드리며 기다렸다.

물론 학교에서는 접시꽃과 무궁화의 차이를 알려주지 않았고, 벚꽃보다 매화가 먼저 핀단 사실을 알아챌 틈 또한 주지 않았다. 갈대는 물가에, 억새는 산과 들에 산다는 건 그런 것들이 종종 눈에 띌 때마다 맞춰보라며 퀴즈를 내는 엄마에게 배웠다. 식물은 가져온 그대로 담아둘 게 아니라 성장 속도에 맞춰 분갈이를 해 줘야 한다는 것, 물을 주는 횟수와 주기는 정해진 게 아니라 키우는 환경의 온도와 습도에 따라야 한다는 것도.

대한민국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도시에 몰리는 중이며 그마저도 수도권에 집중된 상태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자연과 대화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제 정말로 교육의 길이 반드시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자연이 얼마나 줄 수 있는 지를 아는 사람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지만…… 그러길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국내외 생태 전문가들의 지식을 모아 담론을 제시해 온 잡지 <녹색평론>의 창간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지금부터 이십 년이나 삼십 년쯤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곧이어 이런 질문도 나온다.


그렇게 살아 남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맑은 공기도, 푸른 하늘도, 숲도, 강물도 없는 세상에서 사람은 살고 싶은 욕망을 느낄 수 있는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는 서부 히말라야 고원의 작은 지역 라다크가 빈약한 자원과 혹독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생태적 지혜를 통해 천 년 넘게 평화롭고 건강한 마을을 유지해왔으나, 서구식 개발 속에서 환경이 파괴되고 사회적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화내는 사람’으로 칭하는 것이 최고의 모욕일 정도로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는 1부를 지나 이곳에 가난이란 없다더니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제발 도와달라고 외치는 라다크 사람들의 얘기가 주된 2부에 도달하면, 시대의 흐름, 세대 변화, 환경적 요인 등으로 불가피한 변화였다고는 해도 궁극적으로 전통을 고수하고 지켜야 한다는 믿음이 과연 좋은 것인가 혹은 나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따라온다. “전통 농경사회가 아무리 매력있게 보이더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현대화된 개발의 혜택을 누릴 기회에서 배제(12면)”되어서는 안 되기도, 핵-개인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 즉 연대감을 강화시키고 경쟁의식을 완화하는 동시에 이익에 편향되지 않는 토대가 마련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내가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한 초기에, 지방에서 올라온 제법 많은 학생들이 본인의 사투리를 숨기거나 고치려고 애쓰며 어설픈 표준어를 구사하던 모습을 더러 발견하곤 했다. 개인에 내재되어 있는 고유성과 정체성을 부인하는 행태는 면접 같은 중요하고 공적인 자리에서, 남성보다 여성에게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대게 자신의 것을 ‘옛’ 것으로 치부하고 감추려 했다. 어쩌면 멋도 모르는 새에 성인이 되어 한 나라의 수도에 온 그들의 의도는, 라다크의 젊은이들이 서구의 문화를 따라하고 우상화 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주혜진의 『대전은 왜 노잼 도시가 되었나』에서는 “원본, 기준과 다른 특별함은 개성인 동시에 유머의 소재이거나 결핍으로서 안쓰러운 걱정거리이기도 하다. 숨길 수 없는 식성과 사투리 억양은 유머의 소재가 된다(25면)”고 했다. ‘표준’, ‘정상’, ‘보통’의 것과 다른 것을 신기해하고 놀리는 문화는 소수자가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행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이는 사실 독특한 것을 이상한 것, 혹은 도태된 것으로 치부해야 할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할 일이지만, 미디어에서 그려내는 마케팅 수단과 전략이 무방비한 이들에게 취약한 욕구로 이어지지 않기 위한 장치와 도움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돌이켜보면 분명 아주 오래된 때에 우리의 출발점은 “사람과 자연에 대한 존경심(291면)”이었다. 하느님 가라사대 태초에 지구를 만드노니, 허락한 진화와 혁명에 감사하며 싸우지 마! 혐오 멈춰! 사랑만 해! 같은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필연적 결과물이 다양성의 복원(같은 면)”이 될 수 있도록 힘쓰기 위한 해결책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오래된 미래』의 3부에서는 그 방법으로 사회적 측면인 ‘구성원들의 행복’과 환경적 측면의 ‘유지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기준이 있다면 “수세기 동안 영위해 온 사회적, 생태학적 균형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그들의 삶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257면)”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관습화된 개발의 방향을 답습하여 고유의 것들을 해체해 버리기보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그 기반 위에 새로운 것들을 건설해야(같은 면)” 한다.

모두를 위한 존중, 다름의 포용과 수용,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의 보존은 건강한 사회로 향하기 위한 수단이자 목표가 될 수 있다. 이때 “건강한 사회란 구성원 사이의 친밀한 연관관계와 서로 돕는 분위기를 더욱 북돋아주어야 하는 것이며 개개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정서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176면)”.

이웃과의 불화나 무차별 범죄, 끊이지 않는 인재, 맹렬한 자연 파괴를 통한 수익 자본 창출 따위의 것들이 막을 수 있었다는 후회만으로 끝나지 않길 바라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소외되는 이 없이 그저 다들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게 『오래된 미래』는 ‘행복’이란 보상을 걸며 삶이 나보다 크다는 인식을 연습해보자는 미션을 준다.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고 지역의 상호보완성을 글로벌 시장경제가 대신하고 웨일즈의 시골길을 고속화 도로가 대신하고 독일의 구멍가게를 대형 마트가 대신(277면)”하는 세계에서 삶 자체에 대한 순수하고 거리낌 없는 경애심, 마음의 평화와 삶의 기쁨을 천부적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느리더라도 중요한 변혁이 발생될 수 있다. 그 가능성이 일말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라다크 사람들이 “자신이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거대한 무엇인가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174면)”하는 것은 “자신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주변의 환경과 분리될 수 없는 연결 속에 존재한다고(같은 면)”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허튼 역사가 아니며, 헛된 희망도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죽.

전 세계를 통틀어 심리학에서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농경 현장에서 가정의 주방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생명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자각이 자라나고 있다. 인간중심의 삶과 여성 존중과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운동들이 속속 이어지고 있다. 그 수효는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변화에 대한 갈망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는 흔히 ‘새로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라다크 사회가 증명해 보인 것처럼 그것들은 아주 오래된 것들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야기다. 실제 그것들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인지하고 우리와 우리의 이웃 그리고 우리와 자연 사이의 분리될 수 없는 연관성을 인식하게 하는 숭고한 가치들의 재발견을 의미한다. p. 337


전통 농경사회가 아무리 매력있게 보이더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현대화된 개발의 혜택을 누릴 기회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 P12

가족과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자연친화를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민간 주도 운동의 영향력, 즉 ‘아래로부터의 영향력’이 인간주의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그 다른 한편에서 글로벌 경제성장의 엔진을 가속시키고 있는 ‘위로부터의 영향력’은 수익 추구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 P15

노동 운동가들은 환경 운동가들과 손을 잡았고, 교직자들은 성직자와, 과학자들은 정치인들과 손을 잡고 굳은 결속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 P32

서양 사람들은 또 기술적 변화나 진보를 날씨가 변화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한다. - P43

왜 이 사람들은 언제나 웃고 있는 걸까? 이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들에게 그토록 적대적이고 혹독한 환경 속에서 그렇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걸까? - P59

우리가 어떤 물건에 대해 완전히 낡아버렸고 사용가치도 다 소진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라다크 사람들은 분명히 그것을 다시 사용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 P75

동물을 죽이는 것을 사람들은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을 모아 기도를 드리며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난 다음에야 동물을 죽이는 이들이 이곳 사람들이다. - P85

말을 백 마리나 가진 사람도 채찍 하나가 없어 남의 신세를 져야 할 때가 있다. — 라다크 속담 - P109

"그분한테 먼저 이야기하세요.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잖아요." - P110

"꼭 그럴 필요 있나요? 우리는 모두 함께 사는 거잖아요." - P111

작은 규모일수록 보다 인간적인 형태의 사회정의를 기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큰 규모의 공동체에서는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갈등 요인들을 방지할 수도 있다. - P118

경쟁이 아닌 상호협조를 통해 경제의 모습을 만들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상호발전과 통합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 P120

"(…) 라다크에는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지만 사람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라는 말이 있어요." - P153

우리는 무지함 — 감각과 선입관에 의존하는 세상의 경험 — 으로 인해 사물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일상세계 너머의 영속성을 보지 못한다. - P157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세계의 실체를 부인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시각을 바꾸라는 것이다. - P157

"무지함이 있는 곳에는 ‘의식儀式’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수준의 영적 단계에 오르고 나면 버려도 되는 사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 P167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대신 기쁜 마음으로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 축복받은 듯한 느낌을 준다. 168 - P168

생활의 많은 부분을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색칠을 하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집착을 버린다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 일체감을 느낀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 P173

그 중년 남자는 너무나 여유롭고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어서 굳이 자신의 존재나 자존심 같은 것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었다. - P174

그러나 그 가장 중요한 요인은 라다크 사람들은 자신이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거대한 무엇인가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고, 또 자신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주변의 환경과 분리될 수 없는 연결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 P174

건강한 사회란 구성원 사이의 친밀한 연관관계와 서로 돕는 분위기를 더욱 북돋아주어야 하는 것이며 개개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정서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 P176

그러나 결국 그들이 보여주는 기쁨의 모습과 마음의 평화는 적어도 외부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특성들은 그들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P178

만일 당신이 긴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 비가 쏟아진다 해도 굳이 참담한 느낌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당신이 그런 것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그런 경우 ‘굳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지요’라는 반응을 보이리라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 P179

그것은 마치 발달된 기술이 사람들이 할 일을 대신해준다는 식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산업화 사회에서 사람들은 실제 농경사회에 속한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시간 일을 한다. - P188

이곳에 가난이라는 건 없어요. — 체왕 팔조르, 1975년 / 당신들이 우리 라다크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린 너무 가난해요. — 체왕 팔조르, 1983년 - P196

변해가는 라다크 사람들이 내게 가르쳐준 가장 놀랄 만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현대세계의 생활도구와 기계들이 그 자체로는 시간을 절약하게 해주지만 그것들을 사용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새로운 생활은 전체적으로 시간을 빼앗아버리는 효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 P206

라마승에서 엔지니어 세계관으로의 변화는 모든 생명체 사이의 자비로운 관계를 부흥하는 윤리적 가치관에서 윤리적 기초를 갖지 못한 가치중립의 ‘객관성’으로의 이전을 의미한다. - P210

교과서는 지구촌 전체에 적용되는 정보들을 전파한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한 생태계와 문화권의 상황이 제거된 채 한 종류의 지식만이 전 세계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어서 학생들이 배우게 되는 내용은 본질적으로 실제적인 생활의 맥락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 P214

정부가 자신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줄수록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태도가 더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 P230

현재의 개발 모델은 무서운 기세로 중앙집중화를 지향하고 있다. 다양한 인종 집단을 자신들의 지역에서 끌어내 도시 지역으로 이동시켰으며 의사결정권과 정치권력을 소수의 손에 쥐어주었다. 취업의 기회 역시 한정되어 있어 공동체의 연대감은 파손되었으며 구성원 간의 경쟁의식은 높아져만 가고 있다. 특히 도시 지역에서 현대식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생존경쟁의 사슬에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나 인종 집단 사이의 이질감은 아주 자연스럽게 과장되고 왜곡된다. 또한 권력을 가진 집단은 필연적으로 자기 집단의 이익에 편향되기 마련이고 나머지 집단은 차별이라는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 P241

사회의 가치를 판단하는 여러 기준들 가운데 어떤 것들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구성원들의 행복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하고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유지가능성이 그 척도가 되어야 한다. - P251

그렇지만 나는 개발이라는 것이 꼭 파괴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영위해 온 사회적, 생태학적 균형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그들의 삶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관습화된 개발의 방향을 답습하여 고유의 것들을 해체해 버리기보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그 기반 위에 새로운 것들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 P257

자급경제체제를 유지하는 오지의 나라이건 산업화 세계의 심장부이건 GNP를 사회복지의 주요 지표로 활용하는 국가의 재무시스템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런 시스템에서는 토마토를 팔거나 교통사고가 났거나에 상관없이 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갈 때마다 GNP로 환산이 되어 더 잘사는 나라가 됐다는 결과는 낳는다. - P264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빈곤과 인구과잉이며 그 해결책이 되는 것은 바로 경제개발이라는 것이다. - P272

진보는 오늘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접어들었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냉혹한 진보의 논리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고 지역의 상호보완성을 글로벌 시장경제가 대신하고 웨일즈의 시골길을 고속화 도로가 대신하고 독일의 구멍가게를 대형 마트가 대신한다. 이런 추세를 보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를 따진다는 것마저도 무의미할 정도다. 그 두 사상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른 피조물들과 분리하여 그 우위에 놓는 공통의 과학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고 또 두 사상 모두 자원의 활용이 무한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차이가 있다면 그 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는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 P277

우리의 출발점이 사람과 자연에 대한 존경심이라면 그 필연적 결과물은 다양성의 복원이라 할 수 있다. - P291

라다크에 온 지 몇 년이 지난 후 그간의 선입견이 한 겹 걷히고 난 다음에야 나는 라다크 사람들의 기쁨과 그 웃음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 삶 자체에 대한 순수하고 거리낌 없는 경애심이었다. 나는 라다크에서 마음의 평화와 삶의 기쁨을 자신들의 천부적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루고 있는 공동체와 땅에 대한 깊은 유대감을 통해 물질적 풍요나 기술의 진보 같은 것들을 넘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방식의 삶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 P321

자연의 세계에 있어 다양성이란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생명의 근본원리이다. - P321

전 세계를 통틀어 심리학에서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농경 현장에서 가정의 주방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생명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자각이 자라나고 있다. 인간중심의 삶과 여성 존중과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운동들이 속속 이어지고 있다. 그 수효는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변화에 대한 갈망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는 흔히 ‘새로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지만 라다크 사회가 증명해 보인 것처럼 그것들은 아주 오래된 것들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야기다. 실제 그것들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인지하고 우리와 우리의 이웃 그리고 우리와 자연 사이의 분리될 수 없는 연관성을 인식하게 하는 숭고한 가치들의 재발견을 의미한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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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풍경 - 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
유지원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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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서울시의 새 슬로건이 공개됐다. ‘서울을 이루는 중심에는 사람이 있고 서울을 향한 다양한 마음이 모여 더 좋은 서울을 만들어 간다’(seoul.go.kr/newbrand/)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슬로건은 하트와 느낌표, 스마일로 이미지를 구성하고 진분홍·노랑·파랑·초록·검정 등의 다채로운 색깔을 사용하여 새로운 경험을 준다는 도시 정체성을 설명한다. 




물론 시민 투표가 부쳐졌을 당시 후보작의 완성도가 떨어지는데다 표절 의혹까지 불거지는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완성된 디자인은 채도를 높여 훨씬 밝고 경쾌해졌고 알파벳은 안정감 있게 수정되었다. 이 디자인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인지, 서울시는 현재 여기저기에 현수막을 걸거나 행사 조형물을 픽토그램으로 표현하는 등 이를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도시 브랜드가 지자체 입장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여기서 왈가왈부하진 않겠다(주혜진의 『대전은 왜 노잼도시가 되었나』를 보면 좋다.) 그보다 무언가를 대표하는 로고의 시각적 상징에 주목해보자. 수많은 기업이나, 단체가 기존의 디자인은 버리고, 제구포신 하는 이유는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가시성과 임팩트를 높이는 방안을 취하는 것일 수도 있고, 트렌디한 이미지를 얻기 위함일 수도 있다. 변화와 혁신을 통해 소비자의 소통을 끌어냄과 동시에 강력한 브랜드 포지셔닝을 할 수 있는 마케팅 전략인 셈이다.




이처럼 로고는 어떤 브랜드를 대표하는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로고를 하나의 단적인 심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자고로 로고 디자인이란 ⑴ 호칭을 담당하는 문자, ⑵ 문자를 구성하는 폰트, ⑶ 그 외 로고를 구성하는 이미지(도형), 이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쨌든 로고도 ‘글자’에 속한다.


잘 생각해보면, 현대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잘 모른지만, 조금만 의식해보면 사방이 글자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있는 이 독후감은 물론, 도로의 교통 표지판과 식당의 차림표, TV나 유튜브 광고에도 모두 글자가 있다.


글자는 언어를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해 왔으나, 그 미적인 요소 또한 아주 오래전부터 연구되고 중요시되어 왔다. 과학자 정재승은 “언어가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정수라면, 글자들의 풍경은 도시의 전경처럼 문명의 외피를 보여 준다. 역사 속에 등장한 글자들의 기하학을 이해하는 과정은 그 시대 사람들을 내밀하게 공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아래 정지 표시를 보면 같은 유럽권에서 쓰이는 동일한 문구(STOP)라도 자간이나 크기, 서체가 모두 다른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각국이 지정하는 공식 글자체가 다르단 사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바탕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흥미로운 사실을 읽어내다 보면 미약하게나마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문화의 차이를 볼 수 있는 방법으로 로마자와 동아시아 문자를 비교하는 방법도 있다. “로마자가 1차원 줄 위에 선형으로 글자를 배열한다면 동아시아 문자들은 2차원 칸을 한 칸씩 채워가는 공간 관념(99면)”인데, 이는 혼합되어 쓰였을 때 더더욱 두드러진다. 여행지에서  글자를 읽거나 이해하지 않고 그 형태를 마주보고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더 넓은 세계와 지평을 경험할 수 있으니, 타이포그래피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얼마나 대단하고 축복인 지 새삼 느낄 수 있다.




『글자 풍경』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제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 나 또한 이 책을 완독하기 전까지 글자란 그저 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자 세계를 이루는 부품 중 하나로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딜 가도, 왜 이 글자체가 쓰였을까?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강동구립도서관의 상호대차 서비스를 통해 각기 다른 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머리에 찍힌 도장을 발견하고는, 서로 어울리며 단정하게 늘어진 글자와 로고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박근혜 시절 정부부처 로고 디자인을 획일적이고 몰개성하게 통일한 업적이 떠오르며, 여기까진 영향이 미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유지원은 전문가와 일반인을 두고 이렇게 얘기했다. “미묘한 차이를 언어화하는 것은 전문가이지만, 어떤 글자체가 더 좋고 나쁜지는 누구나 어렴풋이 알아본다. 심지어 의식이 감지하지 못해도, 신체가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176면)”. 과연 그동안 무의식 중에 수월하게 읽어갔던 책은 몇 권이나 될까? 나도 모르게 시선이 끌린 거리의 포스터는 몇 개나 될까? 


이제와 타이포그래피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 그들의 눈에는 이 세상이 얼마나 신기하게 비칠까? 이제 나도 여행을 가면 읽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에 막막해하기 보단 찬찬히 거리를 둘러보려 한다. 그 나라의 영혼과 역사를 깨우치는 데에는 문자만한 게 없다는 걸 이제 알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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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유경선, “서울시 새 슬로건 ‘Seoul, My Soul’”, 경향신문, 2023, 08.16., https://www.khan.co.kr/local/Seoul/article/202308162148015

- 천지윤, “기업들의 연이은 로고 변경 행렬, 왜 그들은 로고를 변경할까?”, 소비자 평가, 2021, 03.10., http://www.iconsumer.or.kr/news/articleView.html?idxno=15367

- 플래텀(노지혜), 2022년 02월 03일, “명품브랜드는 왜 계속 로고를 변경할까? ‘폰트의 지적재산권’”, https://platum.kr/archives/180035

- 산돌구름(김연아), 2023년 09월 27일, “지구촌 글자 둘러보기”, https://www.sandollcloud.com/story/420




언어가 불연속적인 듯 바뀌지만, 국경 지역의 언어는 두 언어가 어느 정도 섞인 경계의 성격을 갖고 있다. 확실하게 불연속적인 것은 도로 표지판의 글자체들이었다. 국경을 넘는 즉시 도로에서 각국이 지정하는 공식 글자체가 바뀐다. - P25

책은 덮인 표지를 들추고, 긴 시간을 들여 인내심 있게 읽어 내는 능동성을 필요로 한다. 그런 한편 거리의 포스터는 굳이 보려 하지 않아도 시선을 끈다. - P43

로마자가 1차원 줄 위에 선형으로 글자를 배열한다면 동아시아 문자들은 2차원 칸을 한 칸씩 채워 가는 공간 관념을 가졌다. - P99

지금은 유니코드로 지구상의 각종 문자들이 통합되어, 이제 하나의 코드 체계 속에 공존한다. 글자들은 분쟁을 거두고 시대와 지역을 넘어 하나로 모이고 있다. 그래서 한때 ‘언어의 바벨탑’이 무너졌다면, 21세기에는 유니코드를 통해 이제 ‘문자의 바벨탑’을 세워가고 있다고도 한다. - P109

미묘한 차이를 언어화하는 것은 전문가이지만, 어떤 글자체가 더 좋고 나쁜지는 누구나 어렴풋이 알아본다. 심지어 의식이 감지하지 못해도, 신체가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전문가란 이렇게 사용자 본인도 모르던 피로를 살피고 치유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전체 사회의 감각을 건강하게 회복시킨다. - P176

글자에는 ‘가시성’·’판독성’·’가독성’이라는 기능이 있다. ‘가시성’은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힘이다. (…) ‘판독성’은 글자들이 서로 잘 판별되는가를 가른다. (…) 한편, 긴 글을 읽을 때 인체에 피로감을 덜 주는 글자체에 대해 ‘가독성’이 높다고 한다. - P209

글씨 쓰기란 그 결과가 평면으로만 드러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3차원 공간에서의 운동과 물리 작용이 반영되는 일이다. - P219

글자 = 글씨 + 활자(폰트)
글자체(글자의 모양) = 글씨체(글씨의 모양) + 활자체(폰트의 모양) - P224

물질과 자연과 우주를 압축적인 수식으로 통찰한 물리학을 탐구하는 인간의 마음과 이를 예리하게 벼린 함축적인 언어로 포착한 시를 쓰는 인간의 마음이란, 그 본질이 크게 다를까 싶다. - P226

뇌 신경과학자 이대열 교수의 저서 『지능의 탄생』에 따르면, 최근 인지과학에서는 직관과 감정을 이성 못지 않게 중요한 사고 능력의 본질로 본다. 장난치듯 이것저것 해보는 잉여 행동이 당장에는 쓸데없어 보이더라도 훗날 뜻밖의 위기를 헤쳐 나갈 경험적 자산으로 몸과 뇌에 새겨진다며 이 책에서는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 P272

또 다른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로 ‘월인천강(月印千江)’이 있다.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인쇄’되듯 ‘찍힌다(印)’라는 표현을 썼다. 달은 부처님의 말씀을, 천 개의 강은 사람들의 마음을 의미한다. 말은 한 번만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남도록, 복제와 대량 생산을 하는 과정이 바로 이 ‘인(印)’이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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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 PATA
문가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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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용기 없는 날 ‘파타'라고 하자.”


『 파타』는 배우 문가영의 산문집으로, 그가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사람을 만나오며 겪고 느낀 바가 듬성듬성 기록되어 있다. 마음 가득한 말들은 입을 통해 겉으로 표출되지 않고, 손 끝에서 뻗어나와 글로써 우리에게 전해진다. 문가영은 용기 없는 자신을 ‘파타’로 칭했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파타는 필요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문가영이 누구인가? 나는 모른다. 그렇다면 파타는 누구인가?

파타는 자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들을 저주하고, 예쁜 걸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너를 질투한다. 열심히 써내려간 연애편지를 도로 빼앗기도 하는 파타는 기대보단 확신을, 무리에 속하기보단 경계인으로서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 배우가, 이 사람이, 이 작가가 써내려가는 연대기는 제법 혼란스럽고 우울한 감상을 준다. ‘용기는 거짓보다 진실을 전할 때 더 필요로 한다(102면)는 걸 알기에 진심을 들킬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파타는 ‘새로운 사람을 안아주느니 아는 사람을 두 번 세 번 안아줘야겠네(109면)’라며 따뜻한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 문득 열 손가락을 펴고 계산을 해 보았을 때, 죽을 때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은 서점에 있는 것만큼도 못 하겠다는 감상을 하기도, 매년 한 번씩 여행을 간다고 해도 지구의 반조차 모를 것 같다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문가영이 누구인가? 나는 여전히 모른다. 하지만 파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이제 나는 파타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파타는, 가면을 방패삼아 뒤로 도망친 또 다른 자아가 아니다. 파타는, 카리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주기도 하고, 부모님의 기쁨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파타는 살아있다. 이 모든 순간들을 거치며, 그들과 함께.

"사람들이 자꾸만 내가 행복하기를 빌어주는 거야. 그들의 소망이 덕지덕지 내 몸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 널 사랑하기 때문인 걸 잘 알지 않냐는 말에 "알아. 내가 나쁜 거 알아. 아니, 이게 싫은 거야. 자꾸만 내가 나쁜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 그저 사는 나에게 자꾸만 행복하라고 하잖아! 그게 잘못된 건지 사람들은 모르나 봐. 그 마음이 얼마나 이기적인 건지." - P39

"난 무거운 임무에서 도망친 건데, 떠난 나에게 또 물어보더라. 여행은 행복하냐고. 돌아온 나에게 또 물어보더라. 어땠냐고. 다녀오니 행복하지 않으냐고." - P40

파타는 기대보다 확신을 사랑했고 기대라는 말보다 인정이 필요했다. - P41

용기는 거짓보다 진실을 전할 때 더 필요로 한다는 걸 그녀는 이때 알게 되었다. - P102

문득, 파타는 열 손가락을 펴고 계산하기 시작한다. ‘정해진 시간 아래 내가 죽을 때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쯤 되려나.’ 서점에 있는 책만큼도 못 읽겠네… ‘정해진 시간 아래 내가 몇 명의 사람을 더 안아줄 수 있으려나.’ 새로운 사람을 안아주느니 아는 사람을 두 번 세 번 안아줘야겠네… ‘정해진 시간 아래 여행을 몇 번이나 갈 수 있으려나.’ 매년 한 번씩 간다고 해도 지구의 반도 모르겠네… - P109

"어딘가에서 같이 공기를 나눠 먹고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그래도 불쑥 괘씸할 땐 숨을 조금 크게 들이마셔. 걔가 마실 공기가 조금은 부족하길 바라면서." - P113

그녀는 이 작은 방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지만 얕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얼굴도 모르던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했던 그녀는 이 작은 방에 홀로 들어왔다. 시간을 사는 일은 간단했지만 그 공간을 채워야 한다는 건 꽤 어려웠다. - P130

성공법칙 ― 잘 되는 사람의 이유와 내 주변의 실패와 내 경험의 판단이 합쳐지면 틀릴 이유가 없는데 - P153

입을 다물고 창을 바라보니 새가 울었다. 새소리조차 듣지 못한 내가 창피했고 새소리로도 행복해 하던 네가 부러웠다. - P183

겨우 예쁜 걸 예쁘다고 생각해낸 내가 기특할 뻔했는데, 소리 내어 말하는 네가 또 부러웠다. 별걸 다 질투하네. 부끄럽다 하자. - P185

꽉찬 말 — 빈말로 쓴 단어는 하나도 없고 진심이 안 담긴 문장조차 없어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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