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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 생존자와 유가족이 증언하는 10·29 이태원 참사
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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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그날 이태원에 있었다.


삶은 대체로 평온하다. 가난한 삶이든, 부유한 삶이든 각자의 우여곡절이야 있겠지만 대체로 인간의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비슷하다. 마치 인생이란 물질이 어떤 항상성을 띈 것처럼 지진부진한 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니 모든 테러와 재해와 사고가 별다를 것 없는 날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예고장 없이 불현듯이 찾아오는 시련. 거센 소용돌이 같은 그것은 2022년 10월 29일, 아주 보통의 나에게도 찾아왔다. 내 품에서 한 청년이 죽었고, 내 눈 앞에서만 수십명이 죽었다.

할로윈의 이태원이 처음은 아니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이전에는 종종 이벤트를 좇아 찾던 곳이었다. 좁은 골목을 누비는 인파, 새벽까지 붐비는 술집, 아예 거리 밖으로 난 스피커에서 터질듯 울려대는 노랫소리.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한 해를 강타한 영화와 각종 TV쇼 속 주인공들을 따라한 사람 구경이었다. 혹자는 나이가 들수록 매해 있는 생일보다 4년에 한 번 뿐인 월드컵과 올림픽이 더 재밌어진댔으나, 서커스단 같은 무리 속에 섞이는 일은 매년 겪어도 낯섦과 설렘이 공존했다.

작년에는 갓 서울에 상경하여 나와 한 집에서 살게 된 C와 함께 이태원을 가기로 했었다. C는 축제라면 가리지 않고 찾을 정도로 활발한 편이어서, 할로윈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기에 ‘할로윈 하면 이태원이지!’ 그런 속설을 들먹이며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나에게는 하염없이 익숙한 곳이, 초행인 친구에게는 낯설고 새로운 곳이 되리란 생각에 신이 났다. 언니만 믿고 따라와.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다이소에 들러 메이크업에 필요한 것들을 급하게 사고 무려 2시간동안 화장을 했다. 공들인 시간을 따지면 분장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하겠다. 우리는 마치 삐에로처럼 눈 위아래로 구슬 모양을 그렸고, 검은 잉크로 물들인 깃털을 붙이기도 했다. 허리 벨트에는 인형들을 주렁주렁 달고는 그것도 모자라 머리띠까지 썼다. 그맘때쯤 집 한켠에 세워둔 행거가 걸린 옷들의 무게를 못 견딘 나머지 쓰러져있었고, 깃털을 염색하느라 화장실 세면대가 지저분해졌지만 아랑곳않았다. 그것들은 아주 부차적인 것으로 신경조차 안 쓰였다. 우리에겐 끝내줄 게 분명한 할로윈의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기다린 파티. 사람들과의 만남. 신나는 밤이 될 것이 확실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행운이 크게 다가온 하루였다. 손님 발길이 드문 찰나를 틈타 맛있는 피자를 먹었고, 신논현에서부터 사람을 가득 실어나르는 버스에서는 운 좋게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었다. 이태원퀴논길과 세계음식거리를 지나칠 적에는 사람이 많은 게 싫어서 이태원어린이놀이터공원에 들러 우리끼리 한참을 깔깔대며 놀았다. 관광객이나 외지인들은 몰랐겠지만, 그날 이태원은 그렇게 한 골목만 비껴나도 고요했다.

아무래도 주민들이 사는 동네라 한적한 길거리를 유유히 부유하며 한창 유행하던 틱톡 챌린지를 따라 찍고 나니 배가 좀 고팠다. 아마 10시를 넘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단골이던 타코집은 영업시간이 마감되어서, 발걸음을 돌린 우리는 타파스바란 식당을 가기로 했다. 아니나다를까 그 앞 거리는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에도 이태원에 왔던 나는 C에게 그때보다는 사람이 적다고 말했다. 사람간 간격도 널널하고, 걷는데 불편하지 않네. 이런 식으로 친구를 안심시켰다.

막상 타파스바에 도착하고 보니 바로 식사를 할 수는 없었고 웨이팅을 해야 했다. 시간이 시간이다보니 다른 곳을 갈 여력은 없어 가게 앞에서부터 골목이 꺾이는 곳까지 선 줄을 따라 서서 사람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우리 앞에 대기하고 있던 커플은 깜찍한 교복을 짝맞추어 입고 분장 퀄리티도 대단해서 여러명이 지나가며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우리도 열심히 분장했는데 왜 아무도 같이 사진 찍자고 안 물어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길 안쪽에서 어떤 남자가 당황한 듯 뛰어왔다. 의식이 없는 여자를 업은 채였다.

처음에는 술 취한 사람을 부축해 온 줄 알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헤롱대는 사람일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실려나오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갈 때도, 뛰어오는 사람들의 코스튬이 경찰복과 소방관 유니폼인 경우가 더러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퍼레이드 같은 행사인걸까 싶었다. 걱정되긴 하지만 별 일 아닐거라고. 금방 해결될거라고 믿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사이로 웅성거림이 커졌다. 처음에는 화재가 났다고 했다. 저 앞 어떤 지하 클럽에서 불이 났다며 누가 손으로 가리켰다.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검은 연기는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 실려 나오는 사람들 모두 맨발인 상태여서 여기에 실내 클럽이 있었던가 기억을 되짚으며 더 의문에 빠졌다. 그때 누가 소리쳤다.

“안쪽에 더 많으니까 남자분들 가서 도와주세요!”

망설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말을 듣자마자 뛰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속이 탔다. 나도 뭔가를 하고 싶었다. 남자가 아니어서, 고작 여자란 이유 하나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어야한다는 사실이 짜증났다. 무엇보다 답답했던 건 아무도 정확한 정보를 모르는데 소문만 무성해진 상황이었다. 바로 휴대폰을 꺼내 네이버에 들어가 기사를 검색했다. 최신순으로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트위터를 켜서 이태원을 검색했다. 올라온 소식은 10개가 채 안됐다. 마약이 퍼졌단다. 3명이 죽었다고. 대한민국에 마약 파문이 인 지 얼마나 됐다고 이 즐거워야 하는 날 마약을 퍼트렸을까 안타까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어떤 마약이길래 한 날 한 시에 쓰러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거지?

“대로에 자리가 없으니 여기 눕히고 CPR 해야할 것 같아요.”

그 소리를 기점으로 사람들이 차곡차곡 자리잡혔다. 왼쪽부터 시작해서 오른쪽 끝이 보이지 않는 골목까지 헐벗겨지거나 헝클어진 사람들이 눕혀졌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CPR 할 수 있으신 분들은 나와서 도와달라고 했다. 불과 몇 달 전에 라이프가드 자격증을 땄기 때문에 나를 향해 외치는 말 같았다. 내가 해야 할 것 같았다.

“나 나갈까?”

사정을 알고 있는 C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고 생각했는데, 추후에 C와 얘기하다 보니 이미 나는 소지품과 머리띠를 모두 친구에게 맡기며 길 한가운데로 뛰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맡은 분은 체구가 작은 여성이었다. 현장이 급박하다보니 흰 블라우스를 잡아 뜯듯이 벗겨내고 몸을 옥죌만한 옷들은 다 풀었다. 허벅지며 몸 곳곳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압사의 자국이란 걸 나중에 뉴스를 보고 알았다. 나와 같이 부푼 마음을 안고 예쁘게 차려입고 왔을텐데 한 명은 바닥에 누워서 숨도 못 쉬고 있고, 한 명은 심폐소생술 하고 있고…… 그 형편이 기묘했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 상황을 해결해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CPR은 세명이서 교대로 돌아가며 했다. 뭇 남성들이라면 군대에서 CPR을 의무적으로 배우기 때문에, 구조 활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성이었다. 여자들은 피해자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혈액 순환을 도왔다.

물론 당시에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았다. 심폐소생술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거나, 자세가 엉망이라던가, 의사 행세를 하며 도움 안되는 말을 거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도무지 상황이 나아지질 않았다. 드라마나 영화처럼은 아니더라도 나는 다들 살 줄 알았다. 초반에는 사람들이 기절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들 금방 기침을 토해내고 숨을 쉴 줄 알았다.

여기서 밝혀두자면 그곳에는 참사를 막을 방파제나 댐이 없었다. 어떤 절차나 프로세스가 없었고, 눈에 닥치는 대로 조치를 취하기에 급급했다. 근데 그 얄팍한 조치조차 공권력을 가진 어느 기관이나 정치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컨대 내가 아는 CPR의 단계는 거기 검은색 모자 쓰신 분 119 불러주세요. 파란색 옷 입으신 분 제세동기 가져다주세요. 구령을 붙이며 CPR과 인공호흡을 하기. 딱 그거였는데,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119에는 누가 신고했겠거니 싶어 생략했고, 이미 신고가 들어갔을테니 제세동기는 응급구조사가 가져다줄 거라고 믿었다. 아니면 이미 누가 쓰고 있어서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거라고. 그리고 인공호흡은……. 못했다. CPR을 몇 분 하자 희생자분의 입 밖으로 피가 역류했기 때문이었다. 온 몸이 찬데 흐르는 피만이 유일하게 뜨거웠다. 인근 식당 등지에서 전달 받은 냅킨으로 닦긴 했지만, 닦아도 닦아도 피가 나왔다.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면 입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피를 게워내야 했는데 무서워서 못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자원해서 나오긴 했지만, 내 손에 피를 묻히는 게 겁이 났다. 그런 위인은 못 됐다. 내 그릇이 그랬다.

때마침 응급구조사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성분이 오셨다.

“저기요, 이 분 상태가 심각해요. 좀 봐주세요. 제세동기는 언제 오나요?”

다급하게 붙잡고 물었더니 한참을 내려다보다 일단 CPR을 계속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또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우린 그 말만 듣고 다시 CPR을 번갈아가며 계속 했다. 얼마 동안 했는지도 모르겠다.

“저희 한 30분은 했죠?”

“네……”

완전히 지쳤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서로 침묵 속에서 CPR만, 하란대로 그 빌어먹을 CPR만 했다. 다들 알았을 것이다. 이미 돌아오지 않는 호흡과 뛰지 않는 맥박을 미루어보아 이 사람이 진짜 죽었다는 사실을. 늦었단 걸 아는데, 이건 다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다들 모른 척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두면 이 사람이 진짜 잘못될까봐, 아직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더이상 CPR을 할 수 힘이 남아있지 않아 미안하지만 다른분께 계속 해달라고 부탁드리고는 일어섰다. 그제야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현장은 정말 아비규환, 아수라장, 혼돈, 그 자체였다. 구조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통제 속에서 식당이나 가게 등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시체들과 구조자들만으로 거리를 꽉 채운 광경은 경악스러웠고, 몸을 돌렸을 때 경찰 한 분이 머리에 손을 짚고 있는 걸 보았다. 아마 그 분도 처음 보는 상황이었을 것이었다. 어찌하면 좋을 지 몰라 우두커니 서서 황망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아,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느꼈다.

그 길로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 전까진 울어야 하는 상황인지도 몰랐는데, 곳곳에서 훌쩍이는 사람들을 보고 절망이 물밀듯 밀려왔다. 체제의 마비와 공권력에 대한 원망보다도 인간의 무력함과 한순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내가 왜 울지? 싶으면서도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모르는게 너무 많았다. 내가 더 뭘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저 식어버린 손을 주무르며 어떻게 여기서 죽어, 너는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따위의 말들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아직 못해본 게 많을텐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불러도 없는 대답에 성호를 긋고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올리려다 그러면 이 사람이 정말로 죽은 게 될까봐 그러지도 못했다. 대신 나중에 신원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나뒹굴던 소지품을 곁에 꼭 붙여주었다.

내가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울고 있자 타파스바의 유리창 너머로 상황을 지켜보던 C가 황급히 나와 너 안되겠다고, 집에 가야겠다고 강경하게 팔을 붙잡았다. 조금 뿌리쳤던 것 같기도 하다. 안쪽에 사람이 더 있다는데, 남아서 할 수 있는 걸 더 해야 하는데. 이미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나는 C가 이끄는대로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로 향했다.

대로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져있었다. 내가 황당했던 점은 앞에 분명 자리가 없어서 골목에 사람들을 눕혔다고 했는데, 큰 길에는 사람이 몇명 없었던 점이다. 해봤자 10명쯤 되는 사람들만이 눕혀진 채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거나 구급대원들에게 전문적인 CPR을 받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폴리스라인을 넘어 소방대원에게 뚜벅뚜벅 걸었다.

“저기 안쪽에 사람들이 더 있어요. 안에 진짜 심각한 사람이 있어요.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 안에도 사람이 있어요?”

소방관들은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더니 안쪽에도 사람이 있다며 그제야 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 곁에 남아 좀 더 도울지 고민하다 C도 있고 하여 집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다시 폴리스라인 밖으로 나갔다.

온 골목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태원을 빠져나가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아마 삼각지까지 걸어갔던 것 같은데, 간간히 응급차들이 웽 하는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갔다. 이미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 싶어 또 울었다. 상황을 따지지 않고 팔 걷고 돕는 시민들의 합심이나 미담이 이 세상을 밝게 만들기엔 이 얼마나 허망하고 어이없는 죽음인가. 정말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아무도 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참사가 발생한 지점을 좀 벗어나니 그제야 이태원에 도착한 사람들이 웃고 노래 부르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엉망이 된 얼굴로 비척비척 걸어가는 나를 보고 흠칫하거나, 상황 파악을 못하고 추파를 던졌다. 평소라면 눈치도 없다며 미웠을 그 사람들은 모두 다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다들 무사했으면 좋았을걸.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를 부르며 버스킹하는 사람도 있었다. 딱히 구슬프지도 잘 불렀던 것 같지도 않은데 아직 상황이 전파되지 않은 딴 세상에서 흐르는 그 노래가 심장에 퍽퍽 박혔다. 만일 그대 내 곁을 떠난다면 끝까지 따르리, 저 끝까지 따르리, 내사랑 그대 내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이 가사가 꼭 세상을 떠난 희생자분을 배웅하는 노래 같았다. 나는 그게 감당할 수 없을만큼 슬펐다.

잠실까지 가는 대로가 통제되어 있다는 C의 말을 듣고, 우린 안암에 있는 C의 동생네 집까지 가는 택시를 탔다. 사실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버스도 탔던 것 같은데, 그 안에서 뒤늦게 도착한 재난 문자와 사망자 수가 몇십명으로 집계된 기사를 보았다. 그렇구나. 다들 죽었구나. 다들 거기서 그렇게 생을 마감했는데 나는 도망쳐나왔구나. 죄책감에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윤석열이 방금 어떤 반응을 했단 기사도 보았다. 모든 게 다 의미가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수습한다고, 그런 가시 박힌 생각들이 자꾸 샘솟았다.

안암에 도착하니 그날 아마 연고전이 있었던 모양인지, 승리의 기쁨과 취기에 왁자지껄 떠드는 학생 무리들을 몇 번 맞닦뜨렸다. 나는 걔네라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한창 즐거워할 나이의 너네가 살아있어서 정말 감사하다고. 너네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C의 동생은 따뜻한 차를 대접했다. 그것도 미안해서 울었다. 나 스스로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을 자격도, 잠을 청할 자격도 없다고 여겼다. 겨우 얼굴과 손발만 닦고 자리에 누워 휴대폰을 확인했다. 사망자 수는 100명을 훌쩍 넘어 있었고, 이태원에 간 걸 아는 사람들로부터 카톡이 와 있었다. 괜찮아? 너 어디야? 응 나 괜찮아. 잘 돌아왔어. 동이 트기 전에 C의 어머니로부터도 전화가 왔다. C와 C의 동생이랑 연락이 안 된다고. 온 가족이 (뒤에서 할머님까지 웅얼거리는 소리가 넘어왔다) 걱정하고 있다고. 자고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어요. 그렇게 모두를 안심시키고 몇 분쯤 눈을 붙였다. 아침에 전화가 온 엄마에게도 나 괜찮다고 말했다.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에서 저자 김초롱이 말했듯, 나 또한 “뉴스에서 다루는 참사 사상자와 내가 전혀 상관이 없는 듯 의식적으로 덮으려 했다(77면)”. 이더러 몇몇의 친구들은 너네라도 살아 돌아와 정말 다행이고 행운이라고 했다. 나를 위해주고 가장 생각해주는 이들의 안도란 걸 마음속으로는 알았지만, 그게 몹시도 싫고 경멸스러웠다. 그럼 거기서 죽은 사람들은 단지 운이 없어서 죽은거냐고 따져묻고 싶었다. 마음속에 가시가 점점 돋아났다.

더 이상 서울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음날엔 선약이 있던 친구와 간신히 얼굴을 보고는, 곧바로 대구로 내려갔다. 눈만 뜨고 있으면 눈물이 나니, 회사에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매진인 기차표를 겨우 구해서 짐도 챙기지 않고 기차를 탔다. 내려가는 내내 마스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동대구역에 내리자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인데 갑자기 내려온 나를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간신히 참던 눈물이 또다시 터졌다. 엉엉거리며 안겼다. 엄마 사실 나 이태원에 있었어. 내 눈 앞에서 사람이 죽었어. 내가 어떻게든 하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숨을 안 쉬어. 피가 났는데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했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대구에 있는 일주일 동안은 눈만 뜨고 있으면 울었고, 그래서 회피성으로 잠을 17시간정도 잤다. 두근거림, 두통, 호흡곤란, 불안감, 죄책감, 우울감, 이 밖에 기타 등등의 증상을 몇 달간 앓았다. 회사에 복귀하긴 했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만무했다. 손이 너무 떨려서 글씨조차 쓰지 못했고, 집중도가 떨어지니 똑같은 이메일을 수십번 읽어야했다. 휴직을 하기 위해 진단서를 타러 병원에 여러번 내원할 때에 상사는 ‘네가 이태원 때문에 힘든 것도 있겠지만, 일을 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것’이라며 가스라이팅했다. 심리적으로 약해진 나는 진짜 그런가? 사실 퇴사하고 싶은데 이태원 일을 계기로 이러고 있나? 스스로 검열했다. 위에서 언급한 책에서 김초롱이 말했듯, 나는 몸도 다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고 멀쩡히 숨 쉬고 살아 있으며 다만 그냥 거기에 있었을 뿐(43면)이었으니까. “가족과 사별했거나 친구를 잃은 것처럼 ‘가까운 누군가를 잃은 경험’이라면 충분히 이해할만 하나, 알지도 못하고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잃고 힘들어(70면)”하는 상실감은 남들이 볼 때 납득할만한 이유는 못 된다고 여겼다.

상담을 받으며 여러 차례 테라피를 시도했지만 오히려 같이 이태원에 갔고, 같이 사는 C와 상태를 비교하며 상태가 악화되었다. 새로 배우던 운동도 제대로 못해내자 자존감이 수없이 깎였다. 아무것도 잘 하는 게 없었다. PTSD가 세게 오자 자살충동이 심해졌다. 사실 나도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고,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죄를 씻기 위한 결론은 죽음이었다.

상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휴직계를 내고 대구에서 요양을 했다. 첫 3달은 집에만 있었고, 그다음 3달은 운동을 했다. 그 다음 3달은 새로운 악기를 배우며 시 쓰는 법을 배웠다. 몇 차례 회사로 복귀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의사 선생님이 말렸다. 아직 섣부른 것 같다고. 약물 치료를 하고 좋아하던 여행도 가보며 그 사이 많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진심을 꾹꾹 눌러담아 쓴 편지를 몇 차례 펼쳐볼때마다 감동에 찬 눈물을 훔쳤다. 조심스러워하느라 마주보고 말을 건네지는 못해도, 마음이 느껴지는 문장들에 가슴이 아려왔다. 이들을 두고 어떻게 가겠는가. 과분한 사랑에 살아야겠다고,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시 10월이 돌아오자 나도 뭔가를 해야할 것 같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이제 숨지 않고 나서야겠다고. 당시에 못했던 일들을 지금이라도 해야겠다고. 그래서 용기를 냈다.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북토크에 가 유가족분들과 얘기를 나누었고, 인권 센터 선생님과 만나 기록과 운동에 힘을 보탰다. 1주기 추모집회도 가서 자리를 지키며 포스트잇에 이렇게 썼다.

정말 미안합니다.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이때까지 모르는 척 해왔어요. 제 몸 하나 가누느라 바쁘단 핑계를 댔습니다. 이기적으로 보이겠지만, 저도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합니다. 일상을 보내고, 웃어도 보고 이제 그럴려구요. 이제 마주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늘나라에서 편안할 수 있도록, 가족분들과 같이 싸우겠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욕심이라면 이마저도 미안합니다. 그러니 저를 잘 살펴봐주세요.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을 돕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지 감시해주세요. 저 정말 잘 살아가겠습니다.

기세를 타 같이 독서모임 하는 친구들에게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를 선물하며 같이 얘기 나누는 자리도 마련했다. 파라마운트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Crush>를 수급하여 당시의 영상도 함께 보는데, 더이상 죽고싶을만큼 괴롭지 않았다. 이제 그 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많이 괜찮아졌다. 그 날 함께 구조 활동을 했던 사람들, 목격자들, 생존자들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1년동안 많이 힘들었을 테지만 꿋꿋이 살아냈길 진심으로 바랄 수 있게 되었다.

2022년 10월 29일의 이태원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거리에 각자의 사연을 남겨두었다. 아직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한 이야기들은 몇 개나 있을까. 내가 전하는 이야기 말고도 다각적인 조각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에서는 “국가 부재 상황에서 서로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쓴 이들이 적지 않건만 그날을 증언하는 이들은 너무 적다(6면)”고 일컫는다. “혹여 자신들의 말이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 말을 고르다 채 토해내지 못하고 일어선다(9면)”는 것이다.

기타노 타케시는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라고 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합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을 힘이 된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으면, 우리가 똑바로 다시 이태원을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이태원 참사에 관한 소식은 하기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1029ac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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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도시를 생각해 - 우리가 먹고 자고 일하고 노는 도시의 안녕을 고민하다
최성용 지음 / 북트리거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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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사를 했다. 원래 살던 동네가 한적하고 조용해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는데, 물가를 반영하듯 자연스레 오른 월세와 겨울철 동파 방지를 위해 세탁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고택의 문제점 등의 이유로 갑작스럽게 결정된 것이었다. 책 『내일의 도시를 생각해』 작가의 말마따나, 내가 그 동네를 좋아하건 말건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계약할 당시에는 이사 갈 곳의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입주하고 나서 필요한 곳 이곳저곳을 들르다보니 사람들이 왜 ‘역세권’에 혀를 내두르는 지 절실하게 체감하게 됐다. 생활과 여가에 필요한 공간과 시설물들이 걸어서 10분 거리 내에 있었다. 각종 노선으로 뻗쳐나가는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 수많은 도서를 마음껏 대출할 수 있는 도서관, 주거래 은행, 맛있는 빵집, 고즈넉하거나 신상인 카페들, 최신 개봉 영화들을 밤낮으로 상영하는 영화관, 생필품 판매점, 대형 마트, 백화점, 각종 상점들과 음식점은 물론 술집들이 즐비해있는 시가지까지. 내가 아는 한 나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이 엄청난 기반에 감탄하기도 잠시, 최성용의 『내일의 도시를 생각해』를 읽고 나서는 이 도시의 화려한 면모에 현혹되어 사실은 내가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도시에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아니, 그것들이 훨씬 많았다. 『내일의 도시를 생각해』에서는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이 도시의 구조물들과 그 구성 요소들을 훑어보며, 그 발생 연고와 문제점 그리고 개선 방안까지 챕터별로 꼬집는다. 인간들의 삶만 살펴보지 않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작가가 공감했듯, 따지고 보면 도시는 원래 동식물들의 땅이었고, 그 땅을 사람들이 점령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투명 방음벽이었다. 매번 드라이브를 갈 때마다 고속도로 양 옆에 펼쳐진 울타리의 정체가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그게 바로 방음벽이었다. 큰 차가 지나가는 산업도로나, 빠른 속도를 달리는 자동차 때문에 엄청나게 시끄러운 고속도로 옆에 주로 설치되는 방음벽은 공간의 분리를 이끌고 소음을 차단하여 근처에도 집들이 들어설 수 있게 해주는 설치물이다. 그런데 이 방음벽이 조망권과 치안을 위해 투명으로 바뀌자 새들이 부딪혀 죽어나갔다. 국립 생태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하루 2만 마리의 새가 투명 방음벽과 건물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버드 세이버, 즉 맹금류 모양의 스티커를 부착하기도 하였으나 효과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이후 가로 10cm, 세로 5cm 간격으로 물방울무늬나 얇은 줄을 인쇄해 유리에 붙이는 방식이 채택되어 시행 중에 있다.


이처럼 지금의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도시의 모습은 원래부터 이랬던 게 아니라, 사실은 모두의 노력과 관심 덕택에 수많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현재진행중의 상태에 있다. 고가도로와 지하차도는 교통지옥을 해소하기 위해, 육교는 횡단보도를 없애 차들이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아파트는 주거안정과 도시로 밀려드는 시민의 집단 수용을 위해, 신호등은 도로의 신호 체계 정립을 위해 만들어졌다. 수도권 매립지나 초고압 송전탑과 같은 혐오 시설에 대한 공방전, 이주민들의 거주 문제에 얽힌 시선들, 반려동물을 도시의 구성원으로 바라보기 위한 제도의 수립은 각각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모두 다 같이 더불어 잘 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방음벽의 존재 의의를 몰랐듯,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도시 속에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고, 생활 편의성을 도모하는 것들이 참 많다. 물론 ‘문화지체 현상’, 즉 새로운 것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 부작용을 바로 알기 쉽지 않아서 한참 뒤에야 그 사용과 관련한 규범이 생기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각종 시행착오를 통해 물질적인 것(기술)과 비물질적인 것(규범)의 변동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조화를 해소해나가다 보면 현재의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이 사실 많은 논의 끝에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도시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사람들도 도시의 모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그러니 사소한 것부터 관심을 가질 것. 그것이 내가 이 책을 통해 받은 교훈이다. 사적 이익과 욕구를 좇는 것도, 공공성을 높이는 행동도 모두 도시를 바꾸는 힘이 된다. 지금의 도시 풍경이 선택과 움직임이 쌓여 만들어진 것처럼, 앞으로도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이 기회를 빌려 도시를 구성하고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터전을 제공해진 동식물에게 감사인사를 바치고자 한다.



아내와 저는 이 동네에서 오랫동안 아이를 키우며 살기로 결정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2년 후 전세 가격이 급등하면서 더 이상 그 동네에 살 수 없게 됐습니다. 제가 그 동네를 좋아하건 말건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지요. - P6

도시의 밤은 개인의 선택과 기업의 결정이 맞물린 문제입니다. 더불어 이는 정책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정책은 우리의 합의이고, 사회적 공감이지요. - P97

국립생태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하루 2만 마리의 새가 투명 방음벽과 건물 유리창에 부딪혀 죽습니다. - P164

사실 어떤 새로운 물건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 부작용을 바로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건이 도입되고 나서 한참 뒤에 물건의 사용과 관련한 규범이 하나둘씩 생기고는 합니다. 이를 문화지체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물질적인 것(기술)과 비물질적인 것(규범)의 변동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부조화를 말하지요.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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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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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할머니는 내 동생이 막 들어간 초등학교에서 입학식을 치르던 중 돌아가셨다. 나 또한 새로운 반에서의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느끼고 있던 차에 비보를 전해 받았다. 무려 새 학기 첫날인데, 얼른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찾아오더니 제대로 얼굴 도장도 찍지 못하고 장례식장에 가야하다니.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보다 그게 더 슬펐던 어린 날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심윤경 작가가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서 “내 기억 속에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6면)”라고 말한 것처럼 뜨문뜨문하다. 세상 할머니들은 모두 “마치 공기에서 따뜻한 손이 솟아나 나를 달래고 어루만진 것처럼 (중략) 등 뒤의 익숙한 촉감과 목소리로만 존재(같은 면)”하는 걸까?

작가는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노르스름한 햇살이 드는 방, 공기 속을 떠다니는 먼지들, 콩기름을 먹인 장판, 그런 것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추억이란 건 아무래도 장소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마련이지 않을까 하는 게 지론이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라 해도 나의 관점으로, 나의 시선으로 저장된 것들이다. 내가 바라본 풍경, 내가 걸었던 골목, 내가 어루만졌던 할머니. 그 기억들은 아주 소중하고 쉽게 잊어버리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것들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나는 이 독후감을 통해 “오래된 감각들을 되살리는 일에 좀 더 집착해보기로 했다(49면)”.

나의 친할머니는 대구에서 차로 30분정도 떨어진 하양에 사셨는데,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가기 위해선 시골의 드넓은 논 사이 비포장도로를 지나야했다. 포도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지나칠 땐 엄마가 저건 어떤 밭이라고 설명해주었고,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나는 너무 신기했다. 종종 할머니가 키우던 텃밭에 가기도 했는데, 고추와 토마토를 따고, 감자를 캐거나 아궁이 불에 군고구마를 구워먹었던 일은 지금은 해 볼 수 없기에 아주 값진 경험이 되었다.

할머니는 아빠와 고모들이 마련하신 오래된 아파트에 주로 머무시며, 조금 떨어진 고택은 별장처럼 이용하셨다. 그 부근에 당신의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종종 나를 데리고 화투를 치러 가셨다. 할머니는 혼자 놀기 민망했는지 화투 룰을 모르던 나에게 그림 맞추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아직 어려 한 눈에 잘 외우지 못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으셨다. 작가는 이를 두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성벽처럼 강하고 높은 존재여야 하지만, 이럴 때는 아이가 가볍게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낮은 발판 정도로 슬그머니 몸을 낮추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113면)”고 일컬었고, 이 문장은 성인이 되어보니 그맘때의 할머니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한편으로 나는 그 낡은 한옥의 푸세식 화장실과 다 무너질 것 같은 인테리어가 싫었다. 아주 전형적인 도시 아이처럼 유난히도 깔끔을 떨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미 나를 당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셨던 분이었다. 시장에 가서 그맘때 유행하던 순정만화책을 한 권씩 사주셨던 것이다. 교육 방면으로 신경을 많이 쓰던 엄마가 절대 만화책은 못 읽게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할머니와 있을 때가 기회였다. 또, 할머니는 본인 특유의 레시피로 무장한 참기름간장계란밥과 비엔나소시지를 내밀기도 했는데, 그건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반칙이었다. 분명 집에서도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도, 혼자 해보려고 하면 영 그 맛이 안 났다. 할머니 집에 가게 되면 그것들을 먹을 생각에 군침부터 돌았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런 것들 덕에 나는 할머니와 손을 잡고 아파트와 고택 사이를 오갈 수 있었고, 아직까지 그 기억들을 반추하고 있다.

할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들은 대게 병상 위에서 아픈 미소를 짓던 모습이다. 병인은 단순히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 미끄러지신 것이었는데, 나이와 세월은 그 상처를 더욱 쑤셨고 할머니는 쉽게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게 참 억울했다. 내 생애 첫 장례식은 그렇게 치러졌다. 고모가 울며 감정을 추스르는 와중에 “엄마는 이제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어.”라고 말하던 것이 아직까지 사무치게 남아있다.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속 할머니는 “나처럼 억울한 인생이 또 있을까(71면)”하고 중얼거린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할머니들의 삶은 고통과 시련과 미련으로 점칠 되어 있다. 그 시대가 그렇다. 작가는 결혼과 육아 “이전에 살던 세계는 학교, 직장, 문화, 친구, 성취와 우정의 세계(34면)”이었다면, “아이와 함께하는 세계는 쉬, 똥, 침, 코, 토, 잠, 젖”이라 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당신의 아이들을 키우던 세계는 억울함, 절약적, 희생양 같은 한글자도, 두 글자도 아닌 무려 무게가 추가된 세 글자로 이루어진다. 애, 엄마, 할머니의 글자 수 구도가 똑같은 점도 신기하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예전의 기억들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릴 할머니가 있다는 건 나의 큰 행운이며, 아직 살아계시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더욱 끔찍이 모셔야하는 이유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말해보고 싶다. 할머니, 사랑했고 아직까지도 사랑합니다.




이전에 살던 세계는 학교, 직장, 문화, 친구, 성취와 우정의 세계였다. 모두 두 글자 이상이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세계는 쉬, 똥, 침, 코, 토, 잠, 젖, 신기하도록 모두 한 글자였다. - P34

울고불고 자지러지는 단계에서 분명히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감정이 선행되었을 텐데, 그 부분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휘발되어 놀랍도록 깨끗이 사라지고 할머니와 단둘이 있는 것에 흐뭇하고 만족했던 기억만이 안정적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나의 옛 기억이 그토록 불균형함에 신기함을 느끼며 오래된 감각들을 되살리는 일에 좀 더 집착해보기로 했다. - P49

내 기억 속에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 마치 공기에서 따뜻한 손이 솟아나 나를 달래고 어루만진 것처럼 할머니는 등 뒤의 익숙한 촉감과 목소리로만 존재했다. - P6

"나처럼 억울한 인생이 또 있을까." 할머니는 그런 고생은 다시 떠올리기조차 고통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 속은 아무도 몰러." 그게 내가 할머니에게 들을 수 있었던 전부였다. - P71

타인에 의해 내가 잘못한 부분이나 고쳐야 할 지점들을 마주할 때 내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드는 것은 예술에 가까운 섬세한 솜씨가 필요한 일이었다. - P85

이 아이가 부모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분노, 내가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하고 있다는 좌절감, 일어난 피해를 수습해야 하는 고단함,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화산처럼 돌과 불을 뿜어내고 싶어졌다. - P108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성벽처럼 강하고 높은 존재여야 하지만, 이럴 때는 아이가 가볍게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낮은 발판 정도로 슬그머니 몸을 낮추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 P113

첫째도 허술하고 둘째도 허술할 것.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부모가 되기에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라기 때문에. - P143

아이들에게는 무턱대고 믿어주고 기특하게 여겨주는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전에는 그런 존재들이 함께 살았는데 이제는 함께 살지 않는다. - P162

세상에는 나같이 범속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경지의 사랑을 실천하시는 부모님들이 계시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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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샷 뒤의 여자들 - 피드 안팎에서 마주한 얼굴
김지효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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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16년 여름, 대학 입학 후 친구와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던 밤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녹초가 된 몸을 편히 쉬게 하거나, 수다를 떨거나, 맥주 한잔하며 여행의 여흥을 푸는 행동 등은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에 각자의 침대에 누워 말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들을 추려내고 보정했다. 침묵 속에서 그렇게 한 시간여를 쓰고는 빠르게 씻고 잠에 들었다. 낮 중에는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 수백장을 찍었다. 딱히 유명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남의 사택 앞이더라도, 투어 도중이더라도 우리는 꽃이 피거나 예쁘고 이국적인 풍경이 보이면 그 앞에 멈춰서서 무한히 셔터를 눌러댔다. 그러던 중 주로 사진을 찍고, 찍어주던 친구의 휴대폰이 고장 나버렸다. 여행 내내 열심히 찍었던 사진을 몽땅 다 날려버렸다는 허탈감이 몰려왔지만, 동시에 일종의 해방감이 느껴졌다. 이상했다. 오로지 SNS에 올릴 ‘인생샷’을 건지기 위해 몰두한 시간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는데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어쩔 수 없지’ 혹은 ‘차라리 잘됐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후 우리는 온전히 여행에 집중하며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고, 두 눈에 자연경관을 담았으며, 깨알같이 적혀있는 버스 정류장의 시간표를 뚫어지게 보며 귀갓길을 모색하는 등 진정한 여행의 묘미라 불리는 것들을 마음껏 즐겼다.


지나온 20대 초중반의 나날들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엔 힙한 카페나 미술관을 방문해 친구들과 양껏 사진을 찍었고, 귀갓길엔 서로 찍어준 사진들을 카톡으로 남김없이 받았다. 집에 도착했음에도 바로 씻지 않은 채 터질듯한 갤러리를 정리했고, 보정 어플을 켜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고쳤다. 그 모든 일들은 인스타그램에 단 몇 장을 올리기 위한 과정이자 수단이었다. 그때에는 당일에 올리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다르게 말하면 하루라도 늦어지면 밀려버리는 사진의 양을 감당할 수 없을까 봐 무서웠다.


책 『인생샷 뒤의 여자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친구의 얼굴보다 프로필사진을 더 마주하는 시대에 (…) 청년 여성들은 생애 전반에 걸쳐 SNS에 디지털 자화상을 남겨왔다(15면)”고 일컫는다. “자신을 차별화하고자 했던 여성들은 결국 여성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로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계속 트렌드를 검색하고 이에 맞게 소비하며 힙함과 특별함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애쓴(71면)” 결과는 인스타그램으로 집결되었다. 이미지 중심의 SNS인 인스타그램은 셀카와 인생샷을 전시하기에 최적의 플랫폼이다. 설계 구조부터 이미 “이용자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도록(280면)” 되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스타그램이 서비스를 시작한 아주 초기부터 가입하여 아직 계정을 유지하고 있는 충성 사용자이다. 초기의 볼품없는 필터부터 24시간 동안 공개하는 ‘스토리’ 기능과 숏폼 동영상 서비스인 ‘ 릴스’로 무장한 현재까지, 모든 트렌드를 두 눈으로 지켜봐왔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과거에는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면, 이제는 사진을 찍기 위해 기념할 날을 정한다(65면)”는 것이다. 이는 일상의 풍경을 공유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도래했음을 뜻한다. 과거의 셀카는 얼굴과 패션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몸이 놓인 공간, 즉 배경까지 셀카의 범주에 들어오게 되어 스스로 도취하여 살아가는 현대인의 공허함 및 비윤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 책에서 인터뷰 대상자들은 자신의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일종의 스펙으로 여기며, 관리를 잘할수록 본인의 가치 또한 올라간다고 여긴다. ‘좋아요’ 수와 팔로워 수를 인기 척도로 여기는 것은 물론, 주변 뭇 남성들로부터 관심을 받을 것이라는 착각과 또래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는다. 생각해 보면 “여성이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사실 오랫동안 이뤄져 온 일이다(98면)”. “여학생들은 학교를 다니는 내내 외모 평가 및 불법촬영, 성생활에 대한 거짓 소문에 시달려야(115면)”했고, “너무 예쁘거나 못생겨서, 너무 똑똑하거나 멍청해서, 너무 가난하거나 부자여서 등 다양한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140면)”. 그러니 지금, “인생샷과 디지털 페미니즘은 같은 시기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주체들에 의해 일상적으로 실천(183면)”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저자 김지효는 “연구를 진행하며 SNS 관련 논의가 자주 이분화된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점(283면)”을 발견했다. “SNS가 사람들을 과도하게 연결시킨다는 평가는 언제나 SNS가 사람들을 단절시키고 외롭게 만든다는 정반대의 평가와 공존했다. 또한 SNS 이용자들이 자기 자신에게만 도취되어 있다는 평가는 이들이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중시한다는 평가와 공존했다. 마찬가지로 SNS 정치는 실험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혁신적 시도였다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과시적 행위라는 비판을 받았다(283면)”. 이러한 상반된 평가들은 인스타그램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이미지만 보여줄 것을 기능적으로 강요하지만, 실상은 “공과 사를, 일상과 정치를, 오락과 토론을, 과시와 소통을, 친구와 ‘대중’을, 시민의 정치 참여와 생활인의 일상(284면)”이 뒤섞여 내재하여 있음을 뜻한다. 


저자는 또 “누군가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를 브랜딩하려고 노력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여성은 페미니즘으로부터 더욱 멀어진다(292면)”고 하였다. 그러나 염두에 둬야 할 것은 “현실은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각자가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305면)”는 점이다. 차별의 문법을 전복할 힘이 없다면 그 장소를 벗어나면 된다. 준거 집단을 바꾸어 사랑받음의 기준을 바꿀 수도 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존재감을 느끼는(103면)” 일은 온라인에서 받는 ‘좋아요’와 팔로잉, 댓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라 아메드는 저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특정 길을 많이 갈수록 그 길은 더욱 선명해진다. 여기에 “발자국의 역설”이 있다. 길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가기에 생기고, 길이 생기기에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른다. 우리는 길을 사용하는 한 길을 사용할 수 있다(307면)”. 구태여 샛길을 만들지 않아도 우리는 이제 셀카가 더는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몇 해 전 여행지에서 느꼈던 것처럼, 당장 집착을 버릴 순 없어도 보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다른 ‘낯섦’으로 뛰어들 필요가 있다. 저자 말대로 “이 낯섦과 불쾌함은 앎의 시작(269면)”이기 때문에.

많은 책에서 셀카는 타자를 소거한 채 자신에게 도취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의 공허함 및 비윤리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제시됐다. - P13

친구의 얼굴보다 프로필사진을 더 자주 마주하는 시대에, ‘아름다움’이나 ‘외모’로 칭해지는 많은 것은 사실 디지털화된 아름다움인 셀카를 뜻한다. - P15

나이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청년 여성들은 생애 전반에 걸쳐 SNS에 디지털 자화상을 남겨왔다. - P25

지금은 스마트폰 용량이 체감상 무한대에 가까워 원하는 만큼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24컷이나 36컷 필름에 따라 정해진 컷 수만큼만 찍을 수 있었다. 한 컷 한 컷이 모두 비용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래 기억할 가치가 있는 기념적인 날에 주로 사진을 찍었다. - P27

셀카 유행 초기에 얼굴이, 그다음으로 패션이 중요했다면 이제 또 하나 차별점이 추가된다. 바로 배경이다. 카메라의 화각은 점점 넓어져 이제 몸이 놓인 공간까지 셀카의 범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 P44

과거에는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면, 이제는 사진을 찍기 위해 기념할 날을 정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 P65

여성들은 계속 트렌드를 검색하고 이에 맞게 소비하며 힙함과 특별함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애쓴다. - P71

자신을 차별화하고자 했던 여성들은 결국 여성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로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 P71

해외에 여행을 갈 때는 "무조건" 한국 여성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한다고도 했다. - P78

여성이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사실 오랫동안 이뤄져온 일이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가치는 남성과의 사적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 P98

아이디를 알려줄 때 이걸 말하면 내 가치가 올라갈 거라는 걸 알거든요. (…) 인스타그램이 뭔가 제 하나의 스펙 같아요. 인스타그램이나 인기 척도 자체가요. - P101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존재감을 느낀다. 이것이 온라인에서는 ‘좋아요’와 팔로잉, 댓글로 이뤄진다. 사람들은 ‘좋아요’를 받을 때마다 게시물을 올려도 괜찮다는 사회적 승인을 받는다. - P103

남성이 스스로를 연애 관계 속 약자로 제시하는 장면은 럽스타그램에 내재된 성별 권력 구조를 은폐한다. 남성은 애초 인생샷을 찍거나 이성애를 전시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 P110

여학생들은 학교를 다니는 내내 외모 평가 및 불법촬영, 성생활에 대한 거짓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 P115

실제로 오프라인 결속력이 강한 집단의 경우, 온라인에 실물과 다른 모습을 전시하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여겨지며 비난받기도 한다. - P128

사회는 이것들만 얻으면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불어넣지만, 실상 성차별적 사회는 인정과 사랑의 약속을 자주 배반한다. 여성들은 너무 예쁘거나 못생겨서, 너무 똑똑하거나 멍청해서, 너무 가난하거나 부자여서 등 다양한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 P140

차별의 문법을 전복할 힘이 없는 개인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그 장소를 벗어나는 것이다. - P140

아름다움의 효과는 아름다운 여성을 봤을 때가 아니라,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을 봤을 때 발생한다. - P174

인생샷과 디지털 페미니즘은 같은 시기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주체들에 의해 일상적으로 실천된다. - P183

인스타그램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이미지만 보여줄 것을 기능적으로 강요한다. - P196

성차별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구조적 차별을 열등한 여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전략을 자주 사용한다. - P208

준거 집단을 바꾸는 것은 사랑받음의 기준을 바꾸는 것이다. - P229

억압은 안정과, 해방은 위험과 붙어 있기 때문이다. - P233

이것은 탈코르셋과 인생샷의 차이가 페미니즘 인식과 같은 내적 요인에만 있지 않고, 이들이 속해 있는 집단·환경·조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 P243

이 낯섦과 불쾌함은 앎의 시작이다. - P269

인스타그램은 이용자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 P280

나는 연구를 진행하며 SNS 관련 논의가 자주 이분화된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발견했다. SNS가 사람들을 과도하게 연결시킨다는 평가는 언제나 SNS가 사람들을 단절시키고 외롭게 만든다는 정반대의 평가와 공존했다. 또한 SNS 이용자들이 자기 자신에게만 도취되어 있다는 평가는 이들이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중시한다는 평가와 공존했다. 마찬가지로 SNS 정치는 실험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혁신적 시도였다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과시적 행위라는 비판을 받았다. - P283

이곳은 공과 사를, 일상과 정치를, 오락과 토론을, 과시와 소통을, 친구와 ‘대중’을, 시민의 정치 참여와 생활인의 일상을 뒤섞는다. - P284

누군가 페미니스트의 이미지를 브랜딩하려고 노력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여성은 페미니즘으로부터 더욱 멀어진다. - P292

여성은 바늘귀 같은 기준을 통과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 P296

현실은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각자가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305 - P305

사람들이 특정 길을 많이 갈수록 그 길은 더욱 선명해진다. 여기에 "발자국의 역설"이 있다. "길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가기에 생기고, 길이 생기기에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른다. 우리는 길을 사용하는 한 길을 사용할 수 있다."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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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 개정보급판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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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따옴표 안의 문장은 모두 책에서 인용하였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정신 의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그의 자전적 에세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참혹한 고통과, 그때에 얻은 삶은 의미에 대해 본인이 창안한 정신 치료법 이론인 ‘로고테라피’를 토대로 풀어나간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 ‘로고스Logos’와 ‘치료’를 뜻하는 ‘테라피therapy’가 합쳐진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기울이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하는 기법이다. 즉,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제국이 유태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건설한 대규모의 수용소로, 이미 악명 높은 역사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이유 없는 발길질과 구타를 당하며, 끼니조차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약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 수용소에서는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은 단지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이제 곧 끌려갈 친구의 목숨을 구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오로지 죄수 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있고,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인 곳에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현상을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저자는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쓰인 글을 읽자니 작년 겨울부터 잠시 일을 쉬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이태원 참사에서 혼자 돌아왔다는 죄책감을 뿌리치지 못했을 때, 비록 수많은 또래들이 한순간에 하늘나라로 가게 된 국가적 재해였으나, 나는 감히 살아있단 이유로 평소와 같은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고군분투했고, 새로운 운동을 배우던 검도장에서는 고수들에게 죽도로 정수리만 맞다 오기 일쑤였다. 집에서는 룸메이트와의 불화로 매일 밤마다 인근 호수를 지칠 때까지 걷다 귀가했다. 내가 있을 곳이 없다는 생각보다도 절망스러웠던 건 상태가 영 호전되지 않아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기자 직장 상사가 폭언을 퍼붓기 시작한 일이었다. 무력감에 지배된 나머지 매사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되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일을 두고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고 일컫는다. 정말 그랬다. 당시의 내가 휩싸여 있던 감정은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분노보다도,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몰라 다 포기하고 싶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혐오감이 생겼고, 그 혐오감은 이내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바뀌었다.

이 책은 그런 나를 올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쳐주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진리를 바탕으로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나에게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빅터 프랭클은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하였다.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 학대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의 말마따나 나를 괴롭히던 환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회사를 그만뒀고, 운동을 잠시 쉬고 본가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인생은 여전히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으며, 미래를 기다릴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는 나를 무한히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고, 다른 회사 구인 공고를 접하고 면접을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나는 사실 익숙한 운동을 할 때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는 것에 재능이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왜’ 살아야하는 지 몰랐을 때와 달리 그 이유를 알게 되자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되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였다.

지나고 보니 강제 수용소에서 저자가 한 경험은 “개인의 경험이 아닌 인류의 경험”이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단지 참혹한 기록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행복이 아니라 ‘의미’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는 고유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삶의 과제를 사회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아니면 자기 양심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 그러니 나 또한 정진하고자 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기에,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아남으려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는것뿐

강제 수용소에서 한 경험은 이제 개인의 경험이 아닌 인류의 경험이 됐다.

비로소 이것이 단지 참혹한 강제 수용소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어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이제 곧 끌려갈 친구의 목숨을 구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 그런 다음에는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낀다.

인간이 더는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서와 감정의 둔화를 의미하는 무감각

정말로 이상한 것은 흔적도 남지 않은 단 한 방의 구타가 어떤 상황에서는 그보다 심한 흔적을 남긴 구타보다 더 상처를 준다는 사실이다.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

그 순간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단지 맛있는 음식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가 되면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인간 이하의 상황이 마침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면세계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잘 알려진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오로지 죄수 번호를 가지고 있을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 있는 것이다.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해 주기를 원했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sub specie aeternitatis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상황도 견딜 수 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인생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약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 수용소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다 신경 질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통 역시 모두 다 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 잡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는 고유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삶의 과제를 사회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아니면 자기 양심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바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희생의 의미 같은―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할 수 있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 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쾌락은 어떤 행위의 부산물이자 파생물로 얻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얻어져야만 한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망가진다.

인간은 조건 지어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날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살아야 하고, 그런 날이 밝아 오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아남아야 합니다.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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