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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 생존자와 유가족이 증언하는 10·29 이태원 참사
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평점 :
그래. 나는 그날 이태원에 있었다.
삶은 대체로 평온하다. 가난한 삶이든, 부유한 삶이든 각자의 우여곡절이야 있겠지만 대체로 인간의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비슷하다. 마치 인생이란 물질이 어떤 항상성을 띈 것처럼 지진부진한 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니 모든 테러와 재해와 사고가 별다를 것 없는 날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예고장 없이 불현듯이 찾아오는 시련. 거센 소용돌이 같은 그것은 2022년 10월 29일, 아주 보통의 나에게도 찾아왔다. 내 품에서 한 청년이 죽었고, 내 눈 앞에서만 수십명이 죽었다.
할로윈의 이태원이 처음은 아니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이전에는 종종 이벤트를 좇아 찾던 곳이었다. 좁은 골목을 누비는 인파, 새벽까지 붐비는 술집, 아예 거리 밖으로 난 스피커에서 터질듯 울려대는 노랫소리.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한 해를 강타한 영화와 각종 TV쇼 속 주인공들을 따라한 사람 구경이었다. 혹자는 나이가 들수록 매해 있는 생일보다 4년에 한 번 뿐인 월드컵과 올림픽이 더 재밌어진댔으나, 서커스단 같은 무리 속에 섞이는 일은 매년 겪어도 낯섦과 설렘이 공존했다.
작년에는 갓 서울에 상경하여 나와 한 집에서 살게 된 C와 함께 이태원을 가기로 했었다. C는 축제라면 가리지 않고 찾을 정도로 활발한 편이어서, 할로윈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기에 ‘할로윈 하면 이태원이지!’ 그런 속설을 들먹이며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나에게는 하염없이 익숙한 곳이, 초행인 친구에게는 낯설고 새로운 곳이 되리란 생각에 신이 났다. 언니만 믿고 따라와.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다이소에 들러 메이크업에 필요한 것들을 급하게 사고 무려 2시간동안 화장을 했다. 공들인 시간을 따지면 분장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하겠다. 우리는 마치 삐에로처럼 눈 위아래로 구슬 모양을 그렸고, 검은 잉크로 물들인 깃털을 붙이기도 했다. 허리 벨트에는 인형들을 주렁주렁 달고는 그것도 모자라 머리띠까지 썼다. 그맘때쯤 집 한켠에 세워둔 행거가 걸린 옷들의 무게를 못 견딘 나머지 쓰러져있었고, 깃털을 염색하느라 화장실 세면대가 지저분해졌지만 아랑곳않았다. 그것들은 아주 부차적인 것으로 신경조차 안 쓰였다. 우리에겐 끝내줄 게 분명한 할로윈의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기다린 파티. 사람들과의 만남. 신나는 밤이 될 것이 확실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행운이 크게 다가온 하루였다. 손님 발길이 드문 찰나를 틈타 맛있는 피자를 먹었고, 신논현에서부터 사람을 가득 실어나르는 버스에서는 운 좋게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었다. 이태원퀴논길과 세계음식거리를 지나칠 적에는 사람이 많은 게 싫어서 이태원어린이놀이터공원에 들러 우리끼리 한참을 깔깔대며 놀았다. 관광객이나 외지인들은 몰랐겠지만, 그날 이태원은 그렇게 한 골목만 비껴나도 고요했다.
아무래도 주민들이 사는 동네라 한적한 길거리를 유유히 부유하며 한창 유행하던 틱톡 챌린지를 따라 찍고 나니 배가 좀 고팠다. 아마 10시를 넘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단골이던 타코집은 영업시간이 마감되어서, 발걸음을 돌린 우리는 타파스바란 식당을 가기로 했다. 아니나다를까 그 앞 거리는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에도 이태원에 왔던 나는 C에게 그때보다는 사람이 적다고 말했다. 사람간 간격도 널널하고, 걷는데 불편하지 않네. 이런 식으로 친구를 안심시켰다.
막상 타파스바에 도착하고 보니 바로 식사를 할 수는 없었고 웨이팅을 해야 했다. 시간이 시간이다보니 다른 곳을 갈 여력은 없어 가게 앞에서부터 골목이 꺾이는 곳까지 선 줄을 따라 서서 사람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우리 앞에 대기하고 있던 커플은 깜찍한 교복을 짝맞추어 입고 분장 퀄리티도 대단해서 여러명이 지나가며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우리도 열심히 분장했는데 왜 아무도 같이 사진 찍자고 안 물어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길 안쪽에서 어떤 남자가 당황한 듯 뛰어왔다. 의식이 없는 여자를 업은 채였다.
처음에는 술 취한 사람을 부축해 온 줄 알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헤롱대는 사람일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실려나오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갈 때도, 뛰어오는 사람들의 코스튬이 경찰복과 소방관 유니폼인 경우가 더러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퍼레이드 같은 행사인걸까 싶었다. 걱정되긴 하지만 별 일 아닐거라고. 금방 해결될거라고 믿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사이로 웅성거림이 커졌다. 처음에는 화재가 났다고 했다. 저 앞 어떤 지하 클럽에서 불이 났다며 누가 손으로 가리켰다.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검은 연기는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 실려 나오는 사람들 모두 맨발인 상태여서 여기에 실내 클럽이 있었던가 기억을 되짚으며 더 의문에 빠졌다. 그때 누가 소리쳤다.
“안쪽에 더 많으니까 남자분들 가서 도와주세요!”
망설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말을 듣자마자 뛰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속이 탔다. 나도 뭔가를 하고 싶었다. 남자가 아니어서, 고작 여자란 이유 하나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어야한다는 사실이 짜증났다. 무엇보다 답답했던 건 아무도 정확한 정보를 모르는데 소문만 무성해진 상황이었다. 바로 휴대폰을 꺼내 네이버에 들어가 기사를 검색했다. 최신순으로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트위터를 켜서 이태원을 검색했다. 올라온 소식은 10개가 채 안됐다. 마약이 퍼졌단다. 3명이 죽었다고. 대한민국에 마약 파문이 인 지 얼마나 됐다고 이 즐거워야 하는 날 마약을 퍼트렸을까 안타까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어떤 마약이길래 한 날 한 시에 쓰러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거지?
“대로에 자리가 없으니 여기 눕히고 CPR 해야할 것 같아요.”
그 소리를 기점으로 사람들이 차곡차곡 자리잡혔다. 왼쪽부터 시작해서 오른쪽 끝이 보이지 않는 골목까지 헐벗겨지거나 헝클어진 사람들이 눕혀졌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CPR 할 수 있으신 분들은 나와서 도와달라고 했다. 불과 몇 달 전에 라이프가드 자격증을 땄기 때문에 나를 향해 외치는 말 같았다. 내가 해야 할 것 같았다.
“나 나갈까?”
사정을 알고 있는 C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고 생각했는데, 추후에 C와 얘기하다 보니 이미 나는 소지품과 머리띠를 모두 친구에게 맡기며 길 한가운데로 뛰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맡은 분은 체구가 작은 여성이었다. 현장이 급박하다보니 흰 블라우스를 잡아 뜯듯이 벗겨내고 몸을 옥죌만한 옷들은 다 풀었다. 허벅지며 몸 곳곳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압사의 자국이란 걸 나중에 뉴스를 보고 알았다. 나와 같이 부푼 마음을 안고 예쁘게 차려입고 왔을텐데 한 명은 바닥에 누워서 숨도 못 쉬고 있고, 한 명은 심폐소생술 하고 있고…… 그 형편이 기묘했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 상황을 해결해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CPR은 세명이서 교대로 돌아가며 했다. 뭇 남성들이라면 군대에서 CPR을 의무적으로 배우기 때문에, 구조 활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성이었다. 여자들은 피해자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혈액 순환을 도왔다.
물론 당시에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았다. 심폐소생술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거나, 자세가 엉망이라던가, 의사 행세를 하며 도움 안되는 말을 거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도무지 상황이 나아지질 않았다. 드라마나 영화처럼은 아니더라도 나는 다들 살 줄 알았다. 초반에는 사람들이 기절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들 금방 기침을 토해내고 숨을 쉴 줄 알았다.
여기서 밝혀두자면 그곳에는 참사를 막을 방파제나 댐이 없었다. 어떤 절차나 프로세스가 없었고, 눈에 닥치는 대로 조치를 취하기에 급급했다. 근데 그 얄팍한 조치조차 공권력을 가진 어느 기관이나 정치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컨대 내가 아는 CPR의 단계는 거기 검은색 모자 쓰신 분 119 불러주세요. 파란색 옷 입으신 분 제세동기 가져다주세요. 구령을 붙이며 CPR과 인공호흡을 하기. 딱 그거였는데,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119에는 누가 신고했겠거니 싶어 생략했고, 이미 신고가 들어갔을테니 제세동기는 응급구조사가 가져다줄 거라고 믿었다. 아니면 이미 누가 쓰고 있어서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거라고. 그리고 인공호흡은……. 못했다. CPR을 몇 분 하자 희생자분의 입 밖으로 피가 역류했기 때문이었다. 온 몸이 찬데 흐르는 피만이 유일하게 뜨거웠다. 인근 식당 등지에서 전달 받은 냅킨으로 닦긴 했지만, 닦아도 닦아도 피가 나왔다.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면 입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피를 게워내야 했는데 무서워서 못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자원해서 나오긴 했지만, 내 손에 피를 묻히는 게 겁이 났다. 그런 위인은 못 됐다. 내 그릇이 그랬다.
때마침 응급구조사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성분이 오셨다.
“저기요, 이 분 상태가 심각해요. 좀 봐주세요. 제세동기는 언제 오나요?”
다급하게 붙잡고 물었더니 한참을 내려다보다 일단 CPR을 계속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또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우린 그 말만 듣고 다시 CPR을 번갈아가며 계속 했다. 얼마 동안 했는지도 모르겠다.
“저희 한 30분은 했죠?”
“네……”
완전히 지쳤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서로 침묵 속에서 CPR만, 하란대로 그 빌어먹을 CPR만 했다. 다들 알았을 것이다. 이미 돌아오지 않는 호흡과 뛰지 않는 맥박을 미루어보아 이 사람이 진짜 죽었다는 사실을. 늦었단 걸 아는데, 이건 다 소용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다들 모른 척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두면 이 사람이 진짜 잘못될까봐, 아직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더이상 CPR을 할 수 힘이 남아있지 않아 미안하지만 다른분께 계속 해달라고 부탁드리고는 일어섰다. 그제야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현장은 정말 아비규환, 아수라장, 혼돈, 그 자체였다. 구조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통제 속에서 식당이나 가게 등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시체들과 구조자들만으로 거리를 꽉 채운 광경은 경악스러웠고, 몸을 돌렸을 때 경찰 한 분이 머리에 손을 짚고 있는 걸 보았다. 아마 그 분도 처음 보는 상황이었을 것이었다. 어찌하면 좋을 지 몰라 우두커니 서서 황망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아,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느꼈다.
그 길로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 전까진 울어야 하는 상황인지도 몰랐는데, 곳곳에서 훌쩍이는 사람들을 보고 절망이 물밀듯 밀려왔다. 체제의 마비와 공권력에 대한 원망보다도 인간의 무력함과 한순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내가 왜 울지? 싶으면서도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모르는게 너무 많았다. 내가 더 뭘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저 식어버린 손을 주무르며 어떻게 여기서 죽어, 너는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따위의 말들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아직 못해본 게 많을텐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불러도 없는 대답에 성호를 긋고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올리려다 그러면 이 사람이 정말로 죽은 게 될까봐 그러지도 못했다. 대신 나중에 신원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나뒹굴던 소지품을 곁에 꼭 붙여주었다.
내가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울고 있자 타파스바의 유리창 너머로 상황을 지켜보던 C가 황급히 나와 너 안되겠다고, 집에 가야겠다고 강경하게 팔을 붙잡았다. 조금 뿌리쳤던 것 같기도 하다. 안쪽에 사람이 더 있다는데, 남아서 할 수 있는 걸 더 해야 하는데. 이미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나는 C가 이끄는대로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로 향했다.
대로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져있었다. 내가 황당했던 점은 앞에 분명 자리가 없어서 골목에 사람들을 눕혔다고 했는데, 큰 길에는 사람이 몇명 없었던 점이다. 해봤자 10명쯤 되는 사람들만이 눕혀진 채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거나 구급대원들에게 전문적인 CPR을 받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폴리스라인을 넘어 소방대원에게 뚜벅뚜벅 걸었다.
“저기 안쪽에 사람들이 더 있어요. 안에 진짜 심각한 사람이 있어요.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 안에도 사람이 있어요?”
소방관들은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더니 안쪽에도 사람이 있다며 그제야 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 곁에 남아 좀 더 도울지 고민하다 C도 있고 하여 집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다시 폴리스라인 밖으로 나갔다.
온 골목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태원을 빠져나가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아마 삼각지까지 걸어갔던 것 같은데, 간간히 응급차들이 웽 하는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갔다. 이미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 싶어 또 울었다. 상황을 따지지 않고 팔 걷고 돕는 시민들의 합심이나 미담이 이 세상을 밝게 만들기엔 이 얼마나 허망하고 어이없는 죽음인가. 정말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아무도 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참사가 발생한 지점을 좀 벗어나니 그제야 이태원에 도착한 사람들이 웃고 노래 부르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엉망이 된 얼굴로 비척비척 걸어가는 나를 보고 흠칫하거나, 상황 파악을 못하고 추파를 던졌다. 평소라면 눈치도 없다며 미웠을 그 사람들은 모두 다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다들 무사했으면 좋았을걸.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를 부르며 버스킹하는 사람도 있었다. 딱히 구슬프지도 잘 불렀던 것 같지도 않은데 아직 상황이 전파되지 않은 딴 세상에서 흐르는 그 노래가 심장에 퍽퍽 박혔다. 만일 그대 내 곁을 떠난다면 끝까지 따르리, 저 끝까지 따르리, 내사랑 그대 내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이 가사가 꼭 세상을 떠난 희생자분을 배웅하는 노래 같았다. 나는 그게 감당할 수 없을만큼 슬펐다.
잠실까지 가는 대로가 통제되어 있다는 C의 말을 듣고, 우린 안암에 있는 C의 동생네 집까지 가는 택시를 탔다. 사실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버스도 탔던 것 같은데, 그 안에서 뒤늦게 도착한 재난 문자와 사망자 수가 몇십명으로 집계된 기사를 보았다. 그렇구나. 다들 죽었구나. 다들 거기서 그렇게 생을 마감했는데 나는 도망쳐나왔구나. 죄책감에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윤석열이 방금 어떤 반응을 했단 기사도 보았다. 모든 게 다 의미가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수습한다고, 그런 가시 박힌 생각들이 자꾸 샘솟았다.
안암에 도착하니 그날 아마 연고전이 있었던 모양인지, 승리의 기쁨과 취기에 왁자지껄 떠드는 학생 무리들을 몇 번 맞닦뜨렸다. 나는 걔네라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한창 즐거워할 나이의 너네가 살아있어서 정말 감사하다고. 너네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C의 동생은 따뜻한 차를 대접했다. 그것도 미안해서 울었다. 나 스스로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을 자격도, 잠을 청할 자격도 없다고 여겼다. 겨우 얼굴과 손발만 닦고 자리에 누워 휴대폰을 확인했다. 사망자 수는 100명을 훌쩍 넘어 있었고, 이태원에 간 걸 아는 사람들로부터 카톡이 와 있었다. 괜찮아? 너 어디야? 응 나 괜찮아. 잘 돌아왔어. 동이 트기 전에 C의 어머니로부터도 전화가 왔다. C와 C의 동생이랑 연락이 안 된다고. 온 가족이 (뒤에서 할머님까지 웅얼거리는 소리가 넘어왔다) 걱정하고 있다고. 자고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어요. 그렇게 모두를 안심시키고 몇 분쯤 눈을 붙였다. 아침에 전화가 온 엄마에게도 나 괜찮다고 말했다.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에서 저자 김초롱이 말했듯, 나 또한 “뉴스에서 다루는 참사 사상자와 내가 전혀 상관이 없는 듯 의식적으로 덮으려 했다(77면)”. 이더러 몇몇의 친구들은 너네라도 살아 돌아와 정말 다행이고 행운이라고 했다. 나를 위해주고 가장 생각해주는 이들의 안도란 걸 마음속으로는 알았지만, 그게 몹시도 싫고 경멸스러웠다. 그럼 거기서 죽은 사람들은 단지 운이 없어서 죽은거냐고 따져묻고 싶었다. 마음속에 가시가 점점 돋아났다.
더 이상 서울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음날엔 선약이 있던 친구와 간신히 얼굴을 보고는, 곧바로 대구로 내려갔다. 눈만 뜨고 있으면 눈물이 나니, 회사에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매진인 기차표를 겨우 구해서 짐도 챙기지 않고 기차를 탔다. 내려가는 내내 마스크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동대구역에 내리자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인데 갑자기 내려온 나를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간신히 참던 눈물이 또다시 터졌다. 엉엉거리며 안겼다. 엄마 사실 나 이태원에 있었어. 내 눈 앞에서 사람이 죽었어. 내가 어떻게든 하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숨을 안 쉬어. 피가 났는데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했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대구에 있는 일주일 동안은 눈만 뜨고 있으면 울었고, 그래서 회피성으로 잠을 17시간정도 잤다. 두근거림, 두통, 호흡곤란, 불안감, 죄책감, 우울감, 이 밖에 기타 등등의 증상을 몇 달간 앓았다. 회사에 복귀하긴 했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만무했다. 손이 너무 떨려서 글씨조차 쓰지 못했고, 집중도가 떨어지니 똑같은 이메일을 수십번 읽어야했다. 휴직을 하기 위해 진단서를 타러 병원에 여러번 내원할 때에 상사는 ‘네가 이태원 때문에 힘든 것도 있겠지만, 일을 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것’이라며 가스라이팅했다. 심리적으로 약해진 나는 진짜 그런가? 사실 퇴사하고 싶은데 이태원 일을 계기로 이러고 있나? 스스로 검열했다. 위에서 언급한 책에서 김초롱이 말했듯, 나는 몸도 다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고 멀쩡히 숨 쉬고 살아 있으며 다만 그냥 거기에 있었을 뿐(43면)이었으니까. “가족과 사별했거나 친구를 잃은 것처럼 ‘가까운 누군가를 잃은 경험’이라면 충분히 이해할만 하나, 알지도 못하고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잃고 힘들어(70면)”하는 상실감은 남들이 볼 때 납득할만한 이유는 못 된다고 여겼다.
상담을 받으며 여러 차례 테라피를 시도했지만 오히려 같이 이태원에 갔고, 같이 사는 C와 상태를 비교하며 상태가 악화되었다. 새로 배우던 운동도 제대로 못해내자 자존감이 수없이 깎였다. 아무것도 잘 하는 게 없었다. PTSD가 세게 오자 자살충동이 심해졌다. 사실 나도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고,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죄를 씻기 위한 결론은 죽음이었다.
상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휴직계를 내고 대구에서 요양을 했다. 첫 3달은 집에만 있었고, 그다음 3달은 운동을 했다. 그 다음 3달은 새로운 악기를 배우며 시 쓰는 법을 배웠다. 몇 차례 회사로 복귀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의사 선생님이 말렸다. 아직 섣부른 것 같다고. 약물 치료를 하고 좋아하던 여행도 가보며 그 사이 많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진심을 꾹꾹 눌러담아 쓴 편지를 몇 차례 펼쳐볼때마다 감동에 찬 눈물을 훔쳤다. 조심스러워하느라 마주보고 말을 건네지는 못해도, 마음이 느껴지는 문장들에 가슴이 아려왔다. 이들을 두고 어떻게 가겠는가. 과분한 사랑에 살아야겠다고,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시 10월이 돌아오자 나도 뭔가를 해야할 것 같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이제 숨지 않고 나서야겠다고. 당시에 못했던 일들을 지금이라도 해야겠다고. 그래서 용기를 냈다.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북토크에 가 유가족분들과 얘기를 나누었고, 인권 센터 선생님과 만나 기록과 운동에 힘을 보탰다. 1주기 추모집회도 가서 자리를 지키며 포스트잇에 이렇게 썼다.
정말 미안합니다. 제대로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이때까지 모르는 척 해왔어요. 제 몸 하나 가누느라 바쁘단 핑계를 댔습니다. 이기적으로 보이겠지만, 저도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합니다. 일상을 보내고, 웃어도 보고 이제 그럴려구요. 이제 마주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늘나라에서 편안할 수 있도록, 가족분들과 같이 싸우겠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욕심이라면 이마저도 미안합니다. 그러니 저를 잘 살펴봐주세요.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을 돕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지 감시해주세요. 저 정말 잘 살아가겠습니다.
기세를 타 같이 독서모임 하는 친구들에게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를 선물하며 같이 얘기 나누는 자리도 마련했다. 파라마운트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Crush>를 수급하여 당시의 영상도 함께 보는데, 더이상 죽고싶을만큼 괴롭지 않았다. 이제 그 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많이 괜찮아졌다. 그 날 함께 구조 활동을 했던 사람들, 목격자들, 생존자들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1년동안 많이 힘들었을 테지만 꿋꿋이 살아냈길 진심으로 바랄 수 있게 되었다.
2022년 10월 29일의 이태원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거리에 각자의 사연을 남겨두었다. 아직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한 이야기들은 몇 개나 있을까. 내가 전하는 이야기 말고도 다각적인 조각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에서는 “국가 부재 상황에서 서로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쓴 이들이 적지 않건만 그날을 증언하는 이들은 너무 적다(6면)”고 일컫는다. “혹여 자신들의 말이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 말을 고르다 채 토해내지 못하고 일어선다(9면)”는 것이다.
기타노 타케시는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라고 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합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을 힘이 된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으면, 우리가 똑바로 다시 이태원을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이태원 참사에 관한 소식은 하기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1029ac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