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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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할머니는 내 동생이 막 들어간 초등학교에서 입학식을 치르던 중 돌아가셨다. 나 또한 새로운 반에서의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느끼고 있던 차에 비보를 전해 받았다. 무려 새 학기 첫날인데, 얼른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찾아오더니 제대로 얼굴 도장도 찍지 못하고 장례식장에 가야하다니.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보다 그게 더 슬펐던 어린 날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심윤경 작가가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서 “내 기억 속에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6면)”라고 말한 것처럼 뜨문뜨문하다. 세상 할머니들은 모두 “마치 공기에서 따뜻한 손이 솟아나 나를 달래고 어루만진 것처럼 (중략) 등 뒤의 익숙한 촉감과 목소리로만 존재(같은 면)”하는 걸까?

작가는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노르스름한 햇살이 드는 방, 공기 속을 떠다니는 먼지들, 콩기름을 먹인 장판, 그런 것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추억이란 건 아무래도 장소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마련이지 않을까 하는 게 지론이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라 해도 나의 관점으로, 나의 시선으로 저장된 것들이다. 내가 바라본 풍경, 내가 걸었던 골목, 내가 어루만졌던 할머니. 그 기억들은 아주 소중하고 쉽게 잊어버리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것들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나는 이 독후감을 통해 “오래된 감각들을 되살리는 일에 좀 더 집착해보기로 했다(49면)”.

나의 친할머니는 대구에서 차로 30분정도 떨어진 하양에 사셨는데,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 가기 위해선 시골의 드넓은 논 사이 비포장도로를 지나야했다. 포도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지나칠 땐 엄마가 저건 어떤 밭이라고 설명해주었고,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나는 너무 신기했다. 종종 할머니가 키우던 텃밭에 가기도 했는데, 고추와 토마토를 따고, 감자를 캐거나 아궁이 불에 군고구마를 구워먹었던 일은 지금은 해 볼 수 없기에 아주 값진 경험이 되었다.

할머니는 아빠와 고모들이 마련하신 오래된 아파트에 주로 머무시며, 조금 떨어진 고택은 별장처럼 이용하셨다. 그 부근에 당신의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종종 나를 데리고 화투를 치러 가셨다. 할머니는 혼자 놀기 민망했는지 화투 룰을 모르던 나에게 그림 맞추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아직 어려 한 눈에 잘 외우지 못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으셨다. 작가는 이를 두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성벽처럼 강하고 높은 존재여야 하지만, 이럴 때는 아이가 가볍게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낮은 발판 정도로 슬그머니 몸을 낮추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113면)”고 일컬었고, 이 문장은 성인이 되어보니 그맘때의 할머니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한편으로 나는 그 낡은 한옥의 푸세식 화장실과 다 무너질 것 같은 인테리어가 싫었다. 아주 전형적인 도시 아이처럼 유난히도 깔끔을 떨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미 나를 당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셨던 분이었다. 시장에 가서 그맘때 유행하던 순정만화책을 한 권씩 사주셨던 것이다. 교육 방면으로 신경을 많이 쓰던 엄마가 절대 만화책은 못 읽게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할머니와 있을 때가 기회였다. 또, 할머니는 본인 특유의 레시피로 무장한 참기름간장계란밥과 비엔나소시지를 내밀기도 했는데, 그건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반칙이었다. 분명 집에서도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도, 혼자 해보려고 하면 영 그 맛이 안 났다. 할머니 집에 가게 되면 그것들을 먹을 생각에 군침부터 돌았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런 것들 덕에 나는 할머니와 손을 잡고 아파트와 고택 사이를 오갈 수 있었고, 아직까지 그 기억들을 반추하고 있다.

할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들은 대게 병상 위에서 아픈 미소를 짓던 모습이다. 병인은 단순히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 미끄러지신 것이었는데, 나이와 세월은 그 상처를 더욱 쑤셨고 할머니는 쉽게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게 참 억울했다. 내 생애 첫 장례식은 그렇게 치러졌다. 고모가 울며 감정을 추스르는 와중에 “엄마는 이제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어.”라고 말하던 것이 아직까지 사무치게 남아있다.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속 할머니는 “나처럼 억울한 인생이 또 있을까(71면)”하고 중얼거린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할머니들의 삶은 고통과 시련과 미련으로 점칠 되어 있다. 그 시대가 그렇다. 작가는 결혼과 육아 “이전에 살던 세계는 학교, 직장, 문화, 친구, 성취와 우정의 세계(34면)”이었다면, “아이와 함께하는 세계는 쉬, 똥, 침, 코, 토, 잠, 젖”이라 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당신의 아이들을 키우던 세계는 억울함, 절약적, 희생양 같은 한글자도, 두 글자도 아닌 무려 무게가 추가된 세 글자로 이루어진다. 애, 엄마, 할머니의 글자 수 구도가 똑같은 점도 신기하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예전의 기억들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릴 할머니가 있다는 건 나의 큰 행운이며, 아직 살아계시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더욱 끔찍이 모셔야하는 이유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말해보고 싶다. 할머니, 사랑했고 아직까지도 사랑합니다.




이전에 살던 세계는 학교, 직장, 문화, 친구, 성취와 우정의 세계였다. 모두 두 글자 이상이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세계는 쉬, 똥, 침, 코, 토, 잠, 젖, 신기하도록 모두 한 글자였다. - P34

울고불고 자지러지는 단계에서 분명히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감정이 선행되었을 텐데, 그 부분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휘발되어 놀랍도록 깨끗이 사라지고 할머니와 단둘이 있는 것에 흐뭇하고 만족했던 기억만이 안정적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나의 옛 기억이 그토록 불균형함에 신기함을 느끼며 오래된 감각들을 되살리는 일에 좀 더 집착해보기로 했다. - P49

내 기억 속에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 마치 공기에서 따뜻한 손이 솟아나 나를 달래고 어루만진 것처럼 할머니는 등 뒤의 익숙한 촉감과 목소리로만 존재했다. - P6

"나처럼 억울한 인생이 또 있을까." 할머니는 그런 고생은 다시 떠올리기조차 고통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 속은 아무도 몰러." 그게 내가 할머니에게 들을 수 있었던 전부였다. - P71

타인에 의해 내가 잘못한 부분이나 고쳐야 할 지점들을 마주할 때 내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드는 것은 예술에 가까운 섬세한 솜씨가 필요한 일이었다. - P85

이 아이가 부모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분노, 내가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하고 있다는 좌절감, 일어난 피해를 수습해야 하는 고단함,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화산처럼 돌과 불을 뿜어내고 싶어졌다. - P108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성벽처럼 강하고 높은 존재여야 하지만, 이럴 때는 아이가 가볍게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낮은 발판 정도로 슬그머니 몸을 낮추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 P113

첫째도 허술하고 둘째도 허술할 것.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부모가 되기에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라기 때문에. - P143

아이들에게는 무턱대고 믿어주고 기특하게 여겨주는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전에는 그런 존재들이 함께 살았는데 이제는 함께 살지 않는다. - P162

세상에는 나같이 범속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높은 경지의 사랑을 실천하시는 부모님들이 계시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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