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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십육일 -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 에세이
4·16재단 엮음, 임진아 그림 / 사계절 / 2024년 4월
평점 :
비운의 97년생. 누가 나를 소개해보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이렇게 말할 것이다. 2024년을 맞아 27살이 된 저는 비운의 97년생입니다, 라고.
수학여행을 떠올려보자면 나에겐 기억이 없다. 그도 그럴게 초등학생 때는 신종플루 때문에 졸업여행이 취소되었고, 중학교 땐 팔공산에 야영을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무슨 멧돼지가 나오는 바람에 못 갔고, 고등학교때는 세월호 참사가, 대학교 후반부에 터진 팬데믹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까지. 이 모두 97년생인 내가 겪었던 일이라면, 비운의 97년생이 아니고 달리 뭐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그래. 2014년 4월 16일을 모두가 뚜렷하게 기억할 것이다. 4·16 재단에서 매월 16일 연재한 『월간 십육일』에 참여한 저자들도 그날 각자 다른 위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던 사람,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던 사람, 길을 걷던 사람. 모두가 일상을 살아내고 있던 사람들일 뿐이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그때 교실 한 쪽 편에 앉아 졸업여행을 어디로 가면 좋을지 학급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가는 수련회는 아니었지만, 기념으로 삼을 만한 이벤트는 처음 맞아보는 셈이었다. 제주도가 좋을까? 해외에 갈 수 있을까? 부푼 기대가 여러 입을 통해 표출되고 있을 때 소식을 접했다. 배가 가라앉고 있다고. 거기에 우리와 꼭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타고 있다고 했다. 수업 하나가 끝났을 때는 전원 구조였고, 다른 수업이 끝났을 땐 오보였고, 또 다른 수업이 끝났을 땐 참담한 소식이 전해졌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는데 습관처럼 틀어놓은 TV 뉴스에서는 연신 세월호 관련 속보가 이어졌다. 그때 나는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했더라? 울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울 줄을 몰랐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나는 그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며, 어떻게 해야하는 지 전혀 알지 못했다.
후에 옆 학교에서 마침 타려던 배가 세월호였지만 모종의 사유로 일정이 미뤄졌었단 얘기를 들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와전된 것이든 간에 그제서야 좀 실감이 났다. 아,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구나. 그게 우리였을 수도 있었겠구나. 바다 밑에 잠긴 아이들이 단원고 학생들이 아니라 우리였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서웠다. 결국 졸업여행이 취소되었을 때 실망한 기색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당연한 슬픔과 애도의 물결이 온 국가를 뒤덮었고, 우리 또한 불쌍한 아이들이 되었다. 이슬아가 ‘딱 이맘때 아이들이었겠구나(34면)’라고 느낀 것처럼, 어른들은 나를 긍휼히 여겼다.
그런 내가 이제야 너무 슬프다고 고백하자니 미안해서 미칠 것 같다. 피해자 대부분이 내 또래였기 때문에, 그들은 살아보지 못한 10년이란 세월을 내가 대신 걸어왔기 때문에 나는 지독히도 슬프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들 하는 것처럼, 이태원 참사를 직접 겪은 나에게 세월호 10주기는 너무나 참담하게 다가왔다. 10년이 지나서야 더 깊은 눈물을 흘리고 공감하는 것이 희생자들에게, 유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까먹어서, 구태여 드러내야할까 싶어서 SNS에다 세월호 관련 언급을 건너뛰었던 날들이 떠올랐다. 제대로 슬퍼할 줄도 모르는 아이였던 내가 강산이 바뀌는 세월이 지나서야 지독한 슬픔에 잠겨버릴 줄 아는 성인이 되었다. 그게 자그마치 3,600여일이 지난 시점이라니. 죄스럽고 속상했다. 이 죄책감을 어떻게 하면 떨쳐낼 수 있을까 싶어 어제는 『월간 십육일』 북토크에, 오늘은 안산에 다녀왔다.
안산에는 난생 처음 가보았다. 겨우 마음을 먹고 방문할 곳을 이곳저곳 저장해놓고 갔는데, 추모식과 안산 문화예술의 전당 3, 4 전시실에서 열린 세월호참사 10주기 기억물품 특별전 <회억정원>을 보고 나니 진이 빠져서 도망치듯 서울로 돌아왔다. 작은 물건들에 담긴 이야기들에도 눈물 콧물 쏙 빼는 게 힘들었다. 이걸로도 모자라 10주기를 맞아 개봉한 영화 <바람의 세월>까지 훌쩍이며 봤으니 그날 바다에 묻힌 이야기들을 꺼내어 보는 게 나에게,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경험일까 싶은 의심마저 들었다.
김신지는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기억을 열어볼 수 있단 가정을 두고 느낄 점들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모르던 사실이 너무 많아서, 어쩌면 그제야 이 사람을 알아가는 기분이 들거야. 이런 걸 기억했구나. 이런 순간을 좋아했구나. 이 사람, 마음이 오래도록 여기에 머물렀구나. 그러다 끝내는 어째서 이 깊고 넓은 존재가 사라졌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다시 울게 되겠지.(139면)’
그 사람의 기억은 너무나 그 사람만의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하기 전에, 이건 모두가 보유하게 된 기억임을 살펴야 한다. 우리들이 잊지 말고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기억이다. 기억은 힘이 세다. 방문한 전시의 총괄감독인 서영걸의 말을 빌리자면 ‘기억물품이라 칭해지는 세월호참사 희생자들의 유류품이 가져오는 기억은 개인적인 범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이라면, 책임의 주체가 국가라고 한다면 사회적 기억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기억은 현재의 시간과 연결되고,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중첩된다.
예컨대 이태원 참사가 있은 이후, 강원도에 여행을 갔을 때 강릉에 산불이 크게 났다. 강풍주의보가 내려질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서 불이 막 여기저기 옮겨 붙었다. 그때의 나는 인명 피해가 없길 기도하는 것보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재해를 몰고 다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최현수가 잇따른 참사를 두고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 같다고,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다(217면)’고 말한 것처럼, 살아있어도 사는 게 아니었다. 모든 사건·사고를 내가 직접 겪고 일으킨 것처럼 아팠다. 이걸 친한 친구에게 말했더니 너는 재해를 불러오는 사람인 게 아니라 재해에서 살아남은 인간이랬다.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곳에서 연대와 실천은 기억에 기반한다. 나는 그걸 유념하기로 했다.
그래. 우리는 살아남았다. 이 모든 일에도 살아남아서 애통해하고, 분노하고, 명복을 빌어주고, 서로를 위로하며 위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지금에서야 또다시 슬픈 한편, 슬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운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추모의 이유를 드러낼 수 있으니 현명하고 똑똑한 것이다. 그러니 살자. 살아남은만큼 살아서, 비통에 찬 울분을 터트리고, 낙루하고, 애쓰자. 그 결과가 어찌됐건 내 자리에서 슬퍼하는 것. 그것에서부터 모든 변화가 시작된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 추모 프로그램은 아래에서 자세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416act.net/29/?idx=19228349&bmode=view
내 마음 아플까 봐 못 보겠다, 이 말이 얼마나…. 그것을 감당하고 맞서서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는 진짜 얼마나…, 작고 좁은 마음인지 알겠더라고요. - P29
이 정도 자랐고 키와 머리와 체구…. 딱 이맘때 아이들이었겠구나. 처음 실감하게 되었죠. 조금 다른 의미로 미치겠더라고요. 이름을 읽었을 때보다, 딱 그맘때 애들이 생생하게 움직이는 것을 가까이서 봤으니까요. - P34
창문 하나 내지 않은 지하 공간은 사람들의 눈물과 회환, 피로로 공기의 밀도가 한계치에 다다른 듯했다. - P81
그런 생각을 해봤어.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을 떄, 그의 기억을 열어볼 수 있다면 어떨까. 더 가까울 수 없을 만큼 가까웠던 사이여도, 그 사람의 기억은 너무나 그 사람만의 것이어서 나는 슬프고도 당혹스럽겠지. 모르던 사실이 너무 많아서, 어쩌면 그제야 이 사람을 알아가는 기분이 들거야. 이런 걸 기억했구나. 이런 순간을 좋아했구나. 이 사람, 마음이 오래도록 여기에 머물렀구나. 그러다 끝내는 어째서 이 깊고 넓은 존재가 사라졌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다시 울게 되겠지. - P139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 같다고,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 P217
304명의 죽음은 304가지 사랑의 소멸이라는 것. 304개의 전구가 꺼진 만큼 세상은 어두워졌겠고 304개의 사랑 이야기가 중단된 만큼 인간 정신은 쪼그라들었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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