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이사하기로 하고, 학교도 옮기기로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그러고보니 지난 20년내내 실패의 연속이다.
매일매일의 실패는 물론이고, 커다란 외적 실패도 몇 차례.
하긴, 그렇다고 20년 전까지는 성공이었냐면 그건 더더욱 아니다.
결론은.... 아-  말을 말자.
열등감도 자격지심도 클대로 커졌지만, 그보다는
뒤늦게 내 유별난 결벽증을 이해했고....
이제야 한 걸음 제대로 내딛을 수 있을 것같다는 혼자만의 믿음에,
이젠 정말이지 아무도 안믿어줄, 작은 불씨같은 믿음에 나를 걸어보려고 한다.
때마침 기다리던 책이 왔다. 주성혜의 "음악학" (2008, 루덴스).


 






음악학자 주성혜의 세 번째 책이다.
처음 책은 "음악읽기 세상읽기" (1996, 중앙일보사), 두 번째는 "음악원 아이들의 한국문화 읽기" (2002, 예솔) 이었는데 두 권 모두 내게는 바이블같은 책이다. 두 번째 책은 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쓴 글 모음이지만 내겐 여전히 주성혜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같았다. 주성혜 선생님한테선 고등학교때 음악사를 배웠다. 그처럼 쉬운말로 그처럼 명료하게 역사를 설명하는 사람을 전에도 후에도 본 적이 없다. 그는 느낌만으로 아는 세계 석학들의 이론을 위험하게 엮서 자기 생각과 뒤섞어 책을 팔거나 그런 식으로 학생을 현혹하는 사람이 아니다. 분명하게 아는 만큼만, 아니 분명하게 아는 것같은 것도 다시 뒤집고 엎고 꼭꼭 씹어서 자기 언어로 말한다. 여하튼 위 세권은 명곡, 작품 자체가 아닌 음악활동의 주체인 사람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라면 한줄씩 밑줄그어 읽어도 좋다. 처음 책이 음악학(작품분석, 해설위주 학문)에서 음악 사회학으로 눈을 돌리자는 내용이라면,  두번째는 음악 사회학에서 음악 인류학, 공연학으로의 촛점 변화, 그리고 오늘 온 새책 (그래도 벌써 작년 10월판이지만)은 탈식민지주의가 그 핵심어다. 6년에 한 번씩 나온 책들 속에서 천천히 진행해가는 변화를 보는 것도 내겐 소중하다.

세권의 책이 나오는동안 나는 줄곧 미국에 있었다. 천천히 피아노를 다시 배웠고 사랑이란걸 이런저런 모습으로 해보고 배우느라 숱한 시간과 돈을 날렸다. 거만하고 촌스런 학풍의 지금 학교엔 연주, 이론, 음악사뿐이고 현대음악도 외면하고 있어서 따근한 음악사회학이나 인류학, 미학쪽으로는 들어볼 일이 없었다. 자주 주성혜 선생님을 기억했다. 80년대 민족·민중음악 운동이 활발할때 선생님은 거기에 빠지지 않았다. 민중이란 말만 들어도 피를 끓이던 젊은 이들과 달리 선생님은 특유의 합리성으로 가만히 지켜보고 계셨다.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뭔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마 데모대를 동경했던 내가 캠퍼스에서 벌어지는 획일적인 율동과 노래를 보고 얼굴이 흑빛이 되어 돌아나왔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 책은 민족주의+자본주의=현대식민지주의를 경고한다. 전통음악을 살려야한자고 다들 말한다. 무엇을 위해서? 우리가 북치고 장구치고 판소리를 생활화 하는 것이 옳고 그리고 가야하기 때문에? 바이올린 보다 가야금을 더 많이 들고다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것이 정말 옳은가? 순수한 민족주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상술과 거대한 서양학문의 요구로 만들어진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그리고 우리에게 진정 음악이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에 대해 이 책은 조목조목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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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30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31 0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움으로 다가가는지 그게 늘 궁금하다.
연습을 할 때마다 가상의 청중을 상상하는데, 서양음악을 처음 들어보는 아프리카의 어느 종족, 혹은 삶에 지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 여하튼 클라식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을 상상한다. 그들에겐 이 음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떤 부분이 아름답게 들릴까? 이상하게 들릴까? 이 곡에서 내가 무엇을 끄집어내면 그들의 귀에도 아름답고 고된 삶에 위로가 되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믿게 될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내게 필요한, 나를 위한 작업이다. 살기싫다.. 를 거의 입에 붙이고 다니니... 유명할 것도 없는 작은 연주회에 고해성사라도 한 것처럼 내 더러움을 내려놓고 온 적이 있다. 혼자만의 캄캄한 공간에 숨죽인 눈물을 쏟고 나와서 나는  연주를 믿게되었다. 사실... 무대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내겐 신성하기까지 하다. 작품의 완성도에 상관없이 무대만 보면 가슴이 아리니까.... 아마, 무대에선 혼신을 쏟아넣는 순간이 너무 선명하게 포착되기 때문일꺼다. 아.... 여하튼, 삶을 붙잡게하는 아름다움, 그것이 기이함이든 숭고함이든 합리성이든 용기든 충격이든 무엇이든.... 살기 위해선 감동이 필요하다. 감동한다는건, 아름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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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데미트 (Paul Hindemith, 1895-1963)는 20세기 작곡가로 드물게 음악가와 청중의 소통, 음악가의 사회적 책임등을 강조한 작곡가였다. 대부분의 현대음악가들이 자신의 음악을 청중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른바 '초월'하고 청중을 신경쓰는 것은 저급한 상술이라고 비난까지해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했던데 반해 힌데미트는, 작곡가도 청중도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고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이 연주회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렇기때문에 연주회라는 공간은 다소 불편하다. 자기 주장만 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이 불편함을 최대한 이용해서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이 옳다고 힌데미트는 믿었다. 내겐 이 말이 참 감동이고 설득력있다.

젊었을때 잠깐은 전위적인 곡을 써서 독일 아방가르드 선두에 있었으나, 드뷔시의 죽음 (1918)을 계기로 그의 음악적 입장이 바뀌었다. 한 음악가의 죽음, 그가 남긴 아름다움, 음악의 숭고함 등을 느끼고는 음악이 새로움을 보다는 고귀한 예술을 추구해야한다며 옛재료를 사용하는걸 꺼리지 않고 완성도 높고 깊이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애썼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큰 목적이었던 20세기 전반 조류에 그는 휩쓸리지 않았다.

독일인이였지만 오페라 화가 마티스의 반나치 색채 등을 이유로 나치의 미움을 받아 1940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쇤베르크는 1933년, 스트라빈스키는 1939년에 각각 미국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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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악학계는 미국파와 독일파가 나눠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써내는 책을 보면 따로따로니까. 윤이상 연구는 독일에서 공부한 학자들 결과물이 많고 요즘 관심을 끄는 인류학쪽은 미국유학파가 많은듯.
여하튼 내가 다니는 학교는 음악학이 한참 뒤쳐진 곳인데다 유럽파가 거의 없는 학교라 이 책 두권이 내겐 이곳 교수들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정보를 준다. 2권 시학은 주요작곡자별로 되어있어서 간편한데 1권 역사·미학은 연대순 설명과 미학흐름에 따른 설명을 따로 했는데 비슷한 책 두권을 한 권으로 붙여놓은 것같이 불편하다. 미학 부분에서는 차라리 학자별로 나누는게 낫지 않았을까. 하긴, 같은 저자의 독일미학자 네명 연구서가 있는걸 봤다. "아도르노, 크나이프, 달하우스, 다누저" 라는 제목. 또 1권은 "음악미학"이라는 1999년 책과도 내용이 겹친다.
독일에서 공부한 학자들 책을 읽고 미국 학교에서 사용할 때 불편한 점은 그 책들의 참고문헌이 독일어 원어이다보니 그걸 영역본으로 찾아읽어야 정확한 단어를 영어로 인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엔 아무리 인용문헌 페이지까지 알려줘도 소용이 없다. (게다가 간혹 오타인지 오보인지 잘못된 정보가 "음악미학"에 있었는데 가까스로 영어문헌 찾고 있던 내게는 아주 밉상이었다 (스트라빈스키 시학 7판 서문을 9판 서문이라고 해서 그거 찾느라....).
가장 아쉬운점은 역사, 미학, 시학 어느 곳에도 음악 인류학에 대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  사회학, 인류학쪽은 전통적으로 영국이 강한데 영국에서 공부한 음악학자의 책을 한국에서 본 적이 없다. 독일은 여전히 작품위주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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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클라식음악만 들었다.
이유는, 소리가 좋아서.
대중음악은 신날때도 있지만 주로 시끄럽고 천박하다는 것이다.
천박하다는건 가치판단이지만 시끄럽다는건 감각이니까 아무도 못말린다.
(천박하다는데는 동의할 수 없지만 전자악기 소리가 시끄럽다는데는 나도 동감이다.
전자 악기가 내는 소리가 음의 굴곡이 없는 평면적인 소리다보니 오래들으면 귀가 힘들어지는게 아닐까 싶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아도 클라식 음악 애호가들은 클라식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 흘리며 감동받는다.
난 때로 참 궁금하다. 그들의 귀에는 뭐가 들릴까? 전공자와는 다른 뭔가가?
예전에 어떤 사람은 바로크 이전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며 음반을 구할 수 없는건 미디파일로 듣는데 아쉽지만 괜찮다고…. 음량의 변화가 없는 하프시코드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라니 미디로 듣는게 크게 힘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에게는 음의 구성이 가장 감동거리인 모양이었다.

산스크리트 범패나 라틴어 성경을 듣고 그 언어를 몰라도 그 성스러움에 감동받는 것 이상의 뭔가… 나름 듣고 빠져드는 것이 각자 다를텐데…
바하부터 낭만파 음악까지만 듣는 사람들의 귀는 우선은…. 서정성을 듣는것일거다. 우는 듯은 떨림, 강물이 흐르는 듯한 선율에서 우수나 역사감같은것을, 구슬 구르듯 투명한 건반소리에서 영롱한 순수를 느낀다든가…. 바하의 화성과 선율은 낭만적이기 그지 없는 반면 대위법을 이용한 구성은 복잡 오묘하면서도 지극히 규칙적이어서 지저분하지 않으니 바하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데 가장 적절할 수도 있다. 그런식으로…. 아마도 몇몇가지 패턴과 상징을 연결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이상의 어떤 영감, 무의식의 교류나 감지가 있겠지만 그런 것은 알 수 없는 차원이므로 논외로 두고.

가끔은,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아방가르드 음악을 즐기지 않을까 무의식중에 기대했다가 역시 바하~낭만시대 음악만 듣는것을 보고 의아해한다. 그리고 금방 깨닫는다. 음악은, 순수음악은 사상이나 사회로부터 가장 격리된 영역이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영원 보편의 미가 있다고 믿는 이들의 성역이 아마도 음악일지 몰라….

그렇게보면 어쩌면 음악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장 미개발되어있는 영역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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