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아이야, 너희가 희망이야 - 프랑스 최고의 작가 10인이 말하는 어린이 권리 이야기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넬리 비슈 드 베르 그림, 조은미 옮김 / 푸른나무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11월20일은 유엔이 정한 ‘아동권리의 날’이다. 어린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릴 권리가 있다고 선포한 날이다. 이 책은 아동권리의 날을 기념해, 어린이의 권리 향상을 위해 활동을 하고 있는 유니세프(UNICEF)를 돕기 위해 프랑스의 작가 10명이 2005년 공동 작업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2007년 11월17일 출판됐다.

어린이의 인권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전쟁, 가난, 폭력, 그리고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유전자조작 식품 등에 의한 건강의 위협까지 전방위적으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올해 초 발표된 2008세계아동현황보고서는 어린이의 인권이 얼마나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2만6천명이 넘는 5세 미만의 어린이가 매일 죽어가고 있다. 여전히 1억4천3백만 명의 5세 미만 아동들이 영양실조를 겪고 있다.  가난 때문에 1억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학교를 가지 못하고, 2억3천만 명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한다. 대도시 거리를 떠돌며 살아가는 어린이의 수도 1억명이나 된다. 또 25만 명의 어린이들이 소년병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 수치는 인간성을 상실한 자본의 탐욕이 수많은 목숨들, 특히 어린이들의 목숨을 피로 물들이면서 만들어낸 비극적 지표이다.

유엔은 1989년 11월20일 어린이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아동권리협약을 제정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193개국이 이 협약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전문과 54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조약은 건강하게 자랄 권리, 교육받을 권리, 놀 권리 등 어린이가 누려야 할 권리를 모두 담고 있다. 그러나 전 세계 어른들의 약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추악한 탐욕이 빚어낸 어린들의 죽음과 함께 아동권리협약은 매장된 것이다.

전쟁, 가난 등이 어린이의 인권을 공격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이란 점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의 아동인권침해 또한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얘가 뭘 안다고?”라면서 어린이의 의견 묵살하기, 일기장, 소지품 검사하며 사생활을 침해하기, 두발 규제 등 아동을 인권의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침해행위들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아동권리협약에 대해 알고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알고 있을까?


이 책은 어린이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시, 동화,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와 삽화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비롯한 프랑스 작가 10명이 건강할 권리, 가족을 가질 권리, 먹을 권리, 착취당하지 않을 권리, 정체성의 권리, 교육받을 권리, 평화의 권리, 표현의 권리, 보호받을 권리, 평등의 권리 등 10가지 어린이의 권리를 주제로 썼다.

동화라고 해서 술술 읽을 요량이라면 오산. 프랑스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프랑스의 문학적 기풍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추리소설가, 기자, SF작가 등 참여한 작가들의 색채가 다양한데다가 깊이 있는 시각으로 에둘러 표현하고 있어서, 어떤 작품은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한참을 공들여야만 했다.

가령 ‘정체성의 권리’를 표현하고 있는 「창문 닦는 소녀」 단편(단 프랑크 작품)은 신호대기에 걸린 차들을 닦아주면서 생계를 잇는 가난한 소녀를 대신해 운전자가 다른 차들까지 세차해 준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어쨌단 거지? 이게 인권적 시각인가? 도대체 뭐가 정체성의 권리란 말이지? 한참을 머리 긁적이다가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봤다.


"이제 소녀의 얼굴에는 나이에 맞지 않던 주름도, 어떤 학대 때문인지 모를 괴로움도 어느새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이제야 어린 아이의 표정과 마음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어린이는 건강하고 해맑게 자라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어린이로서의 정체성의 권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이 책은 또한 어린이의 권리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담고 있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가난과 질병, 전쟁에 고통받는 아이들의 모습만을 그리고 있지 않다. 고질적인 어린이 인권 유린의 실태는 물론, 현대 사회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어린이 권리 침해 현실에 대해서도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착취당하지 않을 권리’에 관한 단편, 「천하무적 딸기맨」(브루노 가치오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착취’하면 으레 떠오르는 아동노동착취나 성 착취(정말 심각한 인권침해이다)에서 시각을 확장시킨다. 화학약품으로 만든 과자, 음식 등 인체에 유해한 먹거리로 어린이의 몸을 망가뜨리고 있는(착취하고 있는) 식품산업을 겨냥하고 있다. 여섯 명의 뚱뚱보 아이들이 아이들의 입맛을 자극적인 화학 약품에 길들여 상품을 팔아 온 악덕 사기꾼을 납치하여 혼내주는 내용으로, 어린이의 건강을 위협하는 어른들의 무책임을 지적하고 있다.

 

시 형식으로 된 ‘건강할 권리’의 「세상의 아이」(엘리에트 아베카시스 작품)는 기아로, 쓰나미로, 전쟁으로, 어른들의 방임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직접 불러가며 위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라”고, “미래는 너희에게 달려 있다”고 외치고 있다.

읽는 내내 기발한 발상에 웃음도 났지만, 부유한 나라의 아이들과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의 상황을 대비하면서 그려낸  ‘먹을 권리’의 「도둑이 된 엄마」나 ‘평화의 권리’를 담은 「장, 모래밭 놀이터의 영웅」편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쟁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넌 전쟁, 총, 죽음, 두려움이 무엇인지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시체가 널려 있더라도 넌 절대 이해할 수 없어. 왜냐고? 넌 언제든지 여길 떠나면 되잖아. 떠날 수 있는 자에겐 전쟁은 그냥 구경거리지, 전쟁이 아냐! 나도 엄마를 부르며 돌아가고 싶어. 그런데 엄마는 이미 죽었어. 그래, 너도 여기서 무엇인가는 느끼겠지. 그러다가 두려워지면 적당할 때를 선택하겠지. 이제는 됐다고 말이야. 그리고 넌 집으로 가는 거야. 나? 나는 여기 남겠지. 다른 곳으로 갈 데도 없고, 갈 수도 없어. 선택할 게 없다고.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난 총을 들어야 하고, 전쟁을 하는 거야. 그게 내 전쟁이야.” 「장, 모래밭 놀이터의 영웅」

전쟁지역의 열다섯 살 소녀의 입술이 오래도록 심장을 누른다.

‘1세계 나라의 인권’적 관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가령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해서 학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통해 ‘교육받을 권리’를 표현하는 내용에서는 다소 당황스럽기까지 했다-어른이나 아이들에게 인권의 감수성을 일깨워주는 데는 좋은 책이다.

한편으로는 어린이의 인권을 알리기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한데 뭉치는 프랑스의 문화풍토가 내심 부러웠다. 사회현실을 자양분으로 하던 문학적 토양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참에 인권의 감수성을, 어린이의 인권 가치를 담은 동화를 써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자고 일어나니 2008년 1월1일이었다. 일상의 한 날(日)이었다. 그렇다고 늙었다고 함부로 단정하지 말지어다. 불혹을 넘겼음에도 여전히 불혹하지 않는 것은 내 안에 호기심과 열정이 있기 때문이며, 이는 젊음의 조건 아닌가.ㅋㅋㅋ

새날에 대한 특별한 감흥도 없던 내가, 새해 들어 첫 책 소개는 어지간한 고민꺼리였다. 무슨 책을 쓸까. 책장을 훑어본다. 연필 꾹꾹 눌러가며 이명박 정부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주제로 써볼까. 인문학/사회과학 서적 칸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소설, 시, 여행서적은 어떨까...

그러던 차에 한통의 메일을 받았다. 한 인터넷사이트에서 무료로 신년토정비결을 봐줬다. 올해 나의 운세는 결론적으로 운수대통이다. 단, 조건이 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일을 하던 만사형통이요 빛이 날 거란다. 태어난 시(時)까지 넘겨야 하는 위험부담 대가로서는 손색없는 답변이다. 몸을 바지런히 움직여라. 몸뚱이로 살아라. 발바닥에 굳은살 박이도록 살아라...

보리처럼 살아라. 개처럼 살아라. “내 공부는 오직 몸뚱이로 비벼서 알아내는 것”이라며 우우우, 우우,,,컹컹, 짖어대던 진돗개 보리처럼.

김훈은 2005년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란 부제를 단 장편소설 『개』를 냈다.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이 소설 속 주인공이 바로 보리다. 수몰지구에서, 갯비린내 나는 어촌마을 사람들 곁에서 개의 운명으로 힘차게 살아가는 보리의 이야기를 담았다. 특히 김세현작가의 수묵화가 곁들여져 정말로 한편의 동화 같다.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우선 선행할 것이 바로 자신을 가다듬는 일일 테고, 마침 올해 점괴의 조언도 있고 해서, 김훈의 소설 『개』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먼 마을에, 주인 없는 개들이 울부짖었다. 개들은 못 먹어서 비쩍 말랐으나, 야생에 길들여지면서 사납게 긴장되어 있었다. 나를 보자 털을 세우며 으르렁거렸는데, 어떤 개는 다가와서 내 발등을 핥았다. 나는 개를 쓰다듬어 적개심을 달래주고, 개발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발바닥에 새카만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그 굳은살 속에는 개들이 제 몸의 무게를 이끌고 이 세상을 싸돌아다닌 만큼의 고통과 기쁨과 꿈이 축적되어 있었다. 굳은살은 땅을 딛고 달릴 만큼 단단했고 충격을 버틸 만큼 폭신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부제에도 썼듯이, 김훈은 곳곳에 버려진 강토를 자전거로 싸돌아다녔다. 그 길에서 만난 살아있는 것들의 비릿하고도 싱싱한 생명에 대한 기록이다. 김훈은 “세상의 개들을 대신해서 세상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눈부시다는 것을, 인간이 인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될 때까지 짖고 또 짖기”로 작정했으며, 그 순간부터 그는 굳은살 단단하게 박인 보리였다. 읽는 내내 나도, ‘충격을 버틸 만큼 푹신한’ 굳은살을 갖기 위해 이 세상을 싸돌아다닐 준비태세를 하며 우우우, 컹컹, 짖는다.

보리는 수몰지구에서 곧 보따리를 싸야 할 노부부집에서 5형제 중 세 번째로 태어난, 진돗개 수놈이었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신바람이 뻗쳐 있어서, 하루가 신나고 바쁜 개다.

“개로 태어났으므로 나는 내 고향의 이름을 모른다. 이름은 사람들에게나 대단하고, 나는 내 몸뚱이로 뒹구는 흙과 햇볕의 냄새가 중요하다...사람들은 어느 고장의 이름을 말해주어야만 겨우 어떤 땅인지를 짐작할 수 있지만, 개들은 늘 바쁘고 신나서 고향의 이름 따위는 하찮은 쓰레기일 뿐이다. 개들은, 안개냄새 나는 고장, 갯비린내 나는 고장, 새들이 날개 치는 소리 나는 고장, 처럼 몸 속에서부터 분명하게 고향을 기억한다.”(첫 장)

냄새로 세상을 알아가는 개들에게, 공부란 부지런히 몸을 놀리는 일이다. 세상의 온갖 구석구석을 몸뚱이로 부딪치고 뒹굴면서 그 느낌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 그래서 ‘개의 공부는 매우 복잡하다.’ 온 천지가 개들의 선생님이며, 이 많은 선생님들을 찾아가서 함께 뒹굴면서 스스로 배우는 거라, ‘정확하고도 빈틈없는 공부’다. 여기서 관건은 신바람이다. 신바람이 있어야 이 공부를 끝까지 잘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보리는 아침에 나가 저녁나절까지 종일 싸돌아다녀도 늘, 하루가 부족하다.

신바람은 슬픔과 고통을 견뎌내는 힘이기도 하다. 본디 개는 슬픔을 짊어지고 가는 족속이다. 눈치 없는 사람들로 인해 상처투성이 되기 다반사고, 언제 가마솥에서 흔적 없이 녹아 버릴지 모르는 척박한 운명이다. 보리의 엄마가 그러했고, 가슴 가득 환하게 벚꽃 흩날리게 했던 첫사랑 흰순이도 그러했다.

“그날, 엄마는 주인할머니한테 끌려가서 죽도록 매를 맞았어. 엄마는 꿇어앉아서 주둥이를 땅에 박은 채 비명 한마디도 지르지 않고 그 모진 매를 다 맞았어...잡아먹은 게 아닌데, 배를 채우려고 먹은 게 아닌데, 제자리로 돌려보낸 것인데...주인할머니는 그걸 잡아먹었다고 하면서 엄마를 마구 때렸어....엄마의 모든 슬픔은 엄마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이 엄마의 본래의 마음이야. 그러니까, 슬픔조차도 본래부터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지.”(20~23쪽)

엄마는 태어날 때 앞다리를 다쳐 시름시름 죽어가는 맏이를 삼켜버렸고, 착하지만 눈치 없는 주인장 부부는 제 새끼 잡아먹은 놈이라며 두들겨 팼다. 엄마는 원래 있던 어둡고 포근한 자궁으로 자식을 돌려보낸 것인데, 사람들은 모른다.

‘깊게 들여다보는 눈을 가진’ ‘풀이 돋아나듯이 바람이 불어오듯이 저절로 이 세상에 태어난’ 첫사랑 흰순이가 옆집 군대 가는 아들 몸보신 감으로 죽은 날, 흰순이의 ‘앞발의 굳은살이 밤새도록 마음에 어른거려’ 잠들지 못했던 보리다.

몸뚱이로 살아야 하는 족속들에게 슬픔도, 기쁨도 저절로 오고, 가는 것이다. 온몸에 신바람이 뻗친 개들에게, 엄마의, 자신의 본연의 슬픔은 다가올 기쁨 앞에서 무기력하다.

수몰지구를 떠나 새로운 냄새로 가득한 어촌마을을 알아가기엔 하루가 바쁘고, 벅차다. 새 주인은 노부부네 둘째아들로, 바닷가에서 통통배로 하루의 생계만큼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다. 바닷가에서 돌아온 주인장의 배를 뭍에 정박시키면서, 비릿한 새벽안개 냄새를 좋아했고, 아이들을 학교까지 안내하면서 만나는 풀들, 벼의 싱그러운 냄새에 가슴 벅찼지만, 보리가 사랑한 냄새는 따로 있다.

“배에서 내릴 때 주인님의 몸에서는 경유냄새가 났다. 주인님의 몸에서 나는 경유냄새는 고단하고도 힘찬 냄새였는데, 어딘지 쓸쓸한 슬픔도 느껴지는 냄새였다. 나는 그 경유냄새를 아침바다의 차갑고 싱싱한 안개냄새보다 더 사랑했다. 그것은 일하는 사람이 풍기는 냄새였고, 내가 지키고 따르고 사랑해야 하는 냄새였다.”(69쪽)

그 주인은 비바람이 몹시 불던 날,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지 못했다. “보리야”하면서 된장국에 밥 말아주던, 배추밭에 주저앉아 “이 땅을 못 떠난다.”며 울부짖던 주인할머니의 구수한 냄새와도 이별해야 한다.

고향에서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 하루의 생계를 위해 고단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 눈치 없는 사람들, 죽음...그래도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아름다움을 결코 놓지 않았던 보리는 ‘내 발바닥 굳은살로는 건너갈 수 없는 사람들의 세상에 가슴이 저렸다.’

사랑해야 할 냄새들과의 이별 후 어촌마을에서의 보리의 마지막 며칠은 ‘가을볕에 말라서 바스락거렸고 습기 빠진 바람 속에서 가벼웠다.’ 그러나 지나간 슬픔보다 다가올 기쁨에 충만해지는 게 개의 유전적 기질 아닌가. 몸뚱이로 살아야 할, 날 것의 비릿한 냄새를 지닌 족속들이 그러하듯.

“어디로 가든 거기에는 산골짜기와 들판, 강물과 바다,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 안개 낀 새벽과 저녁의 노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고 세상의 온갖 냄새들로 내 콧구멍은 벌름거릴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전히 흰순이와 악돌이 들이 살아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여전히 냄새 맡고 핥아먹고 싸워야 할 것이었다. 어디로 가든, 내 발바닥의 굳은살이 그 땅을 밟을 것이고 나는 굳은살의 탄력으로 땅 위를 달리게 될 것이다.“ (230~231쪽)

개의 운명에 갇혀 살아가는 보리를 숙명론으로 받아들여 이 소설을 읽는다면 그건 정말 눈치 없는 사람이다. 남성주의시각이 살짝 엿보이기도 하지만, 읽는 내내 정작 내 신경을 건드린 건 오히려 내 신체다. 내 미끈한 발바닥에 마음이 불편했다.

점점 손발의 쓰임새가 줄어드는 삶에서, 발바닥의 굳은살이 이 세상의 모든 것과 맞먹는 개처럼 살고 싶다.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충격에도 거뜬히 일어나, 핥고, 싸울 수 있는, 단단하고 야무진 굳은살을 만들어야겠다. 보리야, “개들아, 죽지 마라.”




                                                                   2008. 1. 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랫동안 기다렸다. 한여름 뙤약볕 시원한 빗줄기를 고대하는 콩대처럼.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몽고반점』을 읽고 나서, 한강의 다음 작품을 학수고대했다.

 『몽고반점』은 도발적이었고, 그만큼 강렬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비디오아트를 하면서, 아내를 등쳐먹고 사는 나는, 가족주의질서에서 말하자면, 형부인 셈이다. 강제로 고기를 들이민 아버지 앞에서 손목을 그은 처제를 들쳐업고 응급실로 향했던 나는,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갑자기 삶이 넌더리났다. 그러던 어느날, 말라깽이가 된 처제의 엉덩이에 아직까지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 가슴이 달뜬다. 처제의 나신에, 엉덩이 몽고반점에서부터 사방으로 꽃들이 퍼져가는 그림을 그리고, 카메라에 담는다. 한참을. 현기증이 인다. 참을 수 없다. 내 몸에서도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식물인 처제와 몸을 섞는다. 꽃들이 휘황찬란하게 피어난다.

처제와 형부라는 가족주의 질서를 넘어선 순결한 갈구, 여기에 식물성이길 간절히 원하는 여성의 나체에 흐드러지게 꽃그림을 그려 넣는 장면이 너무나 강렬해서, 한동안 난, 꿈을 꿨다. 내 몸에서 커다란 꽃잎들이 울긋불긋 피어나는 찬란한 꿈을. 그리고 10대부터 20대를 관통하면서 몇 번이고 관념적 자살을 꿈꾸게 했던 절대절명의 고독과 존재의 근원적 질문에 시달렸다. 그 시절 난, 치명적으로 고독했고, 그만큼 존재는 빛났다.「몽고반점」의 후유증은 오래가서, 이번 연작소설을 손에 잡는 순간, 호흡곤란증세를 경험해야 했다.

왜 그녀는 식물이 되고자 했을까. 세세한 이유까지야 상상에 맡기더라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오늘날 육식으로 상징되는 폭력에서 자유로운 자 하나 없을 테고, 성찰의 견지에서보자면 참회와 구원을 갈구하는 존재론적인 저항이 바로 식물성일테니까.

 

그래서 『몽고반점』의 연작소설이 나왔다고 했을 때, 식물이 되고자 하는 여성보다는 그런 여동생을 둔, 또 그녀와 한 몸이 된 남편을 정신병원에 신고한, 언니가 몹시 궁금했다. 어쩐지 그 언니가 소설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연하게.

왜냐하면 이 소설은 여성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상처는 육식으로,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남성성으로,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 소통을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에 관한 서사이고, 종국에는 사회적 소수자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예민하게 느끼는 지구상의 존재는 여성일 거라 생각했다.

이번에 나온 『채식주의자』는 「몽고반점」과 함께 「채식주의자」, 「나무불꽃」이 수록된 연작소설집이다. 이제야 비로소 완벽하게 짜여진 느낌이다. 세 연작소설의 가운데 영혜, 그녀가 있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영혜와 그녀를 둘러싼 시선들이 있다. 가족주의 계보에서의 남편, 형부 그리고 언니.

「채식주의자」는 어느날 갑자기 육식을 포기한 영혜에 대한 남편의 시선으로, 「몽고반점」은 식물을 지향하는 처제에 대한 비디오아티스트 형부의 눈으로, 그리고 마지막 「나무불꽃」 은 나무가 되어가는 여동생을 힘겹게 지켜보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는 맏딸 언니의 마음으로 그려져 있다.

영혜가 왜 고기를 먹지 않게 됐을까. 날것의 채 식지 않은 비릿한 피가 입술에 촉촉하게 남아 있는 꿈들을 연일 꾼다. 그래서 선언했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그리고 점점 말라간다. 남편으로 눈으로는 지극히 무난해보여서 선택한 아내가, 어느날, 갑자기, 이상해진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모른다.”(I'm your father란 말만큼 강렬하다)면서 남편은 냉정하게 그녀를 버린다.

괴상망측한 꿈은 어릴 적 그녀의 상처가 발현된 것이다. “내가 월남에서 베트공 일곱을...” 떠벌이던 아버지는 어릴 적 영혜를 물었던 개를 오토바이에 매달고 지쳐 쓰러져 죽을 때까지 동네를 달리고 달렸다. 달렸던 개가 패서 죽인 것보다 육질이 부드럽다던 아버지의 말과 헐떡이던 개의 거친 숨소리가 채 귓전을 가시기도 전에, 영혜는 숟가락질을 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손찌검을 뼛속까지 받아들였던 영혜다. 그때의 상처는 어른이 되어 날 것의 선명한 핏덩이로 밤시간을 지배했다. 트라우마는 언젠가 삶의 표피로 드러나듯이. 그 아버지는 육식을 거부하는 다 큰 딸에게 개고기 대신 탕수육을 억지로 들이댔고, 뺨을 후려쳤고, 끝내 딸의 손목에서 방울방울 솟구치는 피를 보았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채식주의자」, 43쪽)

결국 영혜는 날카로워지는 가슴까지 안으로 거두어서 나무가 되어가고 있다. 땀구멍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고기냄새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모든 신체기능을 퇴화시키면서. 

그런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의 마음은, 아프기만 할까.

밑반찬을 해서 동생 아파트에 들어선 순간, 온 몸에 꽃그림칠을 한  여동생이 나체로 누워있다. 그 옆에 똑같이 물감칠을 한 벌거벗은 남자가 있다. 남편이다.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나무불꽃」, 166쪽)

만약이란 가정법으로 삶을 몽땅 뒤흔들어보면서, 인혜는 자신의 상처를 만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언제부터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을까, 아니, 무너지기 시작했을까.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그런 게 감동을 줘. 그 말은 다소 어려웠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오히려 그가 사랑 따위에 빠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고백은 아니었을까.”(「나무불꽃」, 161~162쪽)

남편과의 사랑을 확신한 적이 없었던 인혜다. 맏딸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한 집안의 생계책임자로서, 성실은 천성과 같았던 그녀는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자각하게 된 것은 모래산처럼 삶이 무너져 내리고 나서였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나무불꽃」, 197쪽)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나무불꽃」, 220쪽)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여동생을 은밀히 미워도 하고, 가여워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향한 내밀한 다독임이기도 하다.

세 편의 연작소설엔 뚜렷한 대비가 있다. 고기, 육식, 붉은색(피), 동물성, 남성성, 폭력/ 식물, 채식, 푸른색(몽고반점), 식물성, 여성성, 구원이다. 딸을 문 개를 죽인 아버지, 육식을 거부하는 아내를 냉정하게 버린 남편 모두 폭력으로 미움의 대상을 제거한다. 반면에 영혜는 속죄의 마음으로 자신의 동물성을 다 짜내서 나무가 되고, 인혜는 자신의 상처를 만나면서 타인의 고통을 아프게 받아들인다.

이번에도 후유증은 오래 갈 것이다. 그러나 즐겁고 설레는 고통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VERTIGO 2009-07-29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혜는 언니의 분신입니다. 나무 불꽃에 나오죠. 삶을 견디고 왔지만 자신이야말로 경계에 서 있다고. 하지만 영혜는
경계를 넘어갔죠. 둘은 짝입니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가 김수정이 둘리를 세상에 내보낸 것은 20여 년 전이다. 아기공룡 둘리를 보면서 자랐던 이들은 지금 20대 후반, 30대가 되었고,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명랑만화 둘리를 마음속에 간직하기엔 세상은 황무지처럼 건조하고, 다 큰 독자들도 그러하다.

까마득히 잊혀져간 둘리가 2003년 5월 다시 나타났다. 더 이상 귀여운 아기공룡이 아니다. 안전화를 신은 채 한손엔 소주병을 들고 있는 둘리의 온 몸엔 삶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여차저차해서 빙하에서 떠내려 온 아기공룡이 대한민국 국적도 없이, 인간의 모습도 아니고, 돈도 빽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데, 이 시대를 살아가자면 둘리라고 별 수 있겠는가 싶다. 그래도 그렇지, 그 귀엽던 둘리가 처참한 몰골이 되어 버리다니... 김수정씨가 “도대체 누가 둘리를 이렇게 만들어놨어?”라며 현기증을 일으켰듯, 나도 숨이 턱 막혀 왔다.


아기공룡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고?

최규석이란 젊은 만화가가 그랬다. 모두의 로망이었던 귀여운 둘리를 이렇게 망쳐놓은 건 그였다. 호이호이 하며 곤경에 처한 친구들을 도와주었던 둘리의 오른쪽 집게손가락은 프레스에 눌려 잘려나갔고, 그의 초능력도 사라졌다. 길동이 아저씨는 사기를 당해 빚만 남겨놓은 채 홧병으로 죽고, 빚 때문에 또치는 동물원에 팔려가 몸을 팔고, 20대 희동이는 걸핏하면 사람을 패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 하고, 그런 희동이를 빼내기 위해 철수는 도우너를 팔아넘기고, 외계인을 잡았다며 과학자는 호들갑을 떨면서 도우너를 해부하고, 이 모습이 언론을 통해 생중계 되고...더 이상 마법도 쓸 수 없는 둘리는 친구들을 구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면서 소주병을 들고 길동이아저씨 무덤가로 향하고. ‘그래 이곳은 만만치가 않아...’

최규석은 <공룡둘리>에서 귀여운 아기공룡을 처참하게 바꿔놓았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민증도 없이(국적을 가질 권리와 같은 맥락에서)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존재하되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공장노동자 둘리를, 작가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들 따름이다.

한 장 한 장을 힘겹게 넘기면서도 그림체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은 기발한 상상력 때문이 아니다. 등장인물에 나를,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대입시켜도 완벽한 이야기가 된다. 기똥차게 들어맞는다. 작가의 힘이 여기에 있다. 깊고 굵게 패인 삶의 주름을 알고 있다. 한때 민중문학이 담아냈던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그는 만화를 통해 집요하게 끄집어내고 있다.

아기공룡을 이렇게 만든 건 누구냐고? 최규석은 자신의 펜끝을 통해 세상에 알렸을 뿐이다. 도처에 둘리와 그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세상은 더 이상...명랑만화가 아니잖은가.

다른 작품들에서도 작가의 시선을 읽을 수 있다. 맨 처음 수록된 <사랑은 단백질>에서 치킨집 주인은 닭이다. 자식들을 기름에 튀겨 배달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게 꿈이었던 여덟살 자식을 튀겨놓고는 차마 배달가지 못하는 치킨집 주인장 닭. 족발집 주인인 돼지가 대신 배달 간 집 문틈으로 눈물을 훔쳐가며 자식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에서, 난 앞으로 치킨을 먹지 말아야겠다, 고 부질없는 다짐까지 하고 말았다. 산다는 게 그렇다. 죄의식이 있든 무감각하든, 누군가를 밟고, 먹고, 그러면서 죄를 지어가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정말로 산다는 것의 업보이다.

작가가 집요하게 붙잡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의 처절한 삶이다. 개개인의 비굴한 권력과 폭력에 날을 세우고 있다. <콜라맨>은 초등학생이 정신장애인 콜라맨(콜라만 주면 뭐든 다 해준다)을 이용해 자신의 죄까지 덮어씌우는, 소름 쫙 끼치는 공포물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짓밟으면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려는 인간군상-애나 어른 할 것 없이-을 도마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런데 개개인의 비열한 폭력은 고스란히 개인의 영역으로만 치부할 수 없지 않은가. 자신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약자들을 딛고 일어서는 폭력은 결국은 사회 전체를 관통하며 전체주의의 양상을 띠게 마련이다. <선택>은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의 철거싸움을 그렸다. 한켠에선 생존권과 주거권을 요구하며 용역깡패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학비 때문에 단가가 높은 철거반일을 선택한 젊은이가 대치상태에 있고, 또 한켠에선 ‘대한민국’을 외치며 거리를 점령한 붉은 물결의 시민 떼거리들이 있다. 각자의 선택에 따른 자리이지만, 어떤 선택이냐는 삶의 자리까지 바꿔놓을 만큼 역동적/혁명적이다.

부족민들에게 시간개념을 숨기면서 제사장의 권력을 유지하는 <솔잎>과 행복한 사회를 위해 영웅적인 사람의 지배를 원하는 무지몽매한 국민들을 조롱한 <리바이던>은 파시즘적 사회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영웅적인 지배자를 컴퓨터로 형상한 게 인상적이다.

설마 요즘에도 만화를 얕잡아보는 이들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순정 아니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만 해대서 만화가 싫다는 사람들은 꼭 한번 이 만화를 보시라. 당신의 삶이, 우리의 삶이 여기에 있으니까.

사방팔방에 둘리와 그의 친구들이 살고 있다. 죽어라 사교육비 들여서 아이들 공부시켜 좋은 대학 보내면 뭐하나. 다 비정규직노동자가 될 터인데. 월드컵함성 이면에 제 집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절규가 있는데, 이를 모르는 것 또한 폭력이다. 사회의 그늘진 모습-진짜 현실에 눈감고, 함성의 붉은 물결을 선택하는 것, 물건 싸고 좋다며 이랜드계열사 제품을 선택하는 것, 이 모두가 다 내재적 파시즘을 동반한 폭력이다.


여섯 편의 단편만화들을 읽는 내내 선택과 폭력의 문제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시대와 정직하게 호흡하고 있는 만화가 최규석을 주목하면서, 그의 또 다른 작품 『습지생태보고서』도 꼭 읽어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터뷰어 : 조지 부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커트 보네거트 : 역사가 뭔지도 모르는 대통령이니까요. 게다가 주변에 있는 보좌관들도 역사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위대한 정치가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있어요. 하지만 알고 보면 낡아 빠진 것, 즉 전제정치로 되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도 자기들은 창조적인 사람들이란 착각에 빠져 있다고요.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데이비드 바사미언 인터뷰집)에서-

“부시는 역사를 모르니까 내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지 모르겠다.”면서 인터뷰를 시작하는 그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다. 내로라하는 진보적 인사들조차 이처럼 대놓고 부시를 말한 이가 있었던가? 굉장한 내공을 가졌군. 그를 최근에서야 알았다는 게 정말로 부끄러웠다.

늘 유머를 달고 다녔던 팔순의 그가 자본주의의 문명의 야만성과 미국의 폭력을 향해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는 내내, 유쾌했다. 통쾌했다. 단 여섯 장 분량의 그의 인터뷰를 읽고 완전히 그의 팬이 되었다. 블랙유머의 내공을 부러워하면서.

그는 미국 버지니아대학 총기사건으로 32명이 죽기 엿새 전, 2007년 4월11일 84세로 세상을 떴다. 소설가이자 풍자가였으며 휴머니스트였던 그를 잃은 것은 분명 불행이다. 최근 그가 죽기 5년 전 미국 잡지「인디스타임즈 In These Times」에 연재한 칼럼들을 모아 엮은 에세이집『나라 없는 사람』이 나왔다.


‘선이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천사들이 마피아들과 함께 전선을 조직해 맞설 수 있다면!’  저녁식탁자리 가족들과의 대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주 어렸을 적부터 유머를 연구했던 그의 내공은 첫 페이지에서부터 빛났다. 

책 전체를 통해 그는 우주에서 유일하게 생명이 살 수 있는 푸른 행성을 파괴하는 ‘화석연료 중독자’들과 미국-특히 부시와 그의 수뇌부-의 폭력에 대해 일갈했다. 그의 팬들은 유고집이 된 이 책을 사랑했지만, 부시와 그의 집단들은 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부시를 미워했다. “내가 죽기보다 싫었던 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비열한 세 사람의 이름이 부시, 딕, 콜린이 될 때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고 죽음을 목전에 둔 84세의 노인은 고백한다.

“우리 대통령이 기독교도였던가? 아돌프 히틀러도 기독교도였다.” 과거 나치가 그랬듯,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공포와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장본인들이다. 미국 정부와 기업의 금고를 털어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고 있는, 양심도 없고 동정심이나 수치심조차 없는 자들-권력에 취한 침팬지-, 이런 꼴통들과 한통속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는 ‘나라 없는 사람’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의 자유와 정의를 위협해서 베트남을, 이라크를 침략했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는 뻔한 답 대신에 미국의 본질에 대해 반문한다.

“네이팜탄은 하버드에서 발명되었다. ‘진리(veritas)'란 그런 것인가?” “1844년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고 말했다. 마르크스가 이 말을 했을 때, 미국은 노예제도를 합법적으로 지닌 나라였다. 자비로운 하나님의 눈에도 누가 더 밉게 보였겠는가? 마르크스였겠는가, 미국이었겠는가?”

최신식 기계를 증오하는 러다이트라고 불렸던 그는 이 말을 마음에 쏙 들어했다.  불과 이백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완전히 망가뜨린 건 화석연료다.

“생각해보라. 영국인 마이클 패러데이가 최초의 발전기를 만든 것은 불과 백칠십이 년 전이었고, 카를 벤츠가 백십구년 전에 내연기관으로 움직이는 최초의 자동차를 만들었고, 미국 최초로 유정을 뚫은 것은 백사십오년 전의 일이었다. 라이트형제는 백일년 전에 최초의 비행기를 만들어 띄웠다. 그 연료는 가솔린이었다.”

우리는 ‘중독 사실을 부인하는 중증의 화석연료 중독자’가 되었고, ‘지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비트랩이 되어버렸다.’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연료를 끌어모으기 위해 미국 정부와 더러운 기업들은 전쟁을 불사하고 있다.

천성적으로 유머가 풍부했던 그는 말년에 우울했다. 때로는 유머가 정곡을 명쾌하게 찌르는 마력을 지니지만, 미치광이 부시와 꼴통집단이 널뛰는 세상에서 유머의 한계는 명확해진다. 정말로 화성인이 우리를 침공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랄 정도였으니. 그래도 그는 희망의 끈을 놓치는 않았다. 

출산을 앞둔 한 여성팬이 무서운 세상에 아이가 태어나는 게 걱정된다는 말에 그는 이렇게 답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 아기가 조지 부시처럼 되면 어쩌려고!
만일 운이 좋다면 가난한 사람도 비만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불운하다면 국가적 의료보험이나 제대로 된 공교육제도가 없고, 독극물주사(사형방법의 일종)와 전쟁이 오락거리가 되며, 대학에 가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드는 사회에서 태어날 것이다. 만일 아기가 캐나다, 스웨덴 같은 곳에서 태어난다면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세이프섹스를 하든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라.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대신, 나에게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해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음악(특히 재즈에 상당한 조예가 깊었다) 외에도 내가 만났던 성인들로, 그런 사람들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성인이란 부도덕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우리에게 간곡하게 당부한다.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미국민 대다수가 미국 정부가 얼마나 우둔한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미국 정부가 얼마나 탐욕스럽고 부도덕한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역사도 모르는 부시와 그의 수뇌부들 보다 현명해지라고. 그리하여 당신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존경했던 사회주의자 유진 데브스의 말을 인용해 커트 보네거트는 지금도 우리에게 속닥거리고 있다. 

“하층계급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나는 하층계급입니다. 범죄인자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나는 범죄형입니다. 구속된 영혼이 존재하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서 가재처럼 기어 나올 때 당신은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은가?

                                                                                                              2007. 10. 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