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랫동안 기다렸다. 한여름 뙤약볕 시원한 빗줄기를 고대하는 콩대처럼.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몽고반점』을 읽고 나서, 한강의 다음 작품을 학수고대했다.

 『몽고반점』은 도발적이었고, 그만큼 강렬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비디오아트를 하면서, 아내를 등쳐먹고 사는 나는, 가족주의질서에서 말하자면, 형부인 셈이다. 강제로 고기를 들이민 아버지 앞에서 손목을 그은 처제를 들쳐업고 응급실로 향했던 나는,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갑자기 삶이 넌더리났다. 그러던 어느날, 말라깽이가 된 처제의 엉덩이에 아직까지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 가슴이 달뜬다. 처제의 나신에, 엉덩이 몽고반점에서부터 사방으로 꽃들이 퍼져가는 그림을 그리고, 카메라에 담는다. 한참을. 현기증이 인다. 참을 수 없다. 내 몸에서도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식물인 처제와 몸을 섞는다. 꽃들이 휘황찬란하게 피어난다.

처제와 형부라는 가족주의 질서를 넘어선 순결한 갈구, 여기에 식물성이길 간절히 원하는 여성의 나체에 흐드러지게 꽃그림을 그려 넣는 장면이 너무나 강렬해서, 한동안 난, 꿈을 꿨다. 내 몸에서 커다란 꽃잎들이 울긋불긋 피어나는 찬란한 꿈을. 그리고 10대부터 20대를 관통하면서 몇 번이고 관념적 자살을 꿈꾸게 했던 절대절명의 고독과 존재의 근원적 질문에 시달렸다. 그 시절 난, 치명적으로 고독했고, 그만큼 존재는 빛났다.「몽고반점」의 후유증은 오래가서, 이번 연작소설을 손에 잡는 순간, 호흡곤란증세를 경험해야 했다.

왜 그녀는 식물이 되고자 했을까. 세세한 이유까지야 상상에 맡기더라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오늘날 육식으로 상징되는 폭력에서 자유로운 자 하나 없을 테고, 성찰의 견지에서보자면 참회와 구원을 갈구하는 존재론적인 저항이 바로 식물성일테니까.

 

그래서 『몽고반점』의 연작소설이 나왔다고 했을 때, 식물이 되고자 하는 여성보다는 그런 여동생을 둔, 또 그녀와 한 몸이 된 남편을 정신병원에 신고한, 언니가 몹시 궁금했다. 어쩐지 그 언니가 소설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연하게.

왜냐하면 이 소설은 여성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상처는 육식으로,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남성성으로,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 소통을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에 관한 서사이고, 종국에는 사회적 소수자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예민하게 느끼는 지구상의 존재는 여성일 거라 생각했다.

이번에 나온 『채식주의자』는 「몽고반점」과 함께 「채식주의자」, 「나무불꽃」이 수록된 연작소설집이다. 이제야 비로소 완벽하게 짜여진 느낌이다. 세 연작소설의 가운데 영혜, 그녀가 있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영혜와 그녀를 둘러싼 시선들이 있다. 가족주의 계보에서의 남편, 형부 그리고 언니.

「채식주의자」는 어느날 갑자기 육식을 포기한 영혜에 대한 남편의 시선으로, 「몽고반점」은 식물을 지향하는 처제에 대한 비디오아티스트 형부의 눈으로, 그리고 마지막 「나무불꽃」 은 나무가 되어가는 여동생을 힘겹게 지켜보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는 맏딸 언니의 마음으로 그려져 있다.

영혜가 왜 고기를 먹지 않게 됐을까. 날것의 채 식지 않은 비릿한 피가 입술에 촉촉하게 남아 있는 꿈들을 연일 꾼다. 그래서 선언했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그리고 점점 말라간다. 남편으로 눈으로는 지극히 무난해보여서 선택한 아내가, 어느날, 갑자기, 이상해진 것이다. “나는 이 여자를 모른다.”(I'm your father란 말만큼 강렬하다)면서 남편은 냉정하게 그녀를 버린다.

괴상망측한 꿈은 어릴 적 그녀의 상처가 발현된 것이다. “내가 월남에서 베트공 일곱을...” 떠벌이던 아버지는 어릴 적 영혜를 물었던 개를 오토바이에 매달고 지쳐 쓰러져 죽을 때까지 동네를 달리고 달렸다. 달렸던 개가 패서 죽인 것보다 육질이 부드럽다던 아버지의 말과 헐떡이던 개의 거친 숨소리가 채 귓전을 가시기도 전에, 영혜는 숟가락질을 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손찌검을 뼛속까지 받아들였던 영혜다. 그때의 상처는 어른이 되어 날 것의 선명한 핏덩이로 밤시간을 지배했다. 트라우마는 언젠가 삶의 표피로 드러나듯이. 그 아버지는 육식을 거부하는 다 큰 딸에게 개고기 대신 탕수육을 억지로 들이댔고, 뺨을 후려쳤고, 끝내 딸의 손목에서 방울방울 솟구치는 피를 보았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채식주의자」, 43쪽)

결국 영혜는 날카로워지는 가슴까지 안으로 거두어서 나무가 되어가고 있다. 땀구멍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고기냄새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모든 신체기능을 퇴화시키면서. 

그런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의 마음은, 아프기만 할까.

밑반찬을 해서 동생 아파트에 들어선 순간, 온 몸에 꽃그림칠을 한  여동생이 나체로 누워있다. 그 옆에 똑같이 물감칠을 한 벌거벗은 남자가 있다. 남편이다.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나무불꽃」, 166쪽)

만약이란 가정법으로 삶을 몽땅 뒤흔들어보면서, 인혜는 자신의 상처를 만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언제부터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을까, 아니, 무너지기 시작했을까.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그런 게 감동을 줘. 그 말은 다소 어려웠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오히려 그가 사랑 따위에 빠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고백은 아니었을까.”(「나무불꽃」, 161~162쪽)

남편과의 사랑을 확신한 적이 없었던 인혜다. 맏딸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한 집안의 생계책임자로서, 성실은 천성과 같았던 그녀는 ‘하다못해 지하철에서 스치는 행인으로서까지’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자각하게 된 것은 모래산처럼 삶이 무너져 내리고 나서였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나무불꽃」, 197쪽)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나무불꽃」, 220쪽)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여동생을 은밀히 미워도 하고, 가여워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향한 내밀한 다독임이기도 하다.

세 편의 연작소설엔 뚜렷한 대비가 있다. 고기, 육식, 붉은색(피), 동물성, 남성성, 폭력/ 식물, 채식, 푸른색(몽고반점), 식물성, 여성성, 구원이다. 딸을 문 개를 죽인 아버지, 육식을 거부하는 아내를 냉정하게 버린 남편 모두 폭력으로 미움의 대상을 제거한다. 반면에 영혜는 속죄의 마음으로 자신의 동물성을 다 짜내서 나무가 되고, 인혜는 자신의 상처를 만나면서 타인의 고통을 아프게 받아들인다.

이번에도 후유증은 오래 갈 것이다. 그러나 즐겁고 설레는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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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TIGO 2009-07-29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혜는 언니의 분신입니다. 나무 불꽃에 나오죠. 삶을 견디고 왔지만 자신이야말로 경계에 서 있다고. 하지만 영혜는
경계를 넘어갔죠. 둘은 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