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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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제가 갖고 있던 궁금증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루하루가 공포의 나날이고 전쟁이 진부한 일상이던 곳에서 거주하며, 이런 경험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 이런 경험을 단지 이미지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전쟁을 실제로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인상을 받았죠. 그렇지만 저는 우리, 그러니까 전쟁을 겪지 않아도 되고 안전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오늘날의 미디어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저 전 세계적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보스니아내전이 한창이던 1993년, 1994년, 그리고 1995년 수도 사라예보에 있었던 수전 손택에게 ‘타인의 고통’은 절박한 주제였다. 전쟁의 참혹함은 TV나 사진 따위의 이미지들을 통해 전 세계 곳곳으로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전쟁은 하나의 이미지가 됐다. 그렇다면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평화운동을 고민할까, 아니면 복수를? 그도 아니면 너무나 참혹하여 고개를 돌려 버릴까?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며 한도의 한숨을 쉴까?

손택은 사라예보에서 살았던 경험을 토대로, 각종 이미지들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보면서 사람들은 왜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지 않는가, 집요하게 묻고 있다. 그녀는 방대한 전쟁자료와 관련 사진들을 분석하면서, 전쟁으로 빚어지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아프게 내리친다.

타인의 고통은 내게도 절박한 주제이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현안에 대해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전에 읽은 소설에서 네안데르탈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신기한 능력을 지녔다.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일 수는 없을까?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던 때, 고 신효순, 심미선 학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했다. 월드컵에 쏠려있는 대중의 관심을 어떻게 하면 돌리고, 촛불집회에 동참하게 할까? 미군의 폭력을 고발하는 길거리 사진전시회를 열었다. 전시된 사진 속에는 잔혹하게 살해된 고 윤금이씨 사진이 포함돼 있었다. 국부에 우산이 꽂힌 채 죽은 그녀의 모습은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두 학생들의 죽은 현장 사진도 구토를 일으킬 정도로 끔찍했다. “자, 보십시오. 이것이 미군이 저지른 만행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에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정도로, 몇몇 사진들은 극도로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행동연대 활동가들은 잔혹한 사진을 전시하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일반 시민들에게 잔혹한 이미지들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폭력이라며 문제제기를 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충격요법을 사용한다. 충격적인 사진이나 자극적인 문구를 쓰는데 별 주저함이 없다. 문제의식을 느낀다 해도 지금 당장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잔혹한 이미지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할까,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보면서 “가슴 아프다”고 느낀다면, 그 연민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하루도 빠짐없이 전쟁, 기아 등으로 죽어가는 잔혹한 이미지들을 접한다. 이런 이미지들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떤 자각을 던져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전쟁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이다. 타인의 고통을 성찰할 기회가 수도 없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왜 도리어 사람들은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해지는 걸까?

한편으로는 잔혹한 이미지들에 익숙해지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불편하여 고개를 돌려버리는 거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설명이 곁들여진 사진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토록 잔인한 사진들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아니, 좀 더 솔직해보자. 끔찍한 이미지 속의 사람들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현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흔히 보는 전쟁의 참사,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사진 대부분은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비극이라고,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곳의 일이라고 믿는다.

손택은 오히려 잔혹한 이미지들은 사람들에게 관음증적 향락 - 즉,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에 빠져, 타인의 고통이 나와는 무관하다고 인식하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게다가 이러한 이미지들은 무력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 고통이 엄청나게 광범위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개입한다 해도 얼마나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라는 무력감 말이다.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되기” 때문에 “전쟁사진을 통해 동정심, 연민, 분개 등의 감정을 착취하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쟁점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폭력과 잔혹한 이미지들이 스펙터클하게 소비되는 사회에서 도리어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우리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겠지만, 이것이 연민으로 그친다면 스스로의 무고함을 증명해주는 알리바이가 되어 버린다. 손택은 중요한 지점을 지적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결국 타인의 고통이 나와, 우리와 연결돼 있음을 자각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회복하는 길이다. 이때 ‘우리’라는 말은 책임감을 내포한다. 그래서 손택은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어쭙잖은 연민의 본질을 정확히 보라는 손택의 통찰은 읽는 내내 내 양심을 콕콕 찔러댔다. 잃어버린 대중의 공감능력을 깨우기 위해 자극적인 것들에(이미지 등) 쉽게 현혹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2007.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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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7-12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동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