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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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김수정이 둘리를 세상에 내보낸 것은 20여 년 전이다. 아기공룡 둘리를 보면서 자랐던 이들은 지금 20대 후반, 30대가 되었고,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명랑만화 둘리를 마음속에 간직하기엔 세상은 황무지처럼 건조하고, 다 큰 독자들도 그러하다.

까마득히 잊혀져간 둘리가 2003년 5월 다시 나타났다. 더 이상 귀여운 아기공룡이 아니다. 안전화를 신은 채 한손엔 소주병을 들고 있는 둘리의 온 몸엔 삶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여차저차해서 빙하에서 떠내려 온 아기공룡이 대한민국 국적도 없이, 인간의 모습도 아니고, 돈도 빽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데, 이 시대를 살아가자면 둘리라고 별 수 있겠는가 싶다. 그래도 그렇지, 그 귀엽던 둘리가 처참한 몰골이 되어 버리다니... 김수정씨가 “도대체 누가 둘리를 이렇게 만들어놨어?”라며 현기증을 일으켰듯, 나도 숨이 턱 막혀 왔다.


아기공룡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고?

최규석이란 젊은 만화가가 그랬다. 모두의 로망이었던 귀여운 둘리를 이렇게 망쳐놓은 건 그였다. 호이호이 하며 곤경에 처한 친구들을 도와주었던 둘리의 오른쪽 집게손가락은 프레스에 눌려 잘려나갔고, 그의 초능력도 사라졌다. 길동이 아저씨는 사기를 당해 빚만 남겨놓은 채 홧병으로 죽고, 빚 때문에 또치는 동물원에 팔려가 몸을 팔고, 20대 희동이는 걸핏하면 사람을 패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 하고, 그런 희동이를 빼내기 위해 철수는 도우너를 팔아넘기고, 외계인을 잡았다며 과학자는 호들갑을 떨면서 도우너를 해부하고, 이 모습이 언론을 통해 생중계 되고...더 이상 마법도 쓸 수 없는 둘리는 친구들을 구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면서 소주병을 들고 길동이아저씨 무덤가로 향하고. ‘그래 이곳은 만만치가 않아...’

최규석은 <공룡둘리>에서 귀여운 아기공룡을 처참하게 바꿔놓았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민증도 없이(국적을 가질 권리와 같은 맥락에서)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존재하되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공장노동자 둘리를, 작가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들 따름이다.

한 장 한 장을 힘겹게 넘기면서도 그림체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은 기발한 상상력 때문이 아니다. 등장인물에 나를,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대입시켜도 완벽한 이야기가 된다. 기똥차게 들어맞는다. 작가의 힘이 여기에 있다. 깊고 굵게 패인 삶의 주름을 알고 있다. 한때 민중문학이 담아냈던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그는 만화를 통해 집요하게 끄집어내고 있다.

아기공룡을 이렇게 만든 건 누구냐고? 최규석은 자신의 펜끝을 통해 세상에 알렸을 뿐이다. 도처에 둘리와 그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세상은 더 이상...명랑만화가 아니잖은가.

다른 작품들에서도 작가의 시선을 읽을 수 있다. 맨 처음 수록된 <사랑은 단백질>에서 치킨집 주인은 닭이다. 자식들을 기름에 튀겨 배달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게 꿈이었던 여덟살 자식을 튀겨놓고는 차마 배달가지 못하는 치킨집 주인장 닭. 족발집 주인인 돼지가 대신 배달 간 집 문틈으로 눈물을 훔쳐가며 자식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에서, 난 앞으로 치킨을 먹지 말아야겠다, 고 부질없는 다짐까지 하고 말았다. 산다는 게 그렇다. 죄의식이 있든 무감각하든, 누군가를 밟고, 먹고, 그러면서 죄를 지어가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정말로 산다는 것의 업보이다.

작가가 집요하게 붙잡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의 처절한 삶이다. 개개인의 비굴한 권력과 폭력에 날을 세우고 있다. <콜라맨>은 초등학생이 정신장애인 콜라맨(콜라만 주면 뭐든 다 해준다)을 이용해 자신의 죄까지 덮어씌우는, 소름 쫙 끼치는 공포물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짓밟으면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려는 인간군상-애나 어른 할 것 없이-을 도마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런데 개개인의 비열한 폭력은 고스란히 개인의 영역으로만 치부할 수 없지 않은가. 자신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약자들을 딛고 일어서는 폭력은 결국은 사회 전체를 관통하며 전체주의의 양상을 띠게 마련이다. <선택>은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의 철거싸움을 그렸다. 한켠에선 생존권과 주거권을 요구하며 용역깡패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학비 때문에 단가가 높은 철거반일을 선택한 젊은이가 대치상태에 있고, 또 한켠에선 ‘대한민국’을 외치며 거리를 점령한 붉은 물결의 시민 떼거리들이 있다. 각자의 선택에 따른 자리이지만, 어떤 선택이냐는 삶의 자리까지 바꿔놓을 만큼 역동적/혁명적이다.

부족민들에게 시간개념을 숨기면서 제사장의 권력을 유지하는 <솔잎>과 행복한 사회를 위해 영웅적인 사람의 지배를 원하는 무지몽매한 국민들을 조롱한 <리바이던>은 파시즘적 사회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영웅적인 지배자를 컴퓨터로 형상한 게 인상적이다.

설마 요즘에도 만화를 얕잡아보는 이들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순정 아니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만 해대서 만화가 싫다는 사람들은 꼭 한번 이 만화를 보시라. 당신의 삶이, 우리의 삶이 여기에 있으니까.

사방팔방에 둘리와 그의 친구들이 살고 있다. 죽어라 사교육비 들여서 아이들 공부시켜 좋은 대학 보내면 뭐하나. 다 비정규직노동자가 될 터인데. 월드컵함성 이면에 제 집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절규가 있는데, 이를 모르는 것 또한 폭력이다. 사회의 그늘진 모습-진짜 현실에 눈감고, 함성의 붉은 물결을 선택하는 것, 물건 싸고 좋다며 이랜드계열사 제품을 선택하는 것, 이 모두가 다 내재적 파시즘을 동반한 폭력이다.


여섯 편의 단편만화들을 읽는 내내 선택과 폭력의 문제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시대와 정직하게 호흡하고 있는 만화가 최규석을 주목하면서, 그의 또 다른 작품 『습지생태보고서』도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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