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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후두둑 Dear 그림책
전미화 지음 / 사계절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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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분의 그림책은 명랑유쾌한 그림체와 간결하면서도 힘있는 글로, 오래 두고 보며 생각하게 하는 마력이 있어요. 한번쯤 경험했던 비 오는 날 낭패를 이렇게 시원하게 표현해줬네요. 어느 한 날의 무거움이 싹, 씻겨나가는 통쾌함까지. 비가 와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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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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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다’에서 ‘노동자’로, ‘해고자’로

삶의 굽이굽이에서 온 몸으로 기록한 노동자의 삶

“일은 할만 하니?” 휴대폰단말기를 하청 받아 만드는 공장에 취업한 후배에게 묻자 긴 한숨부터 토해냈다. 아침 8시30분부터 저녁7시30분까지 11시간을 꼬박 서서 일한다. 오전, 오후 각 10분씩 정해진 휴게시간과 식사시간 40분만이 유일하게 앉을 수 있는 시간이다. 컨베이어 벨트작업이라 단 한순간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 곳. 화장실이 급해도 10분간의 휴게시간까지 참아야 한다. 200명 남짓한 여성노동자들 사업장, 그 많은 인원이 10분 동안 화장실을 가야 하니, 그야말로 전쟁 통이다. 식당 의자에 앉을라치면 무릎 관절에서 뚝. 뚝. 소리가 나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오고, 후루룩 밥을 먹었는지 마셨는지 모르게 해치우고나면 다시 컨베이어 벨트에 서야 한다.  

이렇게 꼬박 주 6일 일해서 받는 월급 66만원, 최저임금도 안 된다. 2008년 4월의 일이다. 첫 월급 탔다며 밥 사주겠다는 데, 자꾸만 목이 멨다. 부대찌개의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후배의 마음 같아서, 선뜻 숟가락질을 할 수 없었다. 새벽녘에 출근해야 하는 후배는 그 좋아하던 술자리도 서둘러 파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며칠 뒤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님이 쓴 『소금꽃나무』를 읽었다. 이 땅 노동자로 살아가고자 했던 그녀의 이력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7~80년대 노동자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던 엄혹했던 시절, ‘공돌이’ ‘공순이’로 살아야 했던 그녀의 한 시절이 무섭고 또 가여워서, ‘노동자’란 말에 담겨 있는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실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게 더 겁나서 읽는 내내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 책은 노동운동가로 살아온 김진숙의 삶의 기록이자 내 후배 같은, 이 땅 일하는 사람들의 실상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처음 책을 보면서 우리의 노동현실을 기록한 책치고는 제목이 참 예쁘다, 했다. 사실 이 책을 가슴으로 읽게 하는 데는 그녀의 문장력도 한 몫 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체득한 언어는 문필가의 문장보다 생동감 있고, 일하는 사람들을 향한 애정은 한없이 따스하다. 그래도 그렇지, 눈꽃나무는 들어봤어도 소금꽃나무라니.

잎사귀도 없이 꽃만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아침 조회 시간에 사람들이 ‘나래비’를 죽 서 있으면 그들의 등짝엔
허연 소금꽃이 만개하곤 했다.
내 뒤에 선 누군가는 내 등짝을 또 그렇게 보며
“ ‘화이바’ 똑바로 써라. 안전화 끄내끼 단디 매라. 작업복 단추 매매 채아라.”
그 지엄하신 훈시를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을 게다.
이른 봄 피어나기 시작해서 늦가을이 되어서야 서러이 지는 꽃.(7쪽 책을 내며)

선박 용접공들의 등짝에 하얗게 피는 소금꽃. 나도 매일 그 꽃을 본다. 찜통같은 더위와 싸우며, 시멘트가루 먹어가며 건설현장 일용노동자로 일하는 남편의 등짝에서. 땀띠로 울긋불긋 수놓아진, 더러는 짓물러서 붉은 꽃 무덤이 되는, 국어사전에도 없는 그 꽃을. 꽃이라고 모두 아름답기만 한가. 

김진숙을 처음 본 것은 2003년 3월14일 창원 시청 앞 두산중공업 해고노동자였던 배달호열사의 노제였다. 22년 동안 일한 곳에서 단지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평생 벌어도 갚을 수 없는 가압류와 노조활동 중단을 요구하는 회사의 압박에 분신으로 저항하였던 사람이었다. 창원 하늘이 쩌렁쩌렁 갈라지도록 울려 퍼지는 분노와 슬픔이 묻어있는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50년 그 긴긴 세월 그 몸뚱아리 하나로 살았으면서도, 기름기 흐르게 먹여 본 적도, 늘어지게 쉬게 한 적도, 한 번 잘 해 준 적도 없으면서 그 몸뚱아리를 그에 횃불로 밝혔던, 그를 아십니까? 이 세상에서 입어보는 가장 비싼 옷이 수의가 된 지지리도 못난 사내, 그를 아십니까? (133쪽)

그 해 10월 한진중공업 35미터의 크레인 위에서 129일을 버티다 재벌의 노동자 탄압에 죽음으로 항거했던 김주익열사의 주검 앞에서 ‘전태일과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에 치떨면서 피눈물로 추모사를 낭독했다.

동지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꽁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 그냥 물 말아서 먹고, 불똥 맞아 타들어간 작업복, 테이프 덕지덕지 넝마처럼 기워 입고, 체감온도 영하 수십도 한겨울에도 고양이 세수해 가며,,, 그냥 그렇게 살 걸 그랬습니다.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 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 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둥둥 불어 죽어도, 인명은 제천이라던데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살 걸 그랬나봅니다...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입니까? 어쩌자고 그렇게 착하고, 어쩌자고 그렇게 우직했단 말입니까? (120~121쪽)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저토록 절절하게 추모사를 띄워 하늘길 가는 사람 잡고, 그 길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 눈물콧물 다 짜며 꺼이꺼이 울게 할까?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조선소의 유일한 처녀용접사로 일하다가 노동조합 활동 때문에 해고되고, 20년이 넘도록 해고자이자 노동운동가로 살아온 사람.’ 책에 요약된 김진숙의 이력은 이렇다. 어찌 이 한 문장으로 삶의 굵은 주름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책 맨 마지막에 실린 「항소이유서」에는 열여덟 살 나이에 공장생활을 시작해서 ‘시다’ ‘공순이’ ‘버스안내양’에서 ‘노동자’로, 그리고 해고자로 살아온 결코 간단치 않은 삶이 기록돼 있다.

버스 문짝에 대롱대롱 매달리듯 살아온 청춘의 시간들. 그저 남자들이 하는 일이니 돈을 더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1981년 한진중공업 용접공이 된 사람이었다.

한쪽 어깨엔 40킬로그램짜리 홀더를 메고, 또 한쪽 어깨엔 작업 공구통을 메고 저 높은 배 위를 아슬아슬한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을까...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만 듯이 넘어지는 철판에 깔리는 사고를 당하고 그 사고로 지금도 오른쪽 발목이 온전치를 못합니다. 그때 병원에 문병을 오셨던 동료 분들이 그러시더군요. “기름밥 묵기가 쉬분 줄 아나. 그래야 옳은 땜쟁이가 되는 기다. 3년 넘은 사람 중에 빙신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다.”(258쪽)   

그렇게 옳은 땜쟁이가 되어 갔고, 그렇게 서러운 기름밥 그릇수가 쌓여 갔던 시절. 아침 출근 타각기를 찍을 때 내가 무사히 살아서 저녁 퇴근 타각기를 찍을 수 있을까 두려울 뿐이었고, 저녁 퇴근 타각기를 찍을 때면 오늘도 살아 냈구나, 안도하는 그런 생활들의 연속이었다. 괴물 같은 철판 앞에서 하루 살고, 또 내일을 걱정하는 게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그때 제가 일하던 배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작업 중이던 갑판 위에서 동료 한 분이 수십 미터 바닥으로 떨어져 뇌가 수박처럼 쪼개져 즉사했습니다...관리자들이 찾아오고,,,바람도 많이 불고 몹시 춥고, 그래서 바람막이 하나 없는 바다 위 갑판 작업은 무리였다는 얘기는 하나도 없고 그저 그들이 작성해 온 문구는, 사고자가 옷을 너무 많이 껴입어, 행동이 둔해서 추락한 걸로 적혀 있고, 거기에 지장만 찍으라더군요...1년에도 수차례 일어나는 동료들의 주검 앞에 그런 보고서가 작성되었을 거고, 제가 그렇게 죽어도 저런 보고서가 작성되려니 생각하니 그저 남의 일일 수만은 없었습니다.(259쪽)

‘유가족에게 보상이라도 제대로 받게 해드리겠다’는 심정으로 한진중공업 입사 5년 차에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어용노조이어서 진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노조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싸웠으나 그 결과는 해고였다. 86년 7월14일, 최초의 여성용접공이라고, 일 잘 한다며 자랑하던 회사에서 단지 노동자 권리를 말했다는 이유로 자른 것이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아직도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다. 

하늘거리는 원피스차림으로 봄나들이 한 번 못 해 본 청춘이었기에, 빨갱이로 찍혀 대공분실로, 감옥으로 끌려가 죽을 것만 같은 공포를 숱하게 견디며 살아왔기에, 또 기막힌 가족사를 어찌 다 감내했을까, 숙연해진다.

삶의 굽이굽이 모진 길이었지만, 언제나 치열하게 일하고 싸우는 노동자들과 함께 있었다. ‘거북선을 만드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현장노동자들의 진솔한 삶을 보았고,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을 이루고자 죽음으로 저항했던 숱한 주검들 앞에서 피눈물로 추모사를 낭독했다. 동료를 가슴에 묻고, 새로운 동료들을 거리에서 만나면서 살아온 지 20년, 그녀는 우리의 노동현실을 발바닥 굳은살로 기록했다.

하여 이 책 어느 페이지를 펼치건, 한 달 사이 핏기를 잃은 후배가, 천 일 넘게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그 안에 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목숨을 걸고 싸웠던 지난 시절의 분노가 2008년에서도 여전히 똑같은 상황으로 읽혀지고 있다.

기륭전자 1000일, KTX 승무원 800일, 뉴코아 330일, 이랜드 330일, 재능학습지 150일, 해고 위협 없이 일하고 싶다고, 최저임금에서 10만원만 더 받겠다고, 정규직과 차별 없이 일하고 싶다고 울부짖던 시간들이다.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한 그 처절한 시간 동안, 이들은 1인 시위, 점거투쟁, 단식투쟁, 삼보일배, 삭발투쟁,,, 그야말로 죽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게다가 7월부터 비정규직법이 개악돼 시행되면서 그야말로 ‘비정규직 바다’를 이루고 있다. 

구조조정의 끝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 자본이 해야 할 말을 같은 노동자가 하게 되는 이 기가 막히는 상황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본질일 것입니다...철도, 이랜드, 롯데호텔, 한국항공우주산업, 부산은행 등 정규직이 연대한 비정규직 싸움은 다 승리했고, 그 승리는 정규직의 고용까지 담보했지만, 비정규직들끼리만 싸웠던 한국통신,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은 다 패배해 결국은 정규직도 구조조정의 칼날 앞에 내몰려야 했습니다. 평등해야 강해진다 했습니다.(155쪽)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같은 정규직노동자로부터 차별받는 현실에서, 그녀는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라며 정규직노동자들의 각성을 핏대 세워 외쳐왔다.

연대를 말하려거든 100일째 펄럭이는 천막엘 가보라. 우리들의 미래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몹시 궁금하거들랑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그들을 보라.(161쪽)

미싱만 잘 밟으면 되는 공순이가 그림 잘 그렸던 기억을 간직하는 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글 잘 쓰던 미경이가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라는 유서를 왼쪽 팔뚝에 새겨 넣고 고단한 삶을 정리하기까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가슴으로 아는 사람, 김진숙의 꿈은 오직 하나다. “노동자 스스로 자랑스러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다.”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이 참으로 잔인하다. 그래도 인간의 조직이 아름다울 때가 있지 않은가. 처음으로 ‘사는 것 같다’고 느끼게 해 준 동료들, ‘철의 노동자’를 ‘사랑은 아무나 하나’처럼 부르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하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몸이 함께 할 수 없으면 글로 함께 했던 가슴 따뜻한 노동자 김진숙.


부디 용접공으로 복직돼 내년 봄에는 하늘거리는 원피스 차림으로 봄나들이 나서는 멋진 사람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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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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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쓰기 시작했을 때 제가 갖고 있던 궁금증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루하루가 공포의 나날이고 전쟁이 진부한 일상이던 곳에서 거주하며, 이런 경험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 이런 경험을 단지 이미지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전쟁을 실제로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인상을 받았죠. 그렇지만 저는 우리, 그러니까 전쟁을 겪지 않아도 되고 안전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 오늘날의 미디어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저 전 세계적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보스니아내전이 한창이던 1993년, 1994년, 그리고 1995년 수도 사라예보에 있었던 수전 손택에게 ‘타인의 고통’은 절박한 주제였다. 전쟁의 참혹함은 TV나 사진 따위의 이미지들을 통해 전 세계 곳곳으로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전쟁은 하나의 이미지가 됐다. 그렇다면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평화운동을 고민할까, 아니면 복수를? 그도 아니면 너무나 참혹하여 고개를 돌려 버릴까?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며 한도의 한숨을 쉴까?

손택은 사라예보에서 살았던 경험을 토대로, 각종 이미지들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보면서 사람들은 왜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지 않는가, 집요하게 묻고 있다. 그녀는 방대한 전쟁자료와 관련 사진들을 분석하면서, 전쟁으로 빚어지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아프게 내리친다.

타인의 고통은 내게도 절박한 주제이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현안에 대해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전에 읽은 소설에서 네안데르탈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신기한 능력을 지녔다. 우리가 네안데르탈인일 수는 없을까?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던 때, 고 신효순, 심미선 학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했다. 월드컵에 쏠려있는 대중의 관심을 어떻게 하면 돌리고, 촛불집회에 동참하게 할까? 미군의 폭력을 고발하는 길거리 사진전시회를 열었다. 전시된 사진 속에는 잔혹하게 살해된 고 윤금이씨 사진이 포함돼 있었다. 국부에 우산이 꽂힌 채 죽은 그녀의 모습은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두 학생들의 죽은 현장 사진도 구토를 일으킬 정도로 끔찍했다. “자, 보십시오. 이것이 미군이 저지른 만행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에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정도로, 몇몇 사진들은 극도로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행동연대 활동가들은 잔혹한 사진을 전시하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일반 시민들에게 잔혹한 이미지들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폭력이라며 문제제기를 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충격요법을 사용한다. 충격적인 사진이나 자극적인 문구를 쓰는데 별 주저함이 없다. 문제의식을 느낀다 해도 지금 당장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잔혹한 이미지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할까,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보면서 “가슴 아프다”고 느낀다면, 그 연민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하루도 빠짐없이 전쟁, 기아 등으로 죽어가는 잔혹한 이미지들을 접한다. 이런 이미지들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떤 자각을 던져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전쟁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이다. 타인의 고통을 성찰할 기회가 수도 없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왜 도리어 사람들은 무관심하거나 무감각해지는 걸까?

한편으로는 잔혹한 이미지들에 익숙해지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불편하여 고개를 돌려버리는 거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설명이 곁들여진 사진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토록 잔인한 사진들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아니, 좀 더 솔직해보자. 끔찍한 이미지 속의 사람들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현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흔히 보는 전쟁의 참사,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사진 대부분은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비극이라고,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곳의 일이라고 믿는다.

손택은 오히려 잔혹한 이미지들은 사람들에게 관음증적 향락 - 즉,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에 빠져, 타인의 고통이 나와는 무관하다고 인식하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게다가 이러한 이미지들은 무력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 고통이 엄청나게 광범위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개입한다 해도 얼마나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라는 무력감 말이다.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되기” 때문에 “전쟁사진을 통해 동정심, 연민, 분개 등의 감정을 착취하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쟁점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폭력과 잔혹한 이미지들이 스펙터클하게 소비되는 사회에서 도리어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우리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겠지만, 이것이 연민으로 그친다면 스스로의 무고함을 증명해주는 알리바이가 되어 버린다. 손택은 중요한 지점을 지적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결국 타인의 고통이 나와, 우리와 연결돼 있음을 자각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회복하는 길이다. 이때 ‘우리’라는 말은 책임감을 내포한다. 그래서 손택은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어쭙잖은 연민의 본질을 정확히 보라는 손택의 통찰은 읽는 내내 내 양심을 콕콕 찔러댔다. 잃어버린 대중의 공감능력을 깨우기 위해 자극적인 것들에(이미지 등) 쉽게 현혹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2007.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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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7-12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동감합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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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쟁은 그 참혹함을 알려주는 수, 가령 사상자 숫자 등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출구가 없는 곳에서도 두려움과 공포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즉, 어찌되었든 자기 땅에 붙박인 삶이 있다. 여기에서 삶이란 조건이 제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살아지게 만드는 ‘힘’들을 내포한 복잡한 단어이다. 죽음의 이면에 생명이 있고, 고통의 이면에 아름다운 추억이 있고, 그래서 비참한 조건 속에서도 살아가는 ‘목숨’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전쟁상태가 너무나 참혹하여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러한 끔찍함은  그곳에 살고 있는 생명에 대한 절박한 이해를 가로막기도 한다. 상상으로조차도 견뎌내기 힘든 끔찍한 공포와 절망 속에서 처연하게 생명의 불씨를 지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무엇이 그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생각했다.


할레드 호세이니는 『연을 쫓는 아이』에 이어 두 번째 소설 『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발표했다. 이번 소설은 전쟁의 포탄이 멈추지 않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굴곡의 역사를 온 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프가니스탄은 2001년 9`11 이후 미국의 폭격이 무차별적으로 가해졌던 곳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케도니아인들, 서산 왕조의 사람들, 아랍인들, 몽골인들, 그리고 1979년 소련인들의 침공에 이르기까지 숱한 외부의 침략을 받았다. 또한 군벌들 간의 내전으로 땅과 사람들 모두 피폐해졌다. 여기에 이슬람근본주의를 따르는 탈레반이 정권을 잡으면서 여성의 인권은 심각하게 박탈당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교육이 전면 금지되었고, 남자의 동행 없이는 혼자 외출도 못하고, 외출할 때는 온 몸을 감싼 부르카를 입어야만 한다.

소설은 인간의 존엄 자체를 위협하는 뿌리 깊은 전쟁과 가난, 그로 말미암아 제한된 삶의 테두리 안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여기에 작용하는 불합리한 정책과 관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두 여성이 있다. 엄마한테 ‘하라미’(사생아를 비하하여 일컫는 말)라는 욕설을 들으면서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겨야만 했던 마리암과 꿈 많고 아름답고 영리했으나 전쟁으로 말라비틀어진 나무껍질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라일라. 여성의 인권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묘한 관계를 넘어서 서로의 삶을 구원하는 두 여성의 찬란한 우정이 이 소설에 있다.

마리암은 부잣집 아버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오두막집에서 엄마랑 단둘이 살고 있다. 마리암은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아버지 잘릴 한을 만나는 것이 제일 즐겁다. 또 코란과 읽기를 가르쳐주는 파이줄라선생은 언제나 든든한 친구다. 열여섯살 때 마리암은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의 집을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다. 그 일로 엄마는 자살하고, 마리암은 아버지에 대한 깊은 배신을 간직한 채 40대의 늙은 신랑한테 강제로 시집을 간다. 남편은 여성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리암에게 온갖 폭력을 일삼는다.

라일라는 지뢰로 한쪽 다리를 잃은 옆집 남자친구 타리크를 좋아하는 해맑은 소녀로, 부모는 이슬람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여성의 사회참여를 지지한다. 그러나 내전과 미국의 침공으로 가족을 잃고, 타리크마저 떠나면서 혼자된다. 타리크와의 사랑에서 얻은 아이를 위해 열네살의 라일라는 이웃집 늙은 남자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마리암의 남편이다.

마리암과 라일라의 만남은 불편한 동거로 시작된다. 서로 시기했으나 남편의 끔찍한 폭력 앞에서, 라일라가 낳은 아이들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면서 여성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낀다. 남자의 폭력을 서로 막아주고, 아이를 함께 키우면서 ‘어머니’로서의 모성을 공유하고, 우정을 쌓아간다. 포탄이 빗발치고, 남편의 폭력이 하루도 거르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의 우정은 두 사람에게 삶의 구원이자 희망이다.

결국 마리암은 남편의 폭력으로 죽어가는 라일라와 그녀의 아이들을 위해, 라일라에게 여자로서의 행복한 삶을 주기 위해 남편을 죽이고, 사형을 당한다.

그녀는 잡초였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이자 벗이자 보호자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어머니가 되어, 드디어 중요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마리암은 이렇게 죽는 것이 그리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505쪽)

라일라는 첫사랑 타리크와 재회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한편,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본다. 마리암의 희생이 가벼워지지 않기 위해서, “커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여성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이 헛되지 않도록, 라일라는 미래의 아프가니스탄을 끌어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본다. 마리암이 보여준 가없는 사랑을.

그들이 카불에 처음 왔을 때, 라일라는 텔레반이 마리암을 어디에 묻었는지 몰라 괴로워했다. 그녀는 마리암의 무덤에 찾아가 머물다가 한두 송이의 꽃을 놓고 왔으면 싶었다. 그러나 라일라는 이제 그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마리암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그녀는 이곳에 있다. 그들이 새로 칠한 벽, 그들이 심은 나무, 아이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담요, 그들의 베개와 책과 연필 속에 그녀가 있다. 그녀는 아이들의 웃음 속에 있다. 그녀는 아지자가 암송한 시편, 아지자가 서쪽을 향하여 절하면서 중얼거리는 기도 속에 있다. 하지만 마리암은 대부분, 라일라의 마음속에 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천 개의 태양의 눈부신 광채로 빛나고 있다.  (562쪽)

자칫 통속적일 수 있는 내용을 진한 감동으로 바꿔놓은 것은 소설 중반부터 전개되는 두 여성간의 우정이었다. 마리암이 난생 처음으로 라일라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는 장면에선 코끝이 찡했다. 매일 밤 마당에서 차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성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내내 가슴이 뛰었던 것은 어떠한 폭력에 의해서도 누추해질 수 없는 목숨, 마리암과 라일라의 우정과 사랑 때문이었다.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닌지라 읽는 내내 가슴 아팠고, 여운은 오래갔다.

이 책의 제목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사이브에타 브리지 시인이 17세기에 썼던 시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 벽 뒤에 숨은 천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다네.’의 한 구절이다. 

골목에서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의 웃음소리,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두막까지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준 늙은 스승의 마음, 온 몸까지 물들였던 아름다운 석양, 아이들 그리고 사랑. 약자로서의 여성들 간의 우정. 일상에 깃든 소소한 감정과 추억은 어떤 비참함에도 사람을 웃게 하고,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거기에 천개의 찬란한 태양이 있고, ‘부서지고 쳐다봐야 아름다울 것도 없건만, 아직 저렇게 서 있는 벽처럼’ 사람들이 산다는 것을 이 소설은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소설을 온전하게 읽어내는 데 걸림돌이 된 것은 곳곳에서 묻어나는 미국적 시각이다. 작가가 미국에서 살기 때문일까. 9․11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 파벌들 간의 내전 그 이면에 있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순전히 ‘안의 사정’으로만 설명하는 부분에선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다.

소설은 현실에서 계속 되고 있다. 11살의 어린 소녀가 가난 때문에 40대의 남자에게 시집가고, 여성들에게 교육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순식간에 포탄이 날아들고, 남편에게 매질을 당한다. 삶의 폭압을 감당해야 하는 여성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천개의 태양이 모든 여성의 슬픔 위로 찬란하게 빛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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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무엇을 먹고 있는가? - 현대인의 식탁을 성찰하다

“오늘 저녁 무엇을 먹을까?”
환경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폴란은 어느날 문득 생각해 본다. 식탁 위에 올라온 이 음식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음식의 기원이 궁금해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음식의 기원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이 책은 저자인 마이클 폴란이 간단한 듯 보이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을 담고 있다. 생각보다 이 질문은 간단치가 않다. 저자는 500페이지가 훨씬 넘는 긴 분량으로 답을 하고 있다. 

인간은 육식과 초식을 병행하는 잡식동물이다. 오랜 전 인류는 잡식동물로서 큰 딜레마를 겪었다. 이 버섯은 먹어도 될까? 죽지는 않을까? 목숨을 위협하는 음식인지, 아닌지에 대한 공포가 잡식동물로서의 원초적인 딜레마였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인류는 이 딜레마를 극복했고, 지금 우리의 유전자 속에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안전한 음식에 대한 정보가 각인돼 있다.

그러나 잡식동물로서의 인간의 딜레마는 끝나지 않았다. 저자는 오히려 음식의 산업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이 딜레마가 더 심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시작된 음식사슬의 산업혁명에 주목하고 있다. 농업이 산업화되면서 태양에너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음식사슬에서 벗어나 화석연료로부터 대부분의 에너지를 제공받는 음식사슬이 생겨났다. 원래 풀을 먹었던 소가 이제는 가공된 옥수수사료를 먹는다. 계란을 생산하는 산란계도, 심지어 연어도 옥수수사료로 양식된다. 그 결과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음식에너지의 양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런데 이것이 축복일까?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라는 질문 속에는 단순히 어떤 메뉴를 선택할 것인가를 넘어선 문제의식이 있다. 유전자변형 식품인지, 트랜스지방이 포함돼 있는지, 광우병 같은 위험한 질병요소가 있는지, 저지방식품인지, 등등 우리는 우리의 몸에 안전한 식품을 꼼꼼히 따져본다. 풍부한 음식은 오히려 우리에게 온갖 걱정거리들을 던져주고 있으며, 여기에서 우리는 잡식동물로서의 또 다른 딜레마에 부딪치고 만다.

이 책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유지키시고 있는 주요 음식사슬, 산업적, 전원적(유기적), 수렵․ 채집 음식사슬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저자는 직접 체험하면서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과 인간과 자연의 교류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까지 아낌없이 던지면서, 책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준다. 글은 연대기적 순서와는 반대로 산업적 음식사슬에서 시작한다. 그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생활과 가장 큰 관련을 맺고 있고, 또 우리가 가장 크게 염려하는 음식사슬이기 때문이다.

제 1부는 산업적 음식사슬-옥수수에 관한 것으로, 효용과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시스템에 편입된 음식사슬을 고발하고 있다. 효율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은 단순화이며, 농업에선 곧 단일재배를 의미한다. 산업적 음식사슬의 주된 특징은 바로 이 단일재배이다. 저자는 특별히 옥수수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저자는 식탁에 올라온 각각의 음식의 기원을 찾아 나서면서 걱정이 앞섰다. 저 많은 음식의 기원을 어떻게 다 찾을 수 있을까? 그런데 대부분의 음식이 한 곳에서 출발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옥수수였다. 옥수수사료로 사육된 소고기, 생선들, 음료수의 당분도 옥수수에서 추출되고 있다. 어느새 옥수수는 산업적 음식사슬의 근간이 되었다.

저자는 산업적 음식사슬의 골간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아이오와주의 옥수수단일재배농장에서 일을 하고, 소를 사서 그 소가 사육되고 도살되는 전 과정을 추적한다. 그 길에서 저자는 산업화된 옥수수 농장, 수용소 같은 공장형 사육농장, 그리고 맥도날드 햄버거를 만난다. 풀이건 가축이건 생명체로서의 본성까지 거세당한 채 단백질, 탄수화물을 생산하는 기계로, 항생제덩어리로 둔갑해 버리는 무서운 현실과 직면한다. 식탁에 올라오기까지의 전 과정이 불투명한 음식사슬에서,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눈여겨볼만한 점은 산업적 음식사슬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집단이 바로 국가와 군산복합체란 사실이다. 옥수수가 산업적 음식사슬의 근간이 된 것은 1947년 앨라배마에 있는 군수품 공장이 화학비료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정부는 폭발물을 만드는 주요 성분인 질산암모늄이 엄청나게 남아돈다는 사실을 알았고, 질산암모늄을 비료로 만들어 농지에 뿌리도록 했다. 그 결과 농업의 산업화가 가속화됐고, 정부는 효율이란 명목 아래 옥수수단일재배를 미국 전역으로 퍼트렸다. 이제 농부들은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사용했다. 살충제를 만드는 다우나 몬산토 같은 기업은 네이팜탄과 고엽제를 만들었던 군산업체였다.

제2부 전원적(유기적) 음식사슬-풀에서는 산업적 유기농식품과 로컬푸드 농장인 버지니아의 폴리페이스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유기농산업에 대해 고찰한다.
슈퍼마켓에 진열돼 있는 유기농 매장의 식품들은 무농약일 뿐, 산업적 음식사슬에 엮여 있다는 점에선 엄밀하게 유기농이라 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는 산업적 유기농과 초유기농을 구분하고, 대안적 사회시스템을 고민한다. 그 고리를 유기농에서 찾고 있다. 원래 유기농은 단순히 농업방식의 문제를 뛰어넘어, 대안적 생산방식(화학물질 없는 농장)과 대안적 유통시스템(반자본주의적 식품협동조합), 대안적인 소비방식(대안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초유기농업자들은 바코드가 필요 없는 지역경제(로컬푸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음식 시스템의 개혁은 사람들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자신이 알고 있는 농부로부터 직접 음식을 구입하면서 시작된다. 바코드가 필요 없다. 그들은 이것을 ‘관계 마케팅’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가능할까? 먹거리와 떨어져 있는 대도시사람들에게 ‘관계 마케팅’은 너무나도 목가적인 전망일지 모른다. 하지만 초유기농업자들은 도시의 고객들이 미리 돈을 지불하고 대신에 농산물을 배송 받는 ‘공동체지원농업’ 등을 제안한다.

로컬푸드는 자연과 환경을 복원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반자본주의적 시스템을 선택하는 정치적 행위일 수 있다. 또한 세계화에 대한 저항일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꺼리를 던져준다. 

제3부 수렵․채집음식사슬- 숲에서는 저자가 직접 돼지사냥과 버섯 채집을 하면서 먹는 행위에 대한 생태학과 윤리학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저자는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육식이 인간의 오래된 본능이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저자는 직접 돼지를 사냥하면서 느끼는 원초적 감정들에 대해 생각한다. 또한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면서, 저자는 먹는 행위와 죽이는 행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교류의 방식에 대해 도덕적, 윤리적 사유를 한다.

저자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한쪽에는 애정이, 다른 한쪽에는 야만이 존재하는 정신분열적 성격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정신분열증을 겪지 않는 것은 돼지의 삶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우리는 고기를 농장이 아닌 식료품점에서 얻기 때문이다. 열두 개에 79센트 하는 계란을 생산하기 위해서 산란계들은 수용소 같은 공장형 농장에 갇히고, 부리도 잘린다. 우리는 가축가공의 산업화, 혹은 야만성을 보지 않거나, 외면한다.

어떻게 인간성을 회복할 것인가? 저자는 동물의 권리보다는 동물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한때 인간은 자신이 죽인 동물을 응시하고, 그 동물을 경회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그 동물의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목소리는 우리의 먹는 행위가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여럿이 함께 오랫동안 여유로운 식사를 하는 프랑스인의 음식문화와 빠른 시간 내 혼자서도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인의 식문화를 비교하면서, 이처럼 불안정한 식습관이 식품마케팅의 번성을 불러온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산업적 음식문화의 핵심인 패스트푸드문화에 대해 중요한 부분을 지적한다. “패스트푸드의 가격은 겉으로는 싼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확한 비용은 숨겨져 있다. 이 비용은 자연이나 공중보건, 공적 자금, 그리고 미래가 부담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다소 지루했지만 갈수록 재미를 붙였던 책이다. 우리의 식문화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산업적 음식사슬에 엮여 있는 우리에게 저자의 목소리는 올곧은 진실일 수밖에 없다. 직접 음식사슬의 실체를 찾아서 체험하고, 농부들과 친분을 맺고, 사냥하면서 느끼는 쾌감까지도 솔직하게 쓰면서 저자는 우리에게 음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당부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 세계와의 교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는 행위는 농업행위이자 동시에 정치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오늘 당신의 식탁에 올라온 음식들 각각의 기원을 생각해보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시스템과 소비양식을 만날 것이다. 그 속에서 희생되고 있는 토양과 풀, 가축의 생명체를, 그리고 잃어버린 인간성을. 식품마켓팅을 밀쳐내고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한 주도권을 가져보자. 산업적으로 생산되어 슈퍼마켓 매장에 진열돼 있는 산업식품을 거부하고, 다른 음식을 선택하는 것, 이런 결정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적어도 하나의 시작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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