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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전쟁은 그 참혹함을 알려주는 수, 가령 사상자 숫자 등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출구가 없는 곳에서도 두려움과 공포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즉, 어찌되었든 자기 땅에 붙박인 삶이 있다. 여기에서 삶이란 조건이 제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살아지게 만드는 ‘힘’들을 내포한 복잡한 단어이다. 죽음의 이면에 생명이 있고, 고통의 이면에 아름다운 추억이 있고, 그래서 비참한 조건 속에서도 살아가는 ‘목숨’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전쟁상태가 너무나 참혹하여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러한 끔찍함은 그곳에 살고 있는 생명에 대한 절박한 이해를 가로막기도 한다. 상상으로조차도 견뎌내기 힘든 끔찍한 공포와 절망 속에서 처연하게 생명의 불씨를 지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무엇이 그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생각했다.
할레드 호세이니는 『연을 쫓는 아이』에 이어 두 번째 소설 『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발표했다. 이번 소설은 전쟁의 포탄이 멈추지 않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굴곡의 역사를 온 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프가니스탄은 2001년 9`11 이후 미국의 폭격이 무차별적으로 가해졌던 곳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케도니아인들, 서산 왕조의 사람들, 아랍인들, 몽골인들, 그리고 1979년 소련인들의 침공에 이르기까지 숱한 외부의 침략을 받았다. 또한 군벌들 간의 내전으로 땅과 사람들 모두 피폐해졌다. 여기에 이슬람근본주의를 따르는 탈레반이 정권을 잡으면서 여성의 인권은 심각하게 박탈당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교육이 전면 금지되었고, 남자의 동행 없이는 혼자 외출도 못하고, 외출할 때는 온 몸을 감싼 부르카를 입어야만 한다.
소설은 인간의 존엄 자체를 위협하는 뿌리 깊은 전쟁과 가난, 그로 말미암아 제한된 삶의 테두리 안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여기에 작용하는 불합리한 정책과 관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두 여성이 있다. 엄마한테 ‘하라미’(사생아를 비하하여 일컫는 말)라는 욕설을 들으면서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겨야만 했던 마리암과 꿈 많고 아름답고 영리했으나 전쟁으로 말라비틀어진 나무껍질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라일라. 여성의 인권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묘한 관계를 넘어서 서로의 삶을 구원하는 두 여성의 찬란한 우정이 이 소설에 있다.
마리암은 부잣집 아버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오두막집에서 엄마랑 단둘이 살고 있다. 마리암은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아버지 잘릴 한을 만나는 것이 제일 즐겁다. 또 코란과 읽기를 가르쳐주는 파이줄라선생은 언제나 든든한 친구다. 열여섯살 때 마리암은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의 집을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다. 그 일로 엄마는 자살하고, 마리암은 아버지에 대한 깊은 배신을 간직한 채 40대의 늙은 신랑한테 강제로 시집을 간다. 남편은 여성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리암에게 온갖 폭력을 일삼는다.
라일라는 지뢰로 한쪽 다리를 잃은 옆집 남자친구 타리크를 좋아하는 해맑은 소녀로, 부모는 이슬람근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여성의 사회참여를 지지한다. 그러나 내전과 미국의 침공으로 가족을 잃고, 타리크마저 떠나면서 혼자된다. 타리크와의 사랑에서 얻은 아이를 위해 열네살의 라일라는 이웃집 늙은 남자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마리암의 남편이다.
마리암과 라일라의 만남은 불편한 동거로 시작된다. 서로 시기했으나 남편의 끔찍한 폭력 앞에서, 라일라가 낳은 아이들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면서 여성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낀다. 남자의 폭력을 서로 막아주고, 아이를 함께 키우면서 ‘어머니’로서의 모성을 공유하고, 우정을 쌓아간다. 포탄이 빗발치고, 남편의 폭력이 하루도 거르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의 우정은 두 사람에게 삶의 구원이자 희망이다.
결국 마리암은 남편의 폭력으로 죽어가는 라일라와 그녀의 아이들을 위해, 라일라에게 여자로서의 행복한 삶을 주기 위해 남편을 죽이고, 사형을 당한다.
그녀는 잡초였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이자 벗이자 보호자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어머니가 되어, 드디어 중요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마리암은 이렇게 죽는 것이 그리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505쪽)
라일라는 첫사랑 타리크와 재회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한편,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본다. 마리암의 희생이 가벼워지지 않기 위해서, “커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여성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이 헛되지 않도록, 라일라는 미래의 아프가니스탄을 끌어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본다. 마리암이 보여준 가없는 사랑을.
그들이 카불에 처음 왔을 때, 라일라는 텔레반이 마리암을 어디에 묻었는지 몰라 괴로워했다. 그녀는 마리암의 무덤에 찾아가 머물다가 한두 송이의 꽃을 놓고 왔으면 싶었다. 그러나 라일라는 이제 그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마리암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그녀는 이곳에 있다. 그들이 새로 칠한 벽, 그들이 심은 나무, 아이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담요, 그들의 베개와 책과 연필 속에 그녀가 있다. 그녀는 아이들의 웃음 속에 있다. 그녀는 아지자가 암송한 시편, 아지자가 서쪽을 향하여 절하면서 중얼거리는 기도 속에 있다. 하지만 마리암은 대부분, 라일라의 마음속에 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천 개의 태양의 눈부신 광채로 빛나고 있다. (562쪽)
자칫 통속적일 수 있는 내용을 진한 감동으로 바꿔놓은 것은 소설 중반부터 전개되는 두 여성간의 우정이었다. 마리암이 난생 처음으로 라일라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는 장면에선 코끝이 찡했다. 매일 밤 마당에서 차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성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내내 가슴이 뛰었던 것은 어떠한 폭력에 의해서도 누추해질 수 없는 목숨, 마리암과 라일라의 우정과 사랑 때문이었다.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닌지라 읽는 내내 가슴 아팠고, 여운은 오래갔다.
이 책의 제목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사이브에타 브리지 시인이 17세기에 썼던 시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 벽 뒤에 숨은 천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다네.’의 한 구절이다.
골목에서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의 웃음소리,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두막까지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준 늙은 스승의 마음, 온 몸까지 물들였던 아름다운 석양, 아이들 그리고 사랑. 약자로서의 여성들 간의 우정. 일상에 깃든 소소한 감정과 추억은 어떤 비참함에도 사람을 웃게 하고,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거기에 천개의 찬란한 태양이 있고, ‘부서지고 쳐다봐야 아름다울 것도 없건만, 아직 저렇게 서 있는 벽처럼’ 사람들이 산다는 것을 이 소설은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소설을 온전하게 읽어내는 데 걸림돌이 된 것은 곳곳에서 묻어나는 미국적 시각이다. 작가가 미국에서 살기 때문일까. 9․11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 파벌들 간의 내전 그 이면에 있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순전히 ‘안의 사정’으로만 설명하는 부분에선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다.
소설은 현실에서 계속 되고 있다. 11살의 어린 소녀가 가난 때문에 40대의 남자에게 시집가고, 여성들에게 교육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순식간에 포탄이 날아들고, 남편에게 매질을 당한다. 삶의 폭압을 감당해야 하는 여성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천개의 태양이 모든 여성의 슬픔 위로 찬란하게 빛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