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장난 - 유병재 삼행시집
유병재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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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재의 말장난이

 맛 삼행시 모음집인 줄 알았어요, 근데

 미에 웃음, 시사와 감동, 눈물까지 종합선물세트였어요

출판사인 아르테의 인스타에만 가봐도 하도 여러편이 소개되어 있어서 찾아보려고 하면 괜찮은 말장난을 거의 다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것저것 마음에 와닿는 n행시에 북마크를 붙이기 시작했는데 붙이다가 어, 이러다 전부 다 붙이겠는데 싶을 정도였다. 언젠가 지인이 자기 아들이 어휘력이 모자라서 걱정이라는 이야기 끝에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엄마는 자기 딸이 더하다며, 엄마와 아빠가 어떤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졸부'라는 단어를 썼더니 자식 앞에서 어떻게 졸부라는 단어를 쓸 수가 있느냐며 기가 막혀 하더란다. 졸부가 뭐 어때서 그러냐고 했더니 욕 아니냐고, '졸라 부자'의 줄임말이니까 욕 아니냐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을 졸부라고 하는거다, 하고 설명했더니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은 '갑부'고 졸부는 졸라 부자의 줄임말이라고 우겼다며 정말 큰일이라고 했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남의 집 얘기니 웃었다. 너무 말이 돼서 더 웃겼다. 참고로 유병재의 졸부는 '졸라 부자'가 아니고 '졸라 부러워'였다.

유병재의 '말장난'에는 너무 말이 되는 이런 n행시들이 참 많이 있었다. 어떤 글은 짠하고 어떤 글은 너무 찐이고, 또 어떤 글은 화도 나고, 또 어떤 글은 가슴이 철렁하기도 했다.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속뜻이 진짜 이런 뜻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진짜였다.

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한다.

유병재 <말장난> 오늘

거지만

면식 없음

유병재 <말장난> 내일

한건 너

디는 건 나

유병재 <말장난> 편견

장생활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사했지

유병재 <말장난> 직장

사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표 안 썼지

유병재 <말장난> 장사

언뜻 정말 말장난 같지만 세상살이 여기서든 저기서든, 누구나 다 힘든 법이라는 이야기를 가볍게 툭 던지듯 내놓은 것들 중에 와닿는 것들이 참 많았다. 건강검진이라는 단어에는 부모님 걱정이 담겨 있고, 직장생활과 장사, 개인사업자들의 마음이 단어 안에 들어 있다. 어줍잖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조언이랍시고 던지는 말들에 욱, 하기도 하고 하염없이 바쁘게 흐르는 시간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자기를 괴롭히는 자존심과 자기를 지키는 자존감에 대한 차이도 분명하다.

그리고 책 좋아하는 나에게 더 와닿았던 서점 2행시

서 숨만 쉬어도

점 기분 좋아져, 믿어봐.

유병재 <말장난> 서점

책의 뒷등으로도 웃기는 디자인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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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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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에 2~3편의 책을 꾸준히 낸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중에서 초반 특히 미스터리물들을 많이 읽었고 가지고 있는데 이번 <녹나무의 파수꾼>이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같은 작품들을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본성, 같은 걸 기대하는 작가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20대 초반의 별볼일없는 청년 레이토이다. 술집에서 일하던 엄마가 유부남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낳았고, 그래서 아버지는 본 적도 없으며 아침에는 술 냄새를 풍기며 자고 있고, 저녁이면 화장을 치덕치덕하고 출근준비를 하느라 추억할만한 것도 별로 없는 엄마마저도 일찌감치 죽어버린 뒤 할머니와 살았다. 자존감이라곤 없는데다 배운 것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 결국엔 절도죄로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간 전혀 존재를 몰랐던 치후네라는 이모가 나타나 그를 유치장에서 구해준다. 그녀는 레이토를 구해준 댓가로 자신의 가업 중 하나라는 '월향신사'라는 곳의 녹나무를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름이 5미터는 될법한 거목 안에는 밀초를 태우고 기도를 할 수 있는 장소가 꾸며져 있는데 낮에는 아무나 드나들 수 있지만 밤에는 오직 치후네를 통해서만 예약을 할 수 있고, 혼자여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들이 붙어 있었다. 무언가 영험한 힘을 지녔기에 '기념'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었지만 치후네도 기념을 하러 오는 사람들도 그 '기념'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무엇을 기념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레이토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치후네는 일을 하다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고 하고, 기념을 하러 오는 사람들도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도 치후네씨가 절대로 자세한 이야기는 레이토에게 하지 말라고 했다며 궁금증만 유발한 채 가버리곤 한다. 그러다 레이토는 기념을 하기 위해 온 사지씨를 뒤따라 온 딸 유미를 알게 되고, 유미에게 반한 레이토는 마침 자신도 그 기념이라는게 무엇인지 너무나도 궁금했기에 사지씨의 기념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유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말은 '소원을 100% 들어주는 신비한 나무의 이야기입니다. 옆 사람과 서로 마음을 열고 만나기를 빌어보는 것도 가능합니다'이다. 사실 세상에 소원을 100% 들어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작가의 말이 일본말이었기에 해석에 '들어준다'가 단순히 듣는다,인지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해준다, 인지는 알 수 없으나 100% '들어'줄 수는 있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소원이나 이야기도 100%는 못 들어 주기가 쉽다. 단 둘이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때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다른 생각하지 않고 그야말로 100% '듣는' 행위조차도 어렵다. 하지만 나무라면, 오랜 시간 인간의 삶보다 더 긴 시간을 한 자리에서 살아 온 나무라면 100% 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나무가 100% 들어준다는 것은 내 마음 속의 모든 감정들 그러니까 누군가에 대한 내 모든 감정, 혹은 나 자신에 대한 감정, 차마 입밖으로 내놓지 못했던 혹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그저 나무 안에 가만히 서서 밀초를 태우며 감정의 폭풍을 가슴 속에서, 머리 속에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무가 다 듣고 있는다면, 그래서 그걸 다 품고 있다가 그걸 받아들이고 싶은 그의 가까운 누군가가 가슴을 열고 또 밀초를 태우며 나무 안에 서있으면 그게 말이 아니라도, 소리가 아니라도, 글이 아니라도 그에게 고스란히 가슴으로 머리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면 작가의 말이 이해가 되는 것도 같다.

기념을 하기 위해 찾아 오는 사람들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미와 그의 아버지인 사지, 녹나무 파수꾼 자리를 제안한 치후네와 레이토,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의 가정사는 어찌보면 흔해빠진 신파일 수 있다. 지난 며칠 드라마 <스토브리그>를 보고 있는데 거기서 참 답답한 캐릭터로 나왔던 감독님의 대사 중에 사람이 모두 한가지 면만 있는 건 아니라는 대사가 있었다. 어느 한면이 두드러지게 보이다보면 우리는 다른 한면은 가볍게 외면하게 된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찾기 힘든 다른 한면을 힘이 들어도 찾아봐 주길 바라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 다른 한면은 이 작품 속의 녹나무처럼 영험한 힘을 가진 나무를 통해서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찾기 힘들 수도 있고, 또 이런 나무가 있다는 설정 자체가 판타지일 정도로 대부분은 인생을 통해 찾지 못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인생을 걸고 힘을 들여 찾기를, 찾아 보려고 노력하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미 지나가버린 인생에서의 회한들을 너무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지만 말고 털어내기를, 모든 것에 너무 늦은 시간이란 없다고 생각하고 남은 삶에는 후회를 남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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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크리스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스기타 히로미 그림,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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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히가시노 게이고 선생의 책이 너무 빨리빨리 나와서 전작이 힘들어 포기했다는 말을 쓰면서 거의 거미줄 뽑아내듯 작품을 뽑아낸다는 말도 쓴 적이 있는데 장편소설을 주로 쓰시던 분께서 이제 동화를 내셨다. 당연히 아주 짧고, 심지어 그림까지 들어 있어서 한 30분이면 완독이 가능하다. 마더 크리스마스라는 책 제목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와는 약간 다른 날씬하고 치마를 입은 모습을 한 산타클로스를 보고 엄마와 관련한 크리스마스인가보다, 하고 상상했었다.

왜 산타는 꼭 남성이어야 한다고 미리 정해놓고 생각할까요? p.40

전세계 산타클로스가 모여 산타회의를 하는 날이다. 산타는 피부색만 다를 뿐 다들 후덕한 몸매에 흰 눈썹과 수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더 이상 산타를 믿고 기다려주지 않는다며 꿈을 잃은 아이들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 날은 회장님이던 미국 지부 담당이 은퇴를 하는 날이고, 회장님은 부회장이었던 네덜란드 지부 산타를 회장으로 지명하고 자신의 후임을 소개하기로 한다. 모든 산타의 찬성을 얻어야만 산타가 될 수 있었는데 아프리카 지부의 산타는 자신이 피부색 때문에 후보로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로운 미국 지부의 산타 후보는 제시카라는 오동통한 여성이었다.

이번에 후보자를 선정하면서 나는 지금까지의 제약을 모조리 없애기로 했습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아프리카 산타의 입회 승인 회의 때였어요. 그를 지켜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내 후임자가 될 미국 산타에는 흑인도 대상에 넣어야겠다고요.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인간적인 자질 외에는 어떤 조건도 달지 않기로 했습니다. p.30

갑작스러운 여성 산타 후보의 등장에 다른 지역 산타들은 열띤 토론을 시작한다. 기본적인 산타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 기본적인 산타 이미지란 뭐냐, 빨간 옷에 흰 수염, 남자라는 이미지, 성 니콜라스, 문제가 되는 부성의 상징 등 저마다 각자의 의견에 열을 올렸고 심지어는 말다툼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제시카의 아름다운 노래소리에 정적이 되돌아오고, 그녀가 구워 온 쿠키와 차를 마시며 그들은 왜 제시카를 산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대화를 시작한다. 두 살 때 사고로 아빠를 잃은 토미가 엄마인 제시카를 산타로 추천했고, 제시카는 산타는 남자만 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토미는 화를 냈다.

엄마는 아빠 몫까지 나를 사랑해주잖아요. 내게 그러겠다고 약속했잖아요. p.54

부성이든 모성이든 어떤 사랑이 더 강력하다고 말할 수 없고, 그 어떤 한쪽도 가벼이 여겨서도 안되지만 겉모습 따위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사랑이란 누구 한 사람 특히 남성이거나 여성으로 한정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들이 마음 속으로 정해 놓은 산타에 대한 이미지들이 사실은 그냥 그렇게 굳어진 것일 뿐 어느 것 하나도 위법행위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누구나 빨간 털 달린 옷을 입는 것 같지만 호주에서는 알로하 반팔 셔츠에 반바지를 입는다. 사막에서는 붉은 망토를 둘렀었지만 사자에게 쫓기는 바람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초록망토로 바꿨다. 흰 눈썹이 아쉽다면 밀가루를 바르면 된다. 그렇게 제시카는 미국 지부 산타로 임명되었고, 너무 뚱뚱해서 힘들었던 지난 산타와는 달리 이번 산타는 알래스카에 도착하기 전에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그리고 순조롭게 선물배달을 마친 제시카산타는 집으로 돌아와 3층에 사는 존의 가족과 함께 별을 보며 그의 청혼에 yes,라고 대답한다. 산타들은 미국 지부 산타의 결혼을 승인하느냐를 두고 또 한 번 회의를 시작한다.

짧은 이야기 속에 여성과 남성, 피부색에 관련한 차별과 같은 여러가지 상황들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흔히 당연하게 생각해 온 것들이 어쩌면 그저 약간의 선입견으로 인해 굳어진 오해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여러 사람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러한 상황들이 오로지 나만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사고라는 것, 내가 아닌 타인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장은 바로 인간적인 자질 외에는 어떤 조건도 달지 않겠다던 전임 미국 지부 산타의 말이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인간적인 자질 이외의 것들에 상당히 많이 좌우되고 그걸 편견이나 선입견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고 의견이라고 스스로를 이해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렇게 또 한번 스스로를 점검해 볼 시간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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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살되세요, 해피 뉴 이어
소피 드 빌누아지 지음, 이원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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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에 출간된 작품치고는 제목이 상당히 도전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요즘 '자살'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불어를 모르지만 원제<Joyeux suicide et bonne annee>를 그대로 옮겼다고 추측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 오너먼트와 해피뉴이어라는 말에 자살이라는 말, 더구나 행복한, 이라는 단어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기에 조금 꺼림직한 마음은 접어두고 읽어보기로 한다.

실비 샤베르는 마흔 다섯의 고아다. 새벽녘 자신의 유일한 피붙이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아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마흔 다섯이나 먹은 사람에게 '고아'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건 아마도 마흔 다섯쯤 되고 보면 이제 부모님의 슬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가정을 꾸렸거나 혼자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혼자로서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고아라는 말은 아직 돌봄이 필요한 나이에 혼자 남겨지는 아이들을 위한 단어이니까. 그럼에도 실비는 스스로를 고아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가족은 아무도 없고 사랑하는 남자도, 혹은 자신이 낳은 아이도 없다. 아빠의 묘지를 계약하러 간 실비는 자신의 묘지도 미리 사기로 한다. 우울해하는 실비를 위해 친구 베로니크는 정신과 의사에게라도 가보라고 권하고 언젠가 만났던 남자 중에 프랑크라는 남자가 있었다는 이유로 고른 심리치료사 프랑크를 만나 크리스마스에 자살을 하려고 한다고 고백한다.

"오래전부터 혼자 살아요. 독신이고 자식도 없어요. 나는 외동인데 4년 전에 엄마를 잃었고, 몇 주 전엔 아빠를 잃었죠. 나는 혼자고 죽을 거 같아요. 크리스마스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날이죠."

(중략)

"좋습니다. 그럼 앞으로 두 달하고 조금 더 남았군요. 일주일에 한 번씩 나를 만나러 오세요. 그리고 12월 25일, 그날이 진짜 마음에 들면 오후 2시 30분에서 4시 30분 사이에 자살하세요. 어떻습니까, 실비?"

<행복한 자살되세요, 해피 뉴이어> p. 23

프랑크는 왜 자살을 하려고 하느냐,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냐는 조언과 충고를 늘어놓는 대신에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과 상담을 하되 그 때까지도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실비가 원하는 날에 자살을 하라고 권한다. 대신 다음 상담에 오기 전까지 자신이 권하는 일들을 해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부끄러워서 절대로 하지 못할 일들이라든가, 비난받아 마땅해 보이는 짓을 저질러 보라고 한다. 실비는 펄쩍 뛰지면 어차피 곧 죽을건데 뭔들 못하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왁싱을 하고 마트에서 입욕제를 훔쳐 나온다. 그리고는 프랑크에게 당신이 시켰던 일들을 하느라 무척이나 부끄러웠고 창피했고 굴욕적이었고 분노까지 일었다며 화를 내지만 프랑크는 어떤 구체적인 일을 시킨 것이 아니라며 결국 모든 걸 결정한 건 실비 자신이었음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실비는 프랑크와의 상담을 계속하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일상에 어떤 것에도 큰 관심도 없고, 그러한 무기력한 태도는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못생긴 여자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더욱 외롭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매주 조금씩 다른 일을 하고,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실비 안의 무언가를 깨웠다. 죽자고 덤비니 어떤 것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일을 해내고 나서 느끼는 감정들이 모든게 긍정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감정의 폭을 넓히고 폭발시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중 지하철 플랫폼에 쓰러져 있는 노숙자와 눈이 마주친 실비는 그녀를 위해 구급차를 불러주고, 차마 그녀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악취가 나는 그녀의 더러운 손을 잡은 채 자장가까지 불러주며 구급대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실비의 손을 잡은 채 세상을 떠났고 실비는 충격을 받았다. 플랫폼에서 죽은 그 여자는 냄새가 나고 더러웠지만 자신의 손을 잡고 죽었다. 따뜻한 욕조에서 좋은 향기와 함께 죽는대도 혼자라면 비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충격을 받은 실비를 위해 달려와 준 프랑크는 실비가 지난 몇 주 사이에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있는 걸 느낀다며 혼자 죽고 싶었던 실비는 이제 없다고 말해준다.

실비, 불행에 크고 작은 건 없어. 불행한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니까.

<행복한 자살되세요, 해피 뉴이어> p.168

실비는 15년을 다녔던 회사에 사표를 집어던지고, 친구와 함께 노숙자가 있는 영안실로 찾아가 깨끗하게 씻겨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녀의 장례를 치러준다. 회사 동료의 소개로 만나게 된 에릭과 네팔로 떠나기로 한다. 그렇게 실비는 크리스마스에 죽으려던 자신의 계획을 접는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다가오지만 기습적으로 찾아 올 죽음이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의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기로 결심한다. 실비가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는 아마도 두달 뒤면 죽을 목숨이니 무엇이든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다, 는 용기 덕분이었을 것이다. 뭐 아무렴 어때, 곧 죽을건데~! 라고 생각하고 삶의 텐션을 끌어올리다 보면 나한테 이런 면도 있었던가,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었던가 싶고 하지 않았을까? 가끔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죽을 용기로 살면 무엇이든 못하고 살겠는가 하는 말이 그런 말이겠지. 사실 이 소설 안에서의 실비는 유산도 어느 정도 물려 받았고, 나름 자리잡고 있는 직장도 있기 때문에 정말 살기 어려워서 죽고 싶은 사람들이 본다면, 다 먹고 살만하니까 하는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 하고 비아냥 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랑크의 말처럼 불행에 크고 작은 건 없다. 부자라고 불행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고, 가난하다고 행복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불행이란 돈의 유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것이니까. 불행한 사람들에게 불행이란 저마다의 크기와 이유가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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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구병모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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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한동안 타투를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었다. 쇄골쯤에 혹은 어깨와 뒷목의 중간쯤에, 혹은 엉덩이와 허리를 구분짓는 그 라인쯤에 하면 어떨까 하고 이미지를 모으기도 했었다. 오래 전이라고 해서 20대였던 건 아니고 이미 결혼도 하고 아들도 있을 때였는데 하고 싶은 강렬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노화가 시작되는 내 '몸'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잉크자국을 새긴다는 것이 껄끄러워서 고민만 하다가 결국 스티커 붙여보기로 아쉬움을 달래다 끝이 났다. 캐나다에 살면서 타투를 한 사람들, 타투 전문점 등을 흔하게 보게 되었는데 그 때 오히려 용감하게 타투를 하게 된 친구가 있는가 하면 나는 '아, 한 때의 호기심으로 하지 않기를 천만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몸은 탄력을 잃어가고 처음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그림이나 글자들은 내 몸이 변화함에 따라 변화된다. 쭈글쭈글한 장미가 되는가 하면 불어난 몸과 함께 풍선같은 장미가 되기도 한다.

낼모레면 오십이 되는 시미는 남편과 이혼하면서 하나뿐인 아들과의 관계도 끊어졌다. 하지만 모성이란 만나지 않는다고 아들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어떻게든 아들과 연락하고 지내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같은 사무실의 화인의 뒷목에 새겨진 문신을 두고 상무가 이러쿵 저러쿵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하자 그간 삼켜왔던 말들과 함께 분노가 솟구쳤고 그녀 대신 대찬 소리를 내뱉어주었다. 그러자 화인은 그에 대한 보답이랄까, 자신이 문신을 한 문신술사의 명함을 내밀어주며 충동적으로 새긴 문신이었지만 그 이후 뭔가 자신감이 생기고 심장이 새로 뛰는 것 같았다며 시미에게도 한번 가볼 것을 권했다. 그렇게 문신술사를 방문한 시미는 흔히 생각하는 곳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놀라기도 했고, 적지 않은 나이에 몸에 무언가를 새긴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돌아 나오고 만다. 그리고 몇 건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사망사건들이 발생하는데 그 중 한건의 사건의 한가운에 화인이 있었다. 회사를 대신해서 화인을 찾아갔던 시미는 화인의 뒷덜미에서 화인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주었다던 그 샐러맨더라는 문신이 사라지고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실은 피부에 새겨진 건 자신의 심장에도 새겨지는 겁니다. 상흔처럼요. 몸에 입은 고통은 언제까지고 그 몸과 영혼을 떠나지 않고 맴돌아요. 아무리 잊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이지요.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_ p. 138

시미는 다만 혼잣말 에 가까운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또는 어떠한 존재가 당신을 지켜주었나요. 당신은 살아오면서 어떤 호의와…… 얼마만 한 경멸과 때로는 악의를 만나왔기에, 자신을 지키는 부적을 온몸에 그릴 수밖에 없었을까요?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_ p. 136

상당히 짧은 분량의 이야기이고 미궁으로 빠져버린 사망사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없지만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폭력들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정폭력의 대상이었던 화인의 아버지, 갑질을 일삼던 회사대표, 데이트폭력의 끝을 보여주었던 전남친 등 기이한 사건의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생전에는 가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가장 마지막까지 그들과 있었던 사람들은 그 사람들에게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간절함이 심장에 수놓아졌고 가장 필요했던 순간에 그들을 구해냈을거라는 판타지소설이다. 어쩌면 그들 모두를 구해낼 방법을 '판타지'에서 밖에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이 이야기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눈여겨 바라봐줄 때 세상은 판타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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