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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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극장에서 일본영화를 본 적이 있다. 정확한 줄거리가 기억나는 건 아니고 사무라이가 등장을 하고 그들의 긴 칼과 흰 눈위에 흩뿌려지던 피와 그 긴 칼이 사람의 살을 베던 소리가 너무 깊이 남았다. 그 이후로 칼싸움이 등장하는 영화는 선호하지 않았다. 칼은 그 어떤 살해무기보다도 잔인하게 느껴졌다. 요 네스뵈의 신작 <칼>은 실제 범행도구로써의 칼에 대한 이야기와 동시에 우리가 간혹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할때처럼 은유적인 표현으로써의 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칼에 찔려 사망한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어디에 찔렸는지, 몇번을 찔렸는지에 따라 범행에 대한 프로파일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뒤에서 몰래, 혹은 아주 근거리에서 또는 우발적으로, 방어를 하다가, 그리고 분노에 차서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칼로 사람을 베어 죽일 수 있다면 가상의 칼로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 상에서 의미없이 던지는 악플도 칼이 될 수 있고, 이 작품 안에 등장하는 강간 피해자들이 하루하루를 견디어 내면서 결국에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강간'이라는 것도 칼이 될 수 있다.

칼은 인류 최초의 도구고 인간은 250만 년에 걸쳐 칼에 익숙해졌는데도, 여전히 어떤 인간들은 인류가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게 해준 이 고마운 도구의 미덕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냥, 집, 농사, 음식, 방어. 칼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그만큼 새 생명을 창조했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를 잃는 법. 이걸 이해하고 인류가 이뤄낸 결과와 그 기원을 수용한 자들만이 칼을 사랑할 수 있었다. 공포와 사랑. 역시나 동전의 양면이다.

요 네스뵈 <칼> 24쪽

그토록 사랑하는 라켈의 집에서 쫓겨 나와 혼자 지내는 해리에게 유일한 낙이 있다면 그것은 술과 사건해결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쾌감만을 줄 뿐이다. 사건을 해결하기 직전의 흥분도 사건해결과 함께 사라지고, 술을 마시고 취하고 난 뒤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의 몸안에서 알콜은 그 생명을 다한 채 사그라든다. 라켈과 함께 한 모든 나날들이 그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꿈과도 같은 행복이었고, 그래서 불안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것만 같은 때의 불안감, 그녀와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망가지는 일 뿐이었다. 지독히도 외로운 남자, 해리.

그동안 행복했다. 행복은 헤로인과 같다. 한 번 맛보면, 행복이란 게 있는 줄 알면 다시 행복해지지 않고서는 평범한 일상에서 온전히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 행복은 소박한 만족 이상의 무엇이므로. 행복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다. 행복은 전율하는, 예외적인 상태다. 지속하지 않을 게 분명한, 초, 분, 말이다. 행복하지 않은 순간의 슬픔은 뒤늦게 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온다. 행복한 순간에 이미 다시는 이렇게 행복할 수 없고 가진 것이 사라진다는 지독한 진실을 통찰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을 빼앗기는 고통과 상실의 슬픔을 미리부터 걱정하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을 인식하는 그 능력을 저주한다.

요 네스뵈 <칼> 78쪽

'당신은 왜 나한테 와서 날 이렇게 외롭게 한 거야?'

요 네스뵈 <칼> 118쪽

전쟁터를 경험하고 온 사람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살인마들과 마주하는 형사들, 뜨거운 불길 속으로 사람을 구하러 가는 사람들 혹은 밀어닥치는 응급환자들을 치료하는 의사들까지 생과 사의 갈림길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있다. 때때로 그런 사람들 중에는 남들과는 다른 정의감에 누구보다 깊게 몰입하고 그러면서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잃는 사람들도 있다. 슈퍼 히어로들도 어느 순간 빠지게 되는 자기혐오의 순간이 그들에게도 깊게 찾아온다. 내가 구해낸 사람보다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자책, 죄책감 그리고 자기혐오. 해리 뿐만 아니라 <칼>이라는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그 애달픈 감정들.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반복해서 경험하고 싶어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과 비슷하게 형사들은 살인범을 잡는 그 찰나의 순간에 경험하는 카타르시스를 위해 뛰고 또 뛴다. 그러다 누군가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것이 비록 법의 경계 밖에 있는 방법이라 할지라도 잡아내는 것이 먼저라고 하기도 하고 그렇게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해리에게 잡혀 들어갔다가 출소를 한 스베인 핀네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해리에게 벌어진 끔찍한 사건은 안 그래도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던 해리를 그야말로 진창으로 쳐박아 버렸다. 고생하기로 치자면 <다이 하드>의 존 맥클레인도 있고, <미션 임파서블>의 에단 헌트도 있지만 해리 홀레에게 그 정도 고생은 귀여울 정도다. 모든 걸 묻어버리고 그대로 죽어버리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막다른 길에 놓인 해리에게 길을 열어준 건 늘 그의 곁에 있었던 음악이었다. 사건과는 별개로 등장인물들을 통해 풀어놓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고찰이랄까 통찰력이랄까, 그리고 배경음악처럼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음악과의 어울림까지, 요 네스뵈 당신이라는 작가는 정말!

뼛속까지 부패했지만 모든 것을 올바르게 만드는 도덕률을 가진 사람. 그게 아주 멋졌다. 지독히 나쁠 수도 있지만 결국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 나치와 공산주의자들도 저마다의 전쟁영화를 찍어서 국민들에게 그들을 응원하게 유도했다. 무엇도 전적으로 진실이 아니고, 무엇도 전적으로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다. 관점. 관점이 전부다. 관점.

요 네스뵈 <칼> 155쪽

미드를 보면서 시즌 마지막화에서 화면 밖의 주인공과 총소리를 들어도 다음 시즌을 위한 떡밥이겠거니 한다거나 빗발치는 총알세례를 뚫고 지나가는 주인공을 보면서 주인공 버프가 있으니 죽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처럼 해리가 결국은 그 진창을 해치고 나와서 마침내는 사건도 해결하겠지, 하는 믿음은 있었으나 어느 순간에는 그런 나마저도 '설마......'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을만큼 이 방대한 작품 안에서의 기류는 순식간에 돌변하기도 하고 사람을 놀라게 했다.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인생이지만 해리에게만큼은 가혹하리만큼 잔인한 일들이 매번 벌어진다. 생각해보면 가혹한 일들은 해리 본인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아름답지만 망가진 해리를 사랑하는 여자들, 그리고 박애주의의 마음으로 그녀들을 밀어내지 않는 해리. 공포와 사랑도 동전의 양면이라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의 다음 행보는 핀네가 남기고 간 주사위가 결정해 줄지도 모르겠다. 비록 엄청난 해방감을 느끼고 결정한 그 길의 끝에도 해리를 괴롭힐 사건이 있을 것이 뻔하겠지만 말이다.

"책 같은 건 안 읽어, 홀레. 그래도 주사위는 가져도 돼. 자네한테 주는 선물이야. 뭘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운명이 결정하게 놔둬. 엄청난 해방감을 느낄 거야, 장담해."

요 네스뵈 <칼>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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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맨
크리스티나 스위니베어드 지음, 양혜진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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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스코틀랜드의 응급실에서 남성대역병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감염되었는지도 모르고 일단 한번 걸리면 치사율은 90%, 감염에서 죽음에 이르는 시간은 단 이틀이다. 단순한 독감 증세를 보이던 환자가 고열에 시달리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기 시작하면서 응급의인 어맨더는 팬데믹으로 상부에 보고하지만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성만 공격하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라니. 하지만 이 갑작스럽고도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금세 스코틀랜드를 넘어 영국 전역으로 그리고 아시아와 아메리카까지 일파만파로 퍼져나간다. 인류 전체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아니라고 해도, 세상 절반의 남성이 죽어 없어져도 세상 절반의 여성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이 바이러스의 출연으로 전세계는 삽시간에 멸망을 떠올리게 될만큼 위협을 받는다.

생각해보자. 아주 가깝게 우리집에는 나와 남편, 아들 세 식구가 살고 있다. 면역을 가지지 못했다면 어느 순간 공포에 떨다 우리 가족의 3분의 2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뜻이다. 일주일 중 월요일만 빼고 내내 열리는 야구경기를 즐겨본다. 프로야구는 남성으로만 이루어져있고 중계도 남성이 한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남자고 정치한다고 국회에 들락이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남자다. 대통령도 마음에 들지 않고 정치인들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 옳거니 잘됐다, 이참에 싹 다 갈아 엎으면 되겠네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빈자리를 다 메꾸기까지 생기는 공백기 동안 세상이 어찌 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시분초를 다투는 일이 아닌 정치와 야구는 그렇다 치더라도 병원에만 가도(성비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해도) 남성 의사가 대부분이다. 급한 수술을 요하는 환자,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두고 담당 남성의사가 시시각각 죽어 나간다면 세상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응급의와 기자, 영국정보국 소속 공무원, 병리학자, 바이러스 학자와 인류학자까지 남성대역병을 가장 최일선에서 마주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나온다. 그들은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알리고 싶어하고, 백신 개발에 몰두하고,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려고 하는 동시에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을 잃는다.

사실 이 이야기의 목적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 남성위주로 돌아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인가. 혹은 남성만을 공격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 때문에 남성인류의 절반 이상이 갑작스럽게 사라져도 그렇게 혼돈에 빠져도 결국은 여성만으로도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어쩌면 목적 따위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을지도, 그런 것을 애써 생각해낼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어차피 문학의 기능이란 보고 느끼는 사람의 몫이니까.

코로나라는 팬데믹을 겪으며 점점 더 온라인 세상이 되어 가고 있는 요즘,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보다는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것이 더 쉬워진 상황인 것 같아서 몹시 걱정스럽다. 오래 전 '관심'이었던 것이 사회적 거리를 중시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오지랖'이 되어버렸고 계층간, 성별간의 사고는 극단으로 가는 경향이 많아서 혐오가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아 더더욱 걱정스럽다. 간혹 여성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는 남성을 혹은 남성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는 여성을 만날 때가 있다. 하지만 인류의 삶이란 결국 '공존'이라는 키워드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공존이란 나라와 나라, 개인과 개인, 인간과 자연이라는 거대한 맞물림이다. 남성 대 여성이라는 공격구도는 공존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다.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세대간 뿐 아니라 성별간에도, 나라와 나라의 문화사이에도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성중심의 사회가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 인류의 멸망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여성, 이라는 주제가 몹시 거북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직도 '유리천장'이라는 단어가 종종 쓰이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태까지의 룰이 꼭 정답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상기시킬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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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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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단한 책의 저자인 옥타비아 버틀러는 흑인이고 여성이고 이미 타계한 미국 소설가라고 한다. 1980년대에 이미 백인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SF 문학에서 각종 문학상을 석권하며 파란을 일으킨 작가라고 하는데, 나는 처음 접하는 작가라는 게 뭔가 부끄러웠다. 문학세상은 넓고 그렇게 놓치는 좋은 작품들도 허다하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렇게라도 만나게 되어 다행인 작품인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1993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아주 가까운 미래인 2024년부터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작품이 발표된 1993년이면 30년 후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 작품을 읽는 지금의 나에게는 바로 2년 뒤의 일이 된다.

열다섯의 로런은 로스엔젤레스에서 30km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인 로블리도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다. 이야기는 2024년부터 2027년에 걸쳐 쓴 로런의 일기로 진행되는데, 로런은 약물중독이었던 엄마로 인해 '초공감증후군'이라는 일종의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누군가의 모든 감정부터 신체적인 고통까지 그대로 느껴야 하는 로런에게 현실은 그야말로 지뢰밭이다. 왜냐하면 로런의 마을은 더이상 아름답거나 부유한 마을이 아니고 거대한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폐쇄적인 공간이며 모든 안락하고 평온한 것들을 빼앗을 준비가 되어 있는 강도와 침입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하는 절대적으로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인 아버지와 마을의 어른들은 좋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그들이 꿈꾸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로런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혹은 절대자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세대가 아니다. 그녀가 경험한 모든 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악화일로를 걸을 일만 남아 있다고 여기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로런은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을 재정의하고 스스로 이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하나의 종인 '지구종'의 창시자가 되려한다.

고작 태풍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쳤을까? 농사가 엉망이 되는 바람에 굶주릴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자연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 게 하느님일까? 죽은 사람은 대개 갈 곳이 없어 거리를 떠도는 빈민이거나 경고를 너무 늦게 들은 나머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지 못한 이들이다. 그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는 도대체 어디일까? 하느님이 보기에는 가난도 죄일까?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중 29쪽

심스 부인의 이야기를 여기에 적는 까닭은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우리 아빠와 마찬가지로 심스 부인 또한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영원토록 불탄다고 믿었다. 그렇게 성서에 적힌 말을 글자 그대로 믿고 받아들였다. 그랬는데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못 버틸 상황이 되자 현실의 고통과 내세에서 겪을 영원한 고통을 맞바꾸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뭘 진심으로 믿기는 한 걸까? 그 믿음은 다 가식이었을까?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중 44쪽

하느님은 거스를 수도 막을 수도 없지만, 형상을 빚어 구체화할 수는 있다. 그 말은 곧 하느님은 기도를 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도는 단지 기도하는 사람에게 힘이 될 뿐인데, 그 마저도 그 사람의 각오가 더 굳어지고 더 또렷해질 때 얘기다. 그런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뿐이며 실질적인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빌려 하느님의 형상을 빚을 뿐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린 형상을 받아들이고, 그 형상 안에서 힘써 살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은 힘이고, 그래서 결국에는 하느님이 승리한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중 46쪽

"뭘 어떻게 한다는 건데? 우린 열다섯 살이야!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뭔데?"

"대비는 할 수 있어. 그게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이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대비, 그 일을 끝까지 견뎌낼 대비, 다 끝난 후에도 계속 살아갈 대비. 우린 살아남을 계획을 짜는 데 집중해야 해. 미친 사람, 자포자기한 사람, 악당,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지도자 같은 사람들한테 휘둘리지 않으려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중 95쪽

모든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그렇듯 인간의 욕심과 이기주의가 끝을 보이기 시작할 때 어느 순간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던 지구의 모든 것들 중 어느 것 하나라도 튕겨져 나가는 그 순간 순식간에 몰락이라는 것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던 순간에도 서로 적당히 힘겨루기를 하다 끝이 나겠거니 생각했던 나는 참으로 어리석었던 모양이다. 그 전쟁으로 가라앉기 시작한 전세계의 경제는 지금 과거 대공황 때와 비견할만 하다고 할 정도로 어려워지고 있다. 역사상 모든 전쟁이 그러했듯 인류를 위해 벌어진 전쟁은 없다고 생각한다. 대가리를 부딪치며 다투는 숫양 두마리보다 지적으로 나은 구석이 전혀 없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모든 투쟁은

본질적으로

권력 투쟁이며,

대개는

대가리를 부딪치며 다투는

숫양 두 마리보다

지적으로 나은 구석이 전혀 없다.

-<<지구종 : 산 자들의 책>>에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중 166쪽

요즘 경제를 가장 절실하게 실감하게 하는 것은 장바구니 물가와 주식시장이다.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매일 52주 최저가에 도달했다는 종목 이야기를 하게 되고, 한국도 망하고 미국도 망했냐는 말도 한다. 그만큼 세계경제가 쇼크에 빠져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인간들의 본성이 여실히 드러나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근본없는 혐오가 판을 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기도 한다. 언젠가 다른 책에서 지구의 멸망이 코앞에 있는데 인간이라는 종이 그렇게 뻔하기만 할까, 라고 의심했지만 정말 소름돋도록 뻔하더라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은 그렇게 한심하도록 뻔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뻔한 인간이라는 종이 여태껏 문명을 이루고 살아 온데는 또 그만큼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디선가 누군가 씨 뿌리는 사람이 있는 한, 어디선가 백 배의 열매가 맺히리라는 믿음 말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 먹기도 하였다. 또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지니, 싹이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누가복음> 8장 5~8절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중 584~5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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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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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믿지 말게. 결국엔 아무도 새를 지키기 위해 굶으려 하지 않을 거야. 새들은 인간의 탐욕 때문에 멸종되지.'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중 56쪽

왕쥔잉은 이런 생각이 일부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옳고 그름은 원래 흑백이 분명히 나뉘는 것이 아니고, 정의이 검도 영원히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배신죄를 저지른 자본가의 선택이 수백 명 직원들의 생계를 위함일 수도 있고, 비참한 처지에 몰린 피해자가 가장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중 333쪽

처음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해서 중반부로 넘어가는 동안 셜록이 떠오르기도 했고, 오래 전에 읽었던 제프리 디버의 <옥토버리스트>가 떠오르기도 했고 약간 결은 다르지만 여러 작가의 연작소설이었던 <젓가락, 쾌>가 떠오르기도 했다. 탐정소설이자 경찰소설이면서 동시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등장 인물들을 소개하는 과정들이 각기 다른 한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1장이 끝나면서 사건이 모두 해결되었는가 싶으면 2장은 또다른 이야기를, 3장은 또 새로운 사건을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결국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형태를 가진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은 다중시점의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송년파티 후 벌어진 특급호텔 캉티뉴쓰에서의 살인사건. 피해자는 호텔의 사징인 바이웨이둬. 그는 산책로로 조깅을 나가는 뒷모습을 아내와 아내의 친구인 변호사 거레이에게 보이며 나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총을 맞고 숨졌고, CCTV와 관리사무소에 있는 그 누구도 바이웨이둬 이외의 사람을 잡아내지 못했다. 경찰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가장 먼저 답을 내놓는 푸얼타이 교수, 그렇게 사건을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 같았지만 그의 추리에도 허점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가 범인이라고 지목했던 사람 역시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사건은 다시 미궁으로 빠진다.

조류 셜록이라는 별칭을 가진 조류학자 푸얼타이 교수와 전직 경찰이자 사립탐정인 뤄밍싱, 신출귀몰한 솜씨의 부유층 전문털이범인 인텔선생, 그리고 뤄밍싱의 전부인이자 변호사인 거레이가 각각의 추론을 내놓는다. 하지만 네 사람 모두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고, 그들의 추리가 조각맞추기를 하듯 맞물리면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뭐니뭐니해도 추리소설의 즐거움이란 이름 그대로 '추리'하는 맛에 있다. 작가가 심어 놓은 의심의 지뢰밭을 살금살금 걸어가면서 이 사람이 범인일까, 저 사람이 범인일까. 그렇다면 왜 범행을 저질렀을까 궁금해하고 추리해가면서 내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질 때의 쾌감 혹은 전혀 다른 사람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될 때의 충격 같은 것이 모두가 다 추리소설을 읽는 즐거움일테다.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엔터테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등장인물을 의심하게 하고, 그 의심을 제대로 깨부수기도 하는 여러 요소들을 여기저기 많이 심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방까지. 다만 한가지 성룡은 청룽이 아니라 성룡이고 주윤발은 저우룬파가 아니라 주윤발로 알고 살아 온 인생이 긴 연식이 오래된 사람이어서인지 인물들의 중국식 발음이름을 외우기가 힘들었다는 점은 좀 아쉬웠다고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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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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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일본도를 들고 피에 물든 붉은 셔츠를 입은 남자는 아내와 어린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앞을 막아 선 신이치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그리고 두려움에 딸을 껴안고 달리던 가즈코의 의식도 이내 아득해지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매년 칠석이면 온 가족이 나팔꽃 시장을 둘러 본 후 유서 깊은 장어집으로 향하는 것이 소타 가족의 의식 같은 것이다. 열네 살이 된 소타는 자신에게는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나팔꽃 축제에 따라가고 싶지 않지만 장어를 좋아하기에 억지로 따라 나섰다. 하지만 우연히 축제에서 만나게 된 다카미로 인해 축제는 그야말로 축제가 되고 다카미와 메일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메일을 검열한 아버지는 다카미와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고 다카미마저 소타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끝낸다.

그리고 현재. 사촌의 자살에 이어 할아버지의 살해까지 끔찍한 일을 연달아 겪고 있던 리노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달에 두어번 정도 방문하여 할아버지가 키우고 있는 꽃들의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는 일을 돕고 있었다. 다른 꽃들과는 달리 블로그에는 아직 올리지 말라고 했던 노란꽃이 피었던 화분이 없어졌다는 것을 안 것도 경찰의 조사를 받고 나서도 한참 뒤였다.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마땅한 용의자도 증거도 없는 혼자 사는 노인의 살인사건은 그저 그런 강도의 짓으로 치부되는 듯 했다. 하지만 궁금증이 생긴 리노는 그 노란꽃을 블로그에 올려 아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고 그걸 계기로 소타의 형인 요스케를 만나게 되고, 요스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가 소타와 연결된다. 소타는 경찰관료인 요스케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해서, 리노는 노란꽃의 실체와 할아버지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함께 조사를 시작한다.

에도시대에는 존재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노란 나팔꽃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1962년의 살인사건과 십년 전 소타와 다카미의 어색한 헤어짐, 그리고 현재 리노 사촌의 자살, 할아버지의 살해까지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뒤를 좇는 하야세 형사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늘 그렇듯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은 '살인'이라는 무서운 결과로 시작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인간적인 부분들이 끊임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게 아닌가 싶다.

수영으로 올림픽을 준비하던 리노가 수영을 그만두게 된 사연

원자력이라는 것을 연구한다는 것에 딜레마를 가지게 된 소타

자신의 잘못으로 가정이 깨졌지만 아들을 위해서 사건을 꼭 해결하고 싶은 하야세

누구에게나 능력있는 음악가로 평가받았지만 늘 자신에게 자신이 없었던 나오토

'가업'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의무를 짊어져야 했던 요스케와 다카미

제법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을 하나의 귀결점을 향해 달리고 있고, 마지막에 다다를 즈음엔 살인사건의 해결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 각각의 인생에 대한 '정답'까지는 아니어도 '방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바로잡으려 하는 노력이 자신 뿐 아니라 그 후대에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각오와 신념을 가진 등장인물들을 그려낸다는 것 자체가 작가 자신의 도덕관을 나타내는 것일테고, 그런 것들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들이 좋아하는 점일 것이다.

"내가 불만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야. 하지만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많아. 이를테면 가부키 같은 전통 예능은 그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 당연히 뒤를 잇잖아. 오래된 가게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건 유산이잖아. 이어나갈 의무와 함께 득도 있으니까."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소타 군."

<몽환화> 중 391~3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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