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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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강한 유대와 의리가 도덕을 넘어서는 순간이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이야기이다.

요 네스뵈

이토록 쓸쓸하고 슬픈 이야기가 있을까?

조용하고 작은 시골마을 오스의 언덕 위, 오르가프 농장에 혼자 살고 있는 로위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하나 밖에 없는 동생 칼의 유학비용을 대기 위해 작은 주유소에서 일하며 외로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났던 칼이 대단한 계획과 함께 7년 만에 아름다운 아내 섀넌과 함께 돌아온다. 칼의 계획은 그들의 아버지가 자신들의 왕국이라 불렀던 언덕 위에 호텔을 짓는 것이었고, 그 작은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고요하기만 했던 마을이 벅찬 기대감으로 일렁이기 시작했을 때 로위의 심장도 함께 뛰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우린 가족이다. 우리가 믿을 건 가족 뿐이야. 친구, 애인, 이웃, 이 지방 사람들, 국가. 그건 모두 환상이야. 정말로 중요한 때가 오면 양초 한 자루 값어치도 안 된다. 그때는 그들을 상대로 뭉쳐야 해. 로위. 다른 모든 사람 앞에서 가족이 뭉쳐야 한다고. 알았지?"

"네"

요 네스뵈 <킹덤> 중 13쪽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how far you would go for love(or family)' 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사랑을 위해서 혹은 가족을 위해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느냐는 뜻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하는 말이 그것일 것이다. 가족이라는 것이 가족의 일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 도덕을 넘어서는 일을 요구하게 될 때가 있다는 것.

서로가 서로를 몹시 사랑한 가족이 있었다. 로위와 칼, 그리고 그의 부모.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로위는 동생인 칼을 사랑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들을 사랑했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는 않지만 마음이 약했던 칼을 돌보는 일에 익숙했던 로위에게 아버지는 유독 맏이의 책임을 강조했고, 가족간의 유대를 강조했다. 그 후로 벌어진 일들 때문에 서로를 사랑했던 가족들 모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모두 상처받았고 허물어졌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입을 닫았고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치심에 떨어야 했지만 그것이 가족들 안에서라면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결국 가장 용기있게 나섰던 것은 로위였고, 그야말로 가족을 위해서, 사랑하는 동생 칼을 위해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작품의 마지막까지 보여주었다.

괴물을 잡기 위해서 괴물이 된 자의 이야기라고 하면 좋을까. 하지만 로위를 괴물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슬프다. 어느 순간까지는 적당히 타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로위는 상처받았어. 아버지에게 가스라이팅 당했고 어쩌면 그토록 슬픈 눈을 하는 칼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건 자기자신 밖에 없다는 그릇된 책임감에 목줄을 매인 것이나 다름없어. 그러니 여기까지는 어쩌면 나였대도 그랬을거야. 하지만 종반부로 다다를 때 더 이상 가게 된다면 나도 당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만 가라고 로위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싶어진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우습고도 슬픈 것은 언제나 자신이 벌이는 일들이 마지막 해결책이 되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런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생각들에 일침을 가하는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고 꼽는 스콧 스미스의 <심플 플랜>이 떠오른다. 계획은 늘 간단하고 완벽해 보인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방해물을 제거하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질 것만 같다. 하지만 두더쥐 게임처럼 하나를 찍어 누르면 반대쪽에서 또다른 방해물이 튀어 나온다. 어린 로위의 심장을 갉아 먹은 죄책감은 동생을 위해 더 용기있게 나서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죄책감은 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거역할 수 없는 책임감으로 자라났고, 건강하지 못한 먹이를 먹고 자란 로위의 책임감은 로위에게 또다른 죄책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일들을 벌이게 만들었다.

아무리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어려서부터 생긴 트라우마가 로위를 비정상적인 책임감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그러니 이해해줘야 한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폭행을 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 계획적인 살인을 몇번이나 저지르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선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트라우마만으로 그를 용서할 수는 없다. 이야기가 끝으로 가는 내내 나 자신과의 싸움을 벌인다. 다만 책 안의 인물을 두고 내 마음이 이리도 혼란한데 작품 속의 로위는 평안할까하는 생각이 든다. 로위가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는 날은 아마도 그가 영원히 눈감는 날이 아닐까. 그의 뒤를 쫓는 쿠르트 올센의 눈은 피할 수 있을지언정 로위 자신의 눈, 진실을 아는 눈을 피할 길은 없을테니. 게다가 자기의 평생을 두고 사랑해 온 동생 칼의 눈에서도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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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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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인간이라는 종이 자연적으로 진화를 하든 발전한 현대과학의 산물의 결과로든 암수한몸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 말이다. 태초에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어 지금의 인간이 되었느냐는 여러가지 추론들이 있지만 과학이든 종교든 간에 현재의 인간이 시작은 아니었듯 현재의 인간이 끝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말이다. 오래 전에 아주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에서 남자와 여자의 뚜렷한 차이를 이야기하며 어떻게 하면 다른 두 종이 이해하고 받아들여가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리하여 자신과 상대방이 모두 승리하는 것 그것이 바람직한 관계 형성의 비결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단순히 인간이라는 것이 여성과 남성, 으로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기본적으로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의 구분에서 오는 '다름'은 세상 끝날까지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남성이면 군입대라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고, 여성은 분단 국가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가임기 여성이 되면 월경이 시작되고, 임신과 출산이라는 문제를 당면하게 된다. 그렇다보니 남성과 여성을 나누어 서로에게 자기에게 당면한 문제가 더 크고 중하며 피해갈 수 없는 것이라는 설명을 하다보면 결국은 상대를 비난하고 비하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앞서 말한 존 그레이의 책에서 말한대로 자신과 상대방이 모두 승리하는 바람직한 관계 형성이 아니라 나도 상대도 모두 패하고 마는 진흙탕 싸움이 되어버린다고나 할까.

아밀의 소설집 <로드킬>에는 표제가 된 <로드킬> 외에도 다섯 편의 단편들이 함께 더 실려 있다. 이 이야기들은 지금으로부터 시간이 더 흐른 미래의 어느 곳에선가 시작하고 그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우리는 늘 희귀하고 신비로운 존재였다. 다른 인간 여자들은 모두 편의와 힘을 위해서 자궁을 버리고, 유전자를 변형하고, 줄기세포를 이식받고, 장기를 대체하고, 수명 연장 약을 투여받았다. 다른 인간 여자들은 모두 새롭게 진화한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들은 달랐다. 그들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지 못했거나, 어떤 오래된 종교적 도덕적 신념 때문에 그런 선택을 거부했거나, 또는 변방의 오지에서 과학적 기술을 접해보지도 못한 채 '자연친화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살았다.(로드킬 中 23쪽)

아마도 인류 특히 여성성의 진화에 대해서 상상해본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상상을 문학적 텍스트로 옮겨 온 이가 바로 아밀이라는 작가였다. 현재의 여성이 가진 여성성이 보존 혹은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기에 그런 여성들을 보호소에 수용하여 관리하고 있지만 결국은 바깥세상과의 단절을 불러 오게 되고, 그런 희귀한 여성성을 가진 구시대의 종으로써 대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관리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폭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 그리하여 바깥 세상으로의 탈출을 감행하는 그녀들. 그들은 기꺼이 지금과는 또다른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남편의 가스라이팅과 학대, 성폭력에 무방비한 상태로 내던져진 여성이 등장하는 <외시경>과 소수민족의 마지막 주술사인 여성이 남성의 폭력에 희생되는 <라비>, 요즘의 현실을 담고 있는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 나와 당신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결국 내가 말하는 당신이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 나서는 길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잃어버린 자신이 겪어야 했던 학대를 말하고 있는 <몽타주>, 안정된 삶보다는 자신을 찾아 떠나는 <공희>까지 작가의 기본적인 의도는 '소녀탈출'이었다고 한다. 사회나 가족에게서 억압받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런 억압을 딛고 일어서서 결국은 스스로 구원이 된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양한 장르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마도 내가 암수한몸의 인간을 상상하고 꿈꾸었던 이유가 조금 어린 시절에는 분연히 뚫고 나가야 할 억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중년이 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후에는 그러한 적극적인 이유보다는 아마도 분쟁 혹은 논쟁이 더이상은 버거워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이 어떻고, 남성이 어떻고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보다는 한데 어울려 살아갈 방법을 찾고 싶은 평화주의자가 되었달까.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선구자들은 있어왔고 그런 이들이 있었기에 세상은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가려 애쓰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밀의 소설에서처럼 혹은 내 상상 속에서처럼 미래의 어느 날엔가 더이상 스스로의 몸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변화시켜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지금 있는 문제점들이 모두 사라진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긍정적인 관계를 위한 나와 나 아닌 모든 타인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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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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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을 법한 문장들이 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수선화에게'

길이 끝난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봄길'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이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김광석의 노래로 더 유명한 '부치지 못한 편지'

이 유명한 문구들은 정호승 시인의 시들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50년 동안의 작품들을 모아 놓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275편의 대표작들이 실려있다. 개정증보판을 내며 쓴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마더 테레사 수녀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서 신을 본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에 기대어 모든 인간에게서 시를 본다'고 말하며 '고통이 인간적인 것이라면 시도 인간적인 것이겠지'라고 하였다. 한때는 시집을 모으기도 하고 읽기도 하고, 심지어 쓰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만의 시가 들어 있다고 믿는다. 똑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아도 누군가는 아, 하는 감탄사 뿐인가 하면 또 누군가는 눈에 보일 듯 손에 잡힐 듯 말로 그려낼 수 있기도 하다. 가끔 시를 읽으며 내 마음과 같다고 느끼는 때가 바로 그 시인이 내 속의 시를 끄집어 낸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시(詩)라는 장르에 뜨악하는 독자들이라면 아마도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단어 하나하나 쪼개가며 그 단어 안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 단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분석하고 외우는 사이 나도 모르게 시란 내맘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풀이용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접했던 시들은 주로 일제에 저항하는 시들이었던 1930년대의 저항시들로 이육사의 <광야>, 윤동주의 <서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의식적으로 저항을 위해 씌여진 시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문학작품들을 거의 난도질하다시피 분석하고 쪼개는 일들은 감수성이 한창 충만한 10대들에게는 혐오감을 줄 수도 있다. 예술이라는 장르에 속하는 모든 것들, 음악과 미술, 문학들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그럴싸하고 멋들어진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표현하지 못한다 해도 접하는 그 순간 내 가슴을 한번 쳤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

50년의 작품활동을 해온 정호승 시인의 시는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우리나라의 격동기를 모두 관통해왔다고 할 수 있기에 그의 시에도 문득문득 시대적 아픔, 슬픔 등을 함께 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여실히 남아 있었다. 그러니 이러한 시들도 20세기의 저항시라고 불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의 고향은 아가야

아메리카가 아니다.

네 아버지가 매섭게 총을 겨누고

어머니를 쓰러뜨리던 질겁하던 수수밭이다.

찢어진 옷고름만 홀로 남아 흐느끼던 논둑길이다

지뢰들이 숨죽이며 숨어 있던 모래밭

탱크가 지나간 날의 흘구덩이 속이다

'혼혈아에게'

서대문공원에 가면

사람을 자식으로 둔 나무가 있다

폐허인 양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사형 집행장 정문 앞

유난히 바람에 흔들리는 미루나무

'서대문공원'

긴 시간 시대와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온 그의 대표시들을 모아 놓은 이 작품을 읽고 있자니 삶이란 어느 정도 참으로 쓸쓸하지만 그렇다고 아름답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느낌이 든다. 눈물 속에도 꽃이 피고 이별 뒤에 만남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시선집의 마지막엔 제법 긴 분량의 해설이 있었지만 난 읽지 않았다. 내 마음대로 느끼고 해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가 몹시도 내리더니 갑작스럽게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는 시를 내 마음대로 느껴봐도 좋을 것 같다.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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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송태욱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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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시작에도 끝에도 '소실점'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소실점이라는 단어를 언제 들어봤던가.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배웠던가, 그럼 소실점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다. 물체가 아득히 멀어져 점점 작아지다 보면 결국 하나의 점으로 보이게 되는데 그것보다 더 작아질 수 없게 되는 점을 소실점이라고 한다, 고 설명에 나와 있었다. 미술이나 건축에 투시도 같은 걸 그릴 때 소실점을 찾곤 하는데 그런 학문적이거나 기술적인 의미 말고 그냥 '소실점'하고 발음해 보기만 해도, 아니면 입 밖으로 소리내어 소.실.점 하고 말해보기만 해도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드는 단어다, 라고 생각이 들었다. 작중의 인물 중 하나인 아유미가 자전거를 타고 내달릴 때, 다른 누군가를 뒤에 두고 훌쩍 떠나버릴 때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사라져 소실점 밖으로 멀어진다는 느낌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는 굉장히 극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그런 류의 소설은 아니다. 요즘 드라마로 예를 들자면 매회 누군가 죽고, 소리를 지르고, 분노하는 격정적인 주인공들이 나오는 미니시리즈라기 보다는 가족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착한 주말연속극 같은 분위기이다. 온가족이 함께 둘러 앉아 볼 수 있는 그런 류의 드라마. 그렇다고 밝고 명랑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가 내내 풍겨온다. 아마도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이미 급격하게 노령화 사회에 접어들었고, 전형적인 동양에서의 가족이라는 의미가 많이 퇴색하고 있는 일본의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홋카이도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사는 소에지마 가족 3대와 그들의 곁을 지키는 네 마리의 홋카이도견, 그리고 그들을 둘러 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 낸 이 소설은 등장하는 인물 중 누구 하나도 특별하게 혹은 과장되게 그려내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주변 어디에서도 흔하게 있을 법한 그런 이야기들 속에 그 시대를 반영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요네와 신조를 보면서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떠올리기도 하고, 요네의 세 딸들을 보면서는 내 이모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삶의 한가운데 어쩔 수 없이 등장하는 죽음과 이별에 대해서도 너무나 사실적으로 요란떨지 않는 표현이 좋았다.

원제는 <빛의 개>인 것으로 되어 있다. 대사가 없으니 그들 가족 곁에 있는 홋카이도견들의 존재가 미미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얼마 전에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다. 이 책을 읽고 한참 후에 읽은 책이지만 이 리뷰를 쓰려고 하니 그 책의 내용이 생각이 났다. 사람의 말로 지식은 전달할 수 있으되 지혜는 전달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만큼 말이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일터다. 아유미가 말한 것처럼 내 마음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찌 알 것이며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보니 그들의 곁에서 그들 마음 속의 눈물을 그저 바라봐 주고 속마음을 들어주는 것은 말하지 못한 채 듣을 수 있는 귀를 가진 홋카이도견 뿐이었을 것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나이들고 그러면서 병들고, 서로와 이별하게 된다. 각자 인생의 소실점을 향해 점점점점 작아지다가 결국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쓸쓸하지만 또 어찌보면 자연의 이치인 것을, 너무나도 무심하게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

애초에 개의 우열을 다투고 채점을 한다는 것도 남자가 생각할 법한 일이 아닐까, 아유미는 생각했다. 여자만의 사계가 있다면 우승이니 준우승이니 하는 결말을 짓는 경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에게 가치를 정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상당히 이상한 절차다. 지로의 가치를 정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우리 가족이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中 p. 131

신앙이 반드시 사람을 구한다, 잔인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각자에게 찾아오는 위기에 정답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장면에서 항상 정답은 없습니다. 만약 신앙보다 먼저, 빛보다도 먼저 길 잃은 사람에게 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연민을 느끼는 마음도 아니고, 눈물을 흘리는 눈도 아닙니다. 그저 들어주기만 하는 귀입니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中 p. 269

부모 자식관계는 약 두 달 반만에 끝난다. 10월 초 가랑눈이 흩날리는 가운데 어린 새는 독립한다. 부모의 온기도, 형제 관계도 곧 희미해져 첫 겨울을 맞는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中 p. 291

자신의 마음조차 잘 알 수 없는데 남의 마음을 알 턱이 없다. 남의 마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몰라서 다행이다, 하고 아유미는 생각한다. 알 수 있는 거라면 개나 고양이처럼 서로의 냄새, 울음소리, 몸짓이 더 믿음이 간다. 말 같은 건 사실상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中 p. 319

혼자 자전거를 타는 기쁨은 자신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기쁨과는 다르다. 모든 것을 뒤에 내버려두고 가는 기쁨이다. 관성의 법칙으로 이미 진행 방향으로 나아가는 아유미는 단지 페달을 한 번 세게 밟는 것만으로 같은 장소에서 급속하게 멀어질 수 있다. 벚나무도 개울의 둑도 아유미를 그냥 보내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아유미를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中 p.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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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적인 사람 중 가장 외향적인 사람 - 까꿍TOON
최서연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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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고, 너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작가의 에세이는 더더욱 공감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아무래도 에세이란 작가 자신의 현재가 가장 잘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제목처럼 나를 표현하자면 외향적인 사람 중 가장 내향적인 사람에 가까운 사람이라 성격적으로도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성격도 정반대에 나이도 아들과 한살 차이로 아주 어린 작가의 세상이 나의 감정과 얼마나 가까운 공감대를 형성할까 싶어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만화형식이니까 쉽게는 읽히겠거니 하고 야구가 없어 지루했던 토요일에 슬쩍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게 머선 일이고! 나하고 유머 코드가 맞는 건가?? 너무 재미있게 깔깔대며, 심지어 배를 잡고 웃기까지 했다.

크게 친하지 않은 같은 반 친구가 한 아파트의 다른 층에 산다. 작가는 21층에 살고 친구는 11층에 산다(고 작가는 믿었다). 둘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지만 작가는 친구를 위해 자신의 집인 21층을 누르며 11층도 친절하게 눌러준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친구들과 헤어질 때 나눈 글에는 친구의 집이 15층이라고, 그래도 고마웠다고 씌여 있었다. 아마 그 친구도 작가만큼이나 내향적인 사람이었던 모양. 얼마 전에 새로운 책 중에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 쓴 에세이가 있었던 걸 보았다. 사실 누구도 약속이 취소되었다고 해서 아, 나 약속이 취소돼서 너무 기뻤잖아~라고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마음 속으로 뭐랄까 안심할 때가 있을 것이다. 약속이 있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전날 아무도 '우리 내일 만나는 거지?'하고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 약속이 취소되길 바라는 걸 수도 있다. 그리고 약속 당일 '이따 곧 봐' 가 아니라 '우리 오늘 만나?' 라는 문자가 온다면 그건 '우리 오늘 만날거야? 안 만나도 괜찮아'의 뜻일수도 있다. 남편이나 아들에게 가르치는 말투가 있다. 아내 혹은 여자친구에게 뭔가를 할 의향이 있다면 '~해줄까?'가 아니라 '~할게'라고 하라고. 뻔히 아는 걸 다시 묻는다는 건 안했으면 좋겠다, 안하고 싶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도 밖에 나가 노는 걸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이상하게 약속이 취소되면 마음이 편하고 좋을 때가 있다. 너무 집안에만 있다보니 꼼짝않고 있는 것이 익숙해져서일까? 코로나 때문이라면 너무 슬픈 일이네.


아들은 코로나 이후에 대학교에 입학하여 아직 동기들과 대면을 한번도 못해 본 채 대학교 2학년의 1학기를 마친 상태고, 남편은 얼마 전에 자격시험 봤으나 고배의 잔을 마셨고, 내년 시험을 위해 다시 준비 중이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다보니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작가의 일상이 너무나 와닿았다. 우리 아들도 누워서 컴퓨터를 켜고, 누워서 출석체크를 한다. 시험을 마치고 한 통화에서 남편은 망쳤다고 했고, 자기가 공부하지 않는 부분에서 많은 부분이 출제되었다고 했다.

'내가 어디 공부했는지도 못 맞히고, 출제자 바보!'


여긴 뭐지? 왜 20대도 이러지?? 하고 많이 웃었다. 내가 어렸을 때도 일기를 쓰면 꼭 끝은 '참 ~했다'로 끝이 났다.

참 재미있었다.

참 즐거웠다.

참 보람찼다.

참 슬펐다.

뭐든지 참참참이었다. 아마도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쓰거나, 써야하기 때문에 쓰는 글이었거나, 글감도 없는데 쥐어 짜내는 글이었기 때문에 뭐라도 쓰고 마무리가 어중간할 때는 참 ~한 것으로 끝내기가 가장 쉬웠기 때문이었으리라. 작가는 보람찬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단어의 혼동이 20대에 벌써 와버렸다. 테이크 아웃을 체킷아웃으로. 여기서 정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많이 하는 실수. 비슷한 단어들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오거나 전혀 말도 아닌 단어를 주워 섬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과를 먹으면서 아들이나 남편에게 사과 먹어, 라고 해야 할 걸 TV에서 야구 중계를 하고 있다면 해설자가 하는 단어를 주워다 쓴다. 변화구 먹어, 뭐 이런 식으로. 나이차이와 성격의 차이와는 별개로 유머 감각이 비슷해서인지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일단 책을 먼저 읽어보시고, 그 외 까꿍님의 다른 까꿍툰이 궁금하시다면 작가님의 인스타에도 방문해보시길~!

https://www.instagram.com/sally07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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