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의 시작에도 끝에도 '소실점'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소실점이라는 단어를 언제 들어봤던가.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배웠던가, 그럼 소실점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다. 물체가 아득히 멀어져 점점 작아지다 보면 결국 하나의 점으로 보이게 되는데 그것보다 더 작아질 수 없게 되는 점을 소실점이라고 한다, 고 설명에 나와 있었다. 미술이나 건축에 투시도 같은 걸 그릴 때 소실점을 찾곤 하는데 그런 학문적이거나 기술적인 의미 말고 그냥 '소실점'하고 발음해 보기만 해도, 아니면 입 밖으로 소리내어 소.실.점 하고 말해보기만 해도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드는 단어다, 라고 생각이 들었다. 작중의 인물 중 하나인 아유미가 자전거를 타고 내달릴 때, 다른 누군가를 뒤에 두고 훌쩍 떠나버릴 때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사라져 소실점 밖으로 멀어진다는 느낌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는 굉장히 극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그런 류의 소설은 아니다. 요즘 드라마로 예를 들자면 매회 누군가 죽고, 소리를 지르고, 분노하는 격정적인 주인공들이 나오는 미니시리즈라기 보다는 가족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착한 주말연속극 같은 분위기이다. 온가족이 함께 둘러 앉아 볼 수 있는 그런 류의 드라마. 그렇다고 밝고 명랑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가 내내 풍겨온다. 아마도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이미 급격하게 노령화 사회에 접어들었고, 전형적인 동양에서의 가족이라는 의미가 많이 퇴색하고 있는 일본의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홋카이도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사는 소에지마 가족 3대와 그들의 곁을 지키는 네 마리의 홋카이도견, 그리고 그들을 둘러 싼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 낸 이 소설은 등장하는 인물 중 누구 하나도 특별하게 혹은 과장되게 그려내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주변 어디에서도 흔하게 있을 법한 그런 이야기들 속에 그 시대를 반영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요네와 신조를 보면서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떠올리기도 하고, 요네의 세 딸들을 보면서는 내 이모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삶의 한가운데 어쩔 수 없이 등장하는 죽음과 이별에 대해서도 너무나 사실적으로 요란떨지 않는 표현이 좋았다.
원제는 <빛의 개>인 것으로 되어 있다. 대사가 없으니 그들 가족 곁에 있는 홋카이도견들의 존재가 미미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얼마 전에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다. 이 책을 읽고 한참 후에 읽은 책이지만 이 리뷰를 쓰려고 하니 그 책의 내용이 생각이 났다. 사람의 말로 지식은 전달할 수 있으되 지혜는 전달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만큼 말이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일터다. 아유미가 말한 것처럼 내 마음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찌 알 것이며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보니 그들의 곁에서 그들 마음 속의 눈물을 그저 바라봐 주고 속마음을 들어주는 것은 말하지 못한 채 듣을 수 있는 귀를 가진 홋카이도견 뿐이었을 것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나이들고 그러면서 병들고, 서로와 이별하게 된다. 각자 인생의 소실점을 향해 점점점점 작아지다가 결국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쓸쓸하지만 또 어찌보면 자연의 이치인 것을, 너무나도 무심하게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