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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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을 법한 문장들이 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수선화에게'

길이 끝난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봄길'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이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김광석의 노래로 더 유명한 '부치지 못한 편지'

이 유명한 문구들은 정호승 시인의 시들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50년 동안의 작품들을 모아 놓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안에는 275편의 대표작들이 실려있다. 개정증보판을 내며 쓴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마더 테레사 수녀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서 신을 본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에 기대어 모든 인간에게서 시를 본다'고 말하며 '고통이 인간적인 것이라면 시도 인간적인 것이겠지'라고 하였다. 한때는 시집을 모으기도 하고 읽기도 하고, 심지어 쓰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만의 시가 들어 있다고 믿는다. 똑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아도 누군가는 아, 하는 감탄사 뿐인가 하면 또 누군가는 눈에 보일 듯 손에 잡힐 듯 말로 그려낼 수 있기도 하다. 가끔 시를 읽으며 내 마음과 같다고 느끼는 때가 바로 그 시인이 내 속의 시를 끄집어 낸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시(詩)라는 장르에 뜨악하는 독자들이라면 아마도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단어 하나하나 쪼개가며 그 단어 안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 단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분석하고 외우는 사이 나도 모르게 시란 내맘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풀이용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접했던 시들은 주로 일제에 저항하는 시들이었던 1930년대의 저항시들로 이육사의 <광야>, 윤동주의 <서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의식적으로 저항을 위해 씌여진 시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문학작품들을 거의 난도질하다시피 분석하고 쪼개는 일들은 감수성이 한창 충만한 10대들에게는 혐오감을 줄 수도 있다. 예술이라는 장르에 속하는 모든 것들, 음악과 미술, 문학들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그럴싸하고 멋들어진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표현하지 못한다 해도 접하는 그 순간 내 가슴을 한번 쳤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

50년의 작품활동을 해온 정호승 시인의 시는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우리나라의 격동기를 모두 관통해왔다고 할 수 있기에 그의 시에도 문득문득 시대적 아픔, 슬픔 등을 함께 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여실히 남아 있었다. 그러니 이러한 시들도 20세기의 저항시라고 불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의 고향은 아가야

아메리카가 아니다.

네 아버지가 매섭게 총을 겨누고

어머니를 쓰러뜨리던 질겁하던 수수밭이다.

찢어진 옷고름만 홀로 남아 흐느끼던 논둑길이다

지뢰들이 숨죽이며 숨어 있던 모래밭

탱크가 지나간 날의 흘구덩이 속이다

'혼혈아에게'

서대문공원에 가면

사람을 자식으로 둔 나무가 있다

폐허인 양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사형 집행장 정문 앞

유난히 바람에 흔들리는 미루나무

'서대문공원'

긴 시간 시대와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온 그의 대표시들을 모아 놓은 이 작품을 읽고 있자니 삶이란 어느 정도 참으로 쓸쓸하지만 그렇다고 아름답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느낌이 든다. 눈물 속에도 꽃이 피고 이별 뒤에 만남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시선집의 마지막엔 제법 긴 분량의 해설이 있었지만 난 읽지 않았다. 내 마음대로 느끼고 해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가 몹시도 내리더니 갑작스럽게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는 시를 내 마음대로 느껴봐도 좋을 것 같다.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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